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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49화 (49/95)

[49화]

윤의 집을 나선 건 해가 질 무렵이었다. 길게 진 노을을 보며 가비가 뿌듯한 얼굴로 윤의 집을 돌아봤다.

‘저희 집에 방 하나만 더 있어도 형님을 재워드릴 수 있을 텐데.’

윤이 자못 아쉬운 얼굴로 얘기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가비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나도 이제 가봐야지. 윤이 너도 오늘 저녁에 일이 있다며. 마을 축사에 청소하러 간다고 안 했어?’

‘네. 품삯도 주는 거라 동네 친우들하고 같이 해요.’

‘저녁에 일하려면 힘들지 않아?’

‘낮에는 학당에 가야 하니까요. 종종 하던 거라 괜찮아요.’

‘그래…?’

가비는 저도 모르게 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 나이에 밤낮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안쓰럽고 기특해서였다. 대단해 보이기도 했고.

‘다음에 또 놀러 올게.’

‘약속하셨어요?’

‘그럼.’

가비와 인사를 나눈 윤이 쭈뼛대는 얼굴로 반소를 바라봤다.

‘형님께서도 또 오시던지요.’

‘형님?’

이 녀석이 언제 봤다고 형님이야, 하는 얼굴로 반소가 윤을 내려다봤다.

윤이 찔끔하더니 이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은갑이 형님과 절친이시면 저한테도 형님인 거죠.’

할 말은 하면서 말끝을 사그라뜨리는 모양새가 우스워 반소는 더 토를 달지 않았다.

가비와 함께 동네를 빠져나온 반소가 혼잣말처럼 툭 내뱉었다.

“어린 녀석이 넉살은.”

가비는 그 말이 윤을 향해 하는 말인 걸 알았다. 반소 나름의 칭찬인 것도.

“외동이라 그런 가봐. 외로움을 좀 타거든. 나도 그랬고.”

가비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나도 형제자매가 있는 집을 보면 부러웠어. 서로 피를 나눈 혈육이지만 둘도 없는 친구 같아 보여서.”

그래서인지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말을 걸고 금세 친해지곤 했었다. 소탈한 성격 탓에 사람들도 그걸 싫어하지 않았고. 그렇게 만든 언니나 오빠, 또는 선배나 후배들이 모두 저쪽 세계에 있었다.

“넌 외동이라 외로웠고, 난 형제가 있어도 외로웠군.”

가비가 대답 없이 반소를 바라봤다. 어쩌면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를 얘기를 무심한 얼굴로 태연하게 했다. 꼭 남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해서 넌.”

반소가 가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고작 장터에서 한번 본 녀석에게 내 주머니까지 턴 건가?”

바짝 좁아진 반소의 미간을 보며 가비가 웃음을 참았다.

“윤이 착하잖아. 똘망똘망하고.”

그건 반소도 인정하는 바였다.

“난, 내가 인연 맺은 사람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

가비가 말했다.

“윤이도, 서문님도, 같이 공부한 학우들도. 모두 내가 여기 처음 와서 맺은 인연들이잖아.”

만난 횟수나 알고 지낸 시간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그들이 마음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게 중요할 뿐.

“그러니까 잘 지냈으면 좋겠어. 반소 너도.”

“…….”

눈이 마주쳤고, 가비는 웃었다. 하지만 반소는 웃지 않았다. 그 말이 언젠가는 꼭 떠날 사람인 것처럼 들려서.

반소가 화제를 돌리며 시선까지 돌렸다.

“묵을 때는 정한 건가?”

“아니, 아직.”

“그럼 내가 정한 데로 가지.”

“너도 자고 가려고?”

반소가 대답 없이 걸음을 서둘렀고, 가비가 그 옆을 바짝 따랐다.

“궁에 안 들어가도 돼?”

“…….”

“암행하면 외박도 하는 거야?”

“…….”

“잘됐다! 낯선 곳에서 혼자 자기 좀 그랬는데. 왠지 든든해.”

가비가 신이 난 얼굴로 앞서 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반소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수도 물정을 잘 몰라 그런 건지, 현재 본인이 가지고 있는 남은 돈으로는 창고 같은 방에서 다른 사내들과 뒤섞여 자야 한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 * *

든든하다는 말 취소.

가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반소를 따라온 곳은 주막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엄청나게 큰 곳이었다. 듣자 하니 수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몇 안 되는 곳이라고.

