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57화 (57/95)
  • [57화]

    그날 밤. 가비는 꿈을 꾸었다.

    어두운 방이었고 자신은 그 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건 자각몽.

    꿈이지만 꿈인 걸 알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제삼자의 입장이 되어 주위를 둘러봤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어렴풋이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화려하게 놓인 장식품.

    금장을 두른 침상과 독특한 문양의 벽지. 그리고 섬세하게 조각된 천장까지.

    분명 좋은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 위화감은 뭐야.

    방 안 공기는 찬 이슬을 머금은 듯 싸늘했다.

    마치…, 화려하게 꾸며진 감옥소 같았다.

    그때. 창 너머로 부옇게 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내 푸른 쪽빛이 방안을 물들였다.

    한참을 인형처럼 앉아 있기만 하던 자신의 모습도 점차 뚜렷하게 보였다.

    붉은색의 긴 머리카락-

    꿈속의 자신은 노을을 닮은 붉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폭포수처럼 늘어트리고 있었다.

    해가 온전히 뜨자, 힘없이 푹 꺾여 있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

    제 모습을 명확하게 응시한 가비가 놀란 숨을 삼켰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처럼 자신의 눈동자 또한 아름다운 붉은 색이었다.

    신비로운 홍안은 아침 해가 들어오는 창밖을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달싹이는 입술이 누군가를 불렀다.

    뭐라고?

    물기 없는 마른 입술이 끊임없이 누군가를 속삭였다.

    대체 누굴 찾는 거야.

    이내 표정 없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붉은 눈동자가 금세 눈물을 쏟을 것처럼 커다랗게 일렁였다.

    두근두근-

    순간 꿈속의 자신과 감정이 동화된 것처럼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그리고,

    “……윽.”

    통증과 함께 꿈에서 깼다.

    눈을 뜬 가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정작 아픈 건 심장이 아니라 배였다.

    가비가 둥글게 몸을 웅크리며 아랫배를 감쌌다.

    왜 이렇게 아프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아랫배를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얼마 전까지 있었던 가슴 통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서문님께 진찰이라도 받아야 하나?

    태황궁에서 자신이 여자인 걸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몸 상태를 확인받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내몰릴 즈음, 거짓말처럼 통증이 잦아들었다.

    “하아…….”

    비로소 옹송그리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어느새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손등으로 그것을 훔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숨죽인 발소리가 가비의 방 앞에서 멈췄다.

    톡, 톡.

    문을 두드리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누구지?

    벌써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가비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조그맣게 묻자 속삭이는 답변이 돌아왔다.

    “천자님을 모시고 있는 장곡이오.”

    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장곡이라면 천자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태황궁의 모든 시종관을 아우르는 시종장이었다.

    그 사람이 왜?

    달칵.

    가비가 살짝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장곡의 주름진 얼굴이 보였다.

    “지금 당장 옷을 갈아입고 나오시오. 천자님께서 찾으시니.”

    현이…….

    가비가 알고 있던 사서 현이 아니었다. 태황궁의 하늘이라 칭하는 천자 현의 부름이었다. 안 갈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문을 닫은 가비가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가슴 압박이 제대로 되었는지 살핀 뒤 장곡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늘함이 가슴을 스쳤다.

    * * *

    양궁의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화려했다. 음지 든 곳에 있는 음궁도 격식을 갖춘 건물이었지만, 양궁에 비할 것은 못 되었다. 막상 눈으로 보니 그 둘의 차이가 극심했으며, 이는 곧 천자와 야왕의 존재적 차별로 느껴졌다.

    “천자님의 병증에 대해 알고 있다고 들었소.”

    이제는 어의가 된 가비에게 장곡은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다.

    “예. 우연찮게 보게 되어서 본의 아니게 알고 있습니다.”

    가비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장곡이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짐작은 했겠지만 병증이 돋아 공식적인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하셨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아무리 쉬쉬해도 병환이 길어지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이삼일 정도 앓았으니 감추기에 적절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무리 양궁에 드나드는 시종들을 통제하고 밤에는 침소 근처로 얼씬도 못 하게 한다지만, 눈과 귀와 입이 달린 모두를 단속하는 건 어려웠다.

    그렇게 알음알음 퍼진 소문은 태황궁 전체로 번지게 되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겸복처럼 헛소문으로 간주하였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오정처럼 믿었으면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연화처럼 긴가민가하였다.

    “이는 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천자님의 건강이 흔들리면 태황국의 민심 전체도 흔들리기 마련이오.”

    무려 하늘의 핏줄, 천족의 우두머리였다. 사람들에겐 보통의 왕이 아니라 신격화된 존재였다. 하물며 주술력이라는 기이한 능력까지 갖고 있고 가비 역시 그것을 직접 보고 겪어봤으니 그 믿음이란 것이 오죽할까 싶었다.

