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60화 (60/95)
  • [60화]

    “…이봐, 은 어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가비가 퍼뜩 눈을 들었다. 자신의 담당 선학인 봉 어의가 물끄러미 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건가? 몇 번을 불렀는데.”

    “아, 죄송해요. 제가 잠시….”

    “피곤할 만도 하지. 원래 업무지로 발령받고 이맘때쯤이 제일 곤한 법이니까.”

    겁은 많지만 성격은 유한 봉 어의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지금 빨리 약초방으로 가야겠네. 재고 없는 약초가 생각보다 많아.”

    “예.”

    가비가 봉 어의를 따라 일어났다. 봉 어의는 실질적으로 반소의 주치의였지만 귀물경비대를 비롯하여 음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의 건강과 질병까지 두루 살피고 있었다.

    의궁 약초방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서둘러 필요한 약초들을 꺼내어 나무함에 챙겼다.

    “자네 혼자 들고 갈 수 있지? 나는 잠시 약제실도 들러야 해서.”

    “예. 일 보고 오세요. 먼저 가겠습니다.”

    가비가 겹겹이 쌓인 나무함을 들고 음궁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으나 나무함의 높이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뜰을 지나 다리를 건너는데, 불현듯 두 손이 가뿐해졌다.

    “…어?”

    언제 온 건지. 반소가 가비의 손에 있는 나무함을 전부 가져갔다.

    “내가 들어도 되는데.”

    말없이 걸어가는 반소의 옆을 가비가 재빨리 뒤따랐다.

    “오늘은 수도 정찰 안 나갔어?”

    “쉬는 날이라.”

    “아…. 쉬는 날.”

    그러고 보니 휴일은 꼬박 챙기는 반소였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챙기지 않으니까.”

    마치 가비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반소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반소가 아니면 태황궁의 누구도 귀물경비대를 따로 챙길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가비가 태황궁에서 다시 반소를 맞닥트렸을 때, 그는 귀물경비대로 보낼 약재를 주문했었다.

    그 또한 경계에서 고생한 귀물경비대를 챙기고픈 반소의 마음이었다는 걸, 가비는 뒤늦게 깨달았다.

    “근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음궁에 다다를 무렵, 가비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넌…, 전생이 있다고 믿어?”

    그동안은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허무맹랑한 얘기일 뿐이라고. 그런데 저쪽 세계에 있는 약초도감이나 할아버지의 말들을 종합해 보면 전생은 분명 있었다.

    그밖에도 가비가 판타지 소설로 치부하고 말았던 일들이 이쪽 세계에서는 현실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그걸 직접 겪어보니 할아버지의 말대로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믿어.”

    가비의 물음에 반소는 주저 없이 답했다.

    “전생뿐만이 아니라 현생과 후생까지.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태황국 자체가 삼생(三生)을 믿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네가 사는 저쪽 세계는 어떤데?”

    “믿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어.”

    “넌?”

    “나는…….”

    음궁에 들어서자마자 지나가던 시종들과 맞닥트렸고, 가비는 말을 멈췄다.

    시종들이 반소를 향해 꾸벅 인사하며 서둘러 그들을 지나쳤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소곤댔다. 아마도 가비가 들어야 할 물건을 반소가 들어주고 있는 듯한 광경이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가비는 시종들의 그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음궁 안에서라도 반소에 대한 소문이 호의적으로 바뀌길 바랐다.

    약방으로 들어온 반소가 들고 있던 나무함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고마워. 덕분에 편하게 왔어.”

    가비가 가져온 약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소가 툭하니 물었다.

    “그래서 넌.”

    “응?”

    “전생을 믿냐고.”

    가비가 하던 것을 멈추고 반소를 바라봤다.

    간신히 덮어두었던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아니,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일이 있고 난 후, 그대로 방으로 돌아와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침소를 뛰쳐나와 달아나는 자신을 장곡은 저지하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마치 현이 안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든 모두 용인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런 차가운 방관이 등골 오싹하게 느껴졌다. 태황궁의 모두가 장곡 같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현을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 신봉. 신망. 그에 따른 합리화와 정당화.

    현에게 반(反)하는 자는, 곧 태황국 전체를 척지게 되는 것이었다. 불쑥 두려움이 엄습했다.