    “허니 오늘 밤, 은 어의께서 천자님을 뵙고 시중을 좀 들어주었으면 하오.”

    “시중을 들라시는 게…. 진료에 관한 거라면 저보다는 태어의님이 보시는 게 나을듯한데요.”

    “말 그대로 시중이요.”

    장곡이 흘깃 가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의된 자니 당연히 알겠지만, 몸과 마음은 깊이 연결되어 둘 중 하나만 무너져도 탈이 나는 법이오. 지금 천자님께 필요한 건 그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고. 몸은 말씀하신 대로 태어의님이 살피고 있으니 은 어의가 할 일은 천자님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오.”

    마음을 살피는 일….

    그게 정확하게 무언지. 제게 뭘 바라기에 이렇게 밤중에 남몰래 부르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직접 가보는 수밖에.

    가비는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장곡의 뒤를 따랐다.

    간만에 현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걸 본 천태비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그게 그리도 좋습니까?”

    현의 손에는 가비가 만들어준 헝겊 인형이 들려 있었다.

    현이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천태비를 돌아봤다.

    “분명 장곡이 버렸다 했는데 이걸 어찌 찾으셨습니까?”

    “어미가 말했지요? 버려졌든 뜯겨서 망가졌든, 천자가 갖고 싶다면 반드시 찾아낸다고. 어미는 약속한 것은 꼭 지킨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뿐이세요.”

    정화수로 정화한 직후 가져온 것인지 인형은 물기를 먹어 축축했다. 그래도 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정화까지 해주었으니 인형은 이제 온전히 제 것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귀한 물건이 되었다.

    진작 어머니께 말할걸.

    현이 만족한 얼굴로 인형을 침상 맡에 두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천태비의 눈길이 애틋해졌다.

    “그나저나 통증은 좀 어때요. 서문에게 듣기로는 혈담초를 복용한 후 괜찮아졌다고 하던데.”

    “예. 확실히 통증은 사라졌습니다. 잠도 제법 자고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통증만 없어도 살 것 같았다. 허나 얼룩덜룩한 피부의 병변은 여전했다.

    “이것도 곧 사라질 거예요.”

    천태비가 얼룩이 낭자한 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궁 안에 제 건강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걱정 말아요. 소문은 소문일 뿐. 그걸 사실로 증명할 사람은 없을 테니.”

    설사 있다 해도 죽여버리면 그뿐이었다.

    “다만 어미가 걱정되는 입은 하나예요. 인형을 만들어주었다는 그 어의가……,”

    “은갑이는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현이 서둘러 말했다.

    “은갑이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소문을 낼 아이였다면 진작에 냈을 거예요. 제 병증을 본 것도 우연이었고, 봤어도 그리 놀라지 않았어요. 너무 덤덤해서 오히려 화를 냈던 제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열과 성을 다해 가비의 편을 드는 현을 보고 천태비가 묘한 웃음을 띠었다.

    “그 아이가 참으로 맘에 드는 모양이에요.”

    “동생 같고 친우 같고…. 뭐랄까.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꼭 알던 사람처럼.”

    그 말을 들은 천태비가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불렀어요.”

    “예?”

    “그 아이 말이에요.”

    “그 아이라면……,”

    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은갑이를 부르셨단 말입니까?”

    천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자가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는 아이가 누군지 이 어미가 너무 궁금해서요. 게다가 태어의 서문은 모든 게 출중하지만 딱 한 가지, 융통성이 없다는 게 흠이잖아요? 원리원칙을 지키다 보니 이제 막 어의가 된 자를 양궁에 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답니다. 허나 그 또한 천자를 향한 충성심이 깊어 그런 걸 어쩌겠어요. 해서 어미가 서문 몰래 그 아이를 불렀지요. 허니 이 일은 서문에겐 비밀입니다?”

    천태비가 농을 걸듯 해사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현도 웃음을 머금었다. 서문도 장곡도 모두 그를 위한 사람이었지만 제 마음을 알아주는 건 역시 하늘 아래 어머니인 천태비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웃게 해주려는 어미의 노력이 너무도 안타깝고 고마웠다.

    “불로초를 만나면 하루 빨리 혼인하여 천자비로 맞은 뒤 이 병증을 치료할 것입니다. 하여 태황국을 태평성대로 이끌며 어머니께도 효를 다할 것입니다.”

    “말만 들어도 수복을 누릴 것만 같아요.”

    “그럼요. 말 그대로 오래 사시고 복을 누리셔야죠. 제가 꼭 수복을 드릴 겁니다.”

    “이 어미도 천자뿐입니다. 고마워요, 천자.”

    천태비가 현의 손등을 다독일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장곡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장곡이 안으로 들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가비를 보고 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