    평화롭고 풍요로워 보이는 이 나라가, 실은 현을 중심으로 매우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아 보였는지 반소가 다가왔다. 가비의 눈가를 엄지로 쓸며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잠을 못 잔 얼굴인데.”

    가비가 반소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렸다. 마디가 굵고 거친 손은, 이제 가비에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현은 달랐다. 눈빛과 말투와 손길에서, 강압과 굴복에 대한 강요가 느껴졌다.

    “나도 믿어. 전생.”

    가비가 뒤늦게 답했다.

    “믿지 않았는데…, 믿게 됐어. 오늘부로.”

    가비는 자신의 꿈이 허상이 아님을 확신했다. 감옥소에서 꾸었던 꿈과 이번 꿈은 분명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언제, 어디선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틀림없었다. 막연했지만 그랬다.

    그저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느낌과 감정들이 실제처럼 생생했다.

    하지만 꿈에서 본 그 장소가 어떻게 현의 침소와 똑같이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중요한 건 꿈이 전생을 보여준 거라면, 그래서 가비가 과거의 태황국에서 실존했었다면, 그럼 저쪽 세계로 돌아갈 해답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는 짐작이었다.

    하지만 내가 돌아가면…….

    눈앞에 있는 반소가 마음에 걸렸다. 걸리다 못해 아팠다.

    “넌…, 좀 더 친절해질 필요가 있어.”

    가비가 반소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다정해질 필요가 있어. 사람들한테.”

    “내가 왜.”

    반소가 되물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 그렇게 하고 싶은 건 너 하난데.”

    다정하고 친절한 행동이 어떤 건지 모른다. 다만 마음을 쓰고 쏟는 거라면, 반소는 가비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고집스러운 반소의 눈빛은 돌아가는 법을 몰랐다. 융통성이나 사회성이라곤 조금도 느낄 수 없었고.

    가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나 밤에…, 양궁에 다녀왔어.”

    “양궁에?”

    반소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비는 반소에게 새벽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이 일을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단, 현이 제게 보인 행동을 상세히 풀진 않았다.

    그저 현이 반소에게 달갑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만 귀띔해주었다. 그런 정보조차 없으면 태황궁에서 반소의 위치는 너무도 불리했다. 자칫 반소뿐 아니라 귀물경비대까지 경계로 쫓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하지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반소의 표정은 무감했다. 마치 현의 속내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녀석이 날 싫어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반인반귀까지 감싸주는 아량 넓은 천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 반대라는 걸, 반소는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과 귀물경비대를 귀물들을 처리하는 방패막이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걸 알면서도 장단에 놀아준 건 결국 태황국때문이었다. 자신을 배척하고 기피하는 나라지만, 그래도 제가 태어난 곳이기에.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곳이기에 그랬다.

    “녀석이 또 부르면 내게 와.”

    “어떻게 그래. 그럼 네가……,”

    “말했잖아. 내가 네 방패가 되어 주고 무기가 되어 준다고.”

    누가 뭐래도 가비는 제 사람이었다. 반소 자신이 그리 정했다. 허니 함부로 위협을 가하거나 건드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게 천자라 해도.

    “어쩐지 네 얼굴빛이 좋지 않았어.”

    반소가 가비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 지금처럼. 내게 숨기지 말고.”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비를 바라보는 반소의 눈빛이 깊어졌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그랬지만, 반소의 손은 하릴없이 가비의 뺨만 맴돌았다. 어느새 탁해진 음성으로 그가 속삭였다.

    “오늘 수도로 약초방을 감찰 간다고 했나?”

    “응. 점심 먹고 바로.”

    “그냥 일만 보고 와라. 다른 건 하지 말고.”

    “알았어.”

    반소의 걱정을 살까, 가비는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매혈꾼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든 얻고 싶었다. 이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면, 정말 귀물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그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반소과 귀물경비대뿐만이 아니라 죽은 윤을 위해서라도 그랬다.

    점심 식사 후. 가비와 연화를 비롯한 동기 몇 명이 서문을 따라 수도에 있는 약초방을 감찰 나갔다. 이는 서문이 바쁠 때 후학들이 조를 이루어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라고 했다.

    감찰은 예고 없이 진행됐다. 그 때문인지 약초방의 주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비와 연화는 약초의 출처와 반출이 적힌 장부를 검사했고, 나머지 동기들은 보관함 등을 샅샅이 뒤지며 금지된 품목들이 있나 살폈다. 약초관리와 청결 상태 또한 검시 목록이었다.

    그렇게 여러 곳을 돌고 나니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서문이 어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일을 보느라 수고가 많았으니 자유시간을 주마. 술시(戌時:19시~21시)까지 태황궁으로 향하는 마을 입구에서 보자꾸나.”

    “와아- 감사합니다! 태어의님!”

    뜻밖의 선심에 다들 신이 난 얼굴이었다. 서문이 자리를 뜨자, 각자 목적지를 정해 뿔뿔이 흩어졌다.

    “은갑아!”

    장터로 들어가는 가비의 뒤를 연화가 쪼르르 따라왔다.

    “어디가?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가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주막에 밥 먹으러 갈 건데. 연화 넌 머리 장식 산다고 안 했어?”

    “그거야 나중에 사면 되지 뭐. 나도 너 따라서 밥 먹을래.”

    오늘 함께 나온 동기 중 여자는 연화뿐이었다. 굳이 따라오겠다는 걸 매몰차게 밀어낼 수도 없어 함께 주막으로 향했다. 가비는 일부로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택했다.

    이리저리 자리를 둘러보다 구석에 앉자는 연화의 제안을 물리고, 방물장수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들이 있는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그래, 뭐 드릴까?”

    주인장의 물음에 간단히 국밥 두 그릇을 시키고 연화가 먹고 싶다는 전도 하나 시켰다.

    연화가 땀이 나는지 가볍게 손부채질을 했다.

    “부쩍 더워진 것 같아. 그치, 은갑아.”

    날은 어느새 봄을 지나, 서서히 여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게. 봄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가비가 적절히 응수하며 방물장수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별다른 수확 없이 다른 얘기만 실컷 하다 자리를 떴다.

    그러는 사이 상이 차려졌고 가비와 연화는 국밥을 떴다. 방물장수들이 앉아 있던 곳에 이번엔 농사를 짓는 농부 꾼들이 앉았다.

    밥을 떠먹으며 그들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역시나. 건질 만한 게 없었다. 그 후 젊은 남자 무리가 왔지만, 그들에게서도 엿들을 게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연화와 식사를 마친 가비가 주막을 나왔다.

    “연화야, 머리 장식 보러 갈까? 시간 좀 있는데.”

    “진짜? 그래도 돼?”

    “응.”

    연화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서 걸었다. 머리 장식을 파는 노점상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가비를 향해 손짓했다. 그 모습이 활짝 핀 꽃처럼 어여뻤다.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마침내 마음에 드는 걸 찾았는지 연화의 걸음이 멈췄다.

    “은갑아, 이거 어때?”

    “예쁘다. 연화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정말?”

    연화가 그걸 머리에 대보자 주인이 냉큼 명경을 들이밀었다.

    그때, 가비와 연화 옆으로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또래로 보이는 여인 두 명이었다. 여인들은 들뜬 얼굴로 머리 장식을 양껏 골랐다.

    “계집애. 벼르고 있던 거 다 사는구나?”

    “그럼. 공돈 생겼을 때 사야지 언제 사.”

    “그게 왜 공돈이니? 네 피 팔아서 받은 돈인데.”

    “야아, 쉿!”

    여인 한 명이 황급히 다른 한 명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이미 가비가 들은 직후였다.

    “저기…….”

    여인들이 가비를 돌아봤다. 순간 고개를 갸웃하더니 차림새를 보고 사내라고 판단했는지 표정을 갈무리했다. 가비가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궁금한 것 좀 물어도 될까요?”

    “무슨…….”

    “혹 매혈꾼이 어딨는지 아십니까?”

    여인 두 명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모르쇠를 했다. 가비가 주머니에서 챙겨온 돈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지 말고 공유해주시죠. 비밀로 할 테니.”

    여인들이 슬쩍 돈을 받더니 답을 내놨다.

    “알려드릴 순 있는데, 그쪽은 매혈 대상이 안 될걸요?”

    그 말에 저만치에 뚝 떨어져 있던 연화가 언제 왔는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제가 갈 거예요, 제가!”

    가비가 놀란 얼굴로 연화를 돌아봤다. 가비와 눈을 맞춘 연화가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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