반소는 미리 금액이라도 치러둔 듯 정해진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여기서 자?”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 가비가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하고 머뭇댔다. 방은 깨끗했지만 좁았다. 가비가 의학도로 머물던 학도당의 방보다도 작았다.

“보시다시피.”

반소의 말처럼 숙소로 꾸려진 주막의 별채는 이른 저녁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게다가 함께 암행을 나온 귀물경비대도 이제 곧 일정을 마치고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한마디로 여분의 방이 없다는 소리였다.

가비가 포기한 듯 방으로 들어섰다. 봇짐을 내려놓고 방 한쪽에 조용히 앉았다.

“…….”

침묵이 흘렀다.

부스럭-

반소가 겉옷을 벗었다.

“왜, 왜?”

가비가 흠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씻어야지. 별채를 돌아가면 공용 목간이 있다고 들었어.”

“아….”

“넌? 안 씻어?”

“난 좀 이따가.”

가비가 무릎을 끌어안으며 움직이지 않을 기세로 말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가만히 있던 반소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가비가 눈을 굴려 방안을 둘러봤다.

공기가 좀 덥나.

괜스레 후텁지근한 것 같아 창문을 조금 열었다. 주막 어딘가에 꽃나무가 있는지 바람을 따라 꽃향기가 들어왔다.

긴장은 왜 하는데.

가비가 일부러 어깨를 쫙 펴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한 공간에 같이 있었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랬다. 음궁 침소에서 함께 책을 보기도 하고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런데 새삼 둘이 있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러면서도 가비는 자꾸 문 쪽을 쳐다봤다. 씻으러 간 반소가 언제 돌아오나 신경이 쓰였다.

이렇게 좁은 곳에 밤새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게 의식이 됐다.

덜컹-

일각쯤 지났을까. 반소가 들어왔다. 반소를 바라본 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대충 닦은 물기 때문인지 축축하게 젖은 얄팍한 상의가 반소의 가슴팍에 엉기듯 붙어 있었다.

그뿐인가 옷 매듭도 묶지 않아 앞섶이 열린 상태였다.

“그, 앞에 좀…,”

“뭐?”

반소가 물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눈을 맞췄다.

가비가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상의 탈의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눈 둘 곳을 못 찾겠다. 애써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자 반소가 말을 던졌다.

“일어나.”

“어?”

가비가 눈을 들어 반소를 바라봤다.

반소가 눈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씻어야 할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공용 목간이면 분명 사람이 많을 터였다. 그렇다고 여인들이 사용하는 목간으로 갈 수도 없고. 학도당의 공용 목간은 대부분 사용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것만 피하면 됐지만, 여긴 말 그대로 불특정 다수가 예고 없이 불쑥불쑥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 자정? 새벽?”

반소가 소용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긴 주막이다. 자정이든 새벽이든 대중없이 드나들어.”

“…….”

“안 씻을 거라면 상관없지만.”

씻고 싶긴 했다. 후끈하게 데워진 봄 햇살 아래 발바닥에 땀띠가 나게 돌아다녔더니 등허리에 땀이 맺혔더랬다.

“망봐준다고. 내가.”

반소가 무심한 어조로 내뱉었다.

“편히 씻어. 그러니까.”

그 말에 가비가 커다란 눈을 끔뻑였다. 정말 그렇게 해도 되나 싶었지만, 반소가 하는 말이라 무조건적인 신뢰가 갔다.

결국, 갈아입을 옷을 들고 반소를 따라나섰다.

찌르르- 찌르르-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이었다. 밤벌레가 우는 솔길을 따라 별채를 조금 벗어나니, 별채와 다른 외형을 가진 건물 하나가 나왔다. 공용 목간이었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반소가 고갯짓으로 들어가라고 표시했다. 다행히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부탁해.”

가비가 목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노파심이었다.

이내 훌훌 옷을 벗은 가비가 욕통에 담겨 있는 물을 퍼서 머리 위로 들이부었다.

“으, 시원해!”

개운함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루 동안 쌓인 먼지가 죄다 씻기는 것 같았다. 머리를 푸르르 털어낸 가비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씻기 시작했다.

둥그런 대야에 물을 퍼담고 어푸어푸 세수하는데, 별안간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비가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사내 여럿이 목간을 가로 막고 선 반소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다른 목간으로 가라.”

“네가 뭔데 다른 데로 가라 마라야!”

사내들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야왕 반소다.”

반소가 나직하게 답했다.

“뭐?”

“방금 내가 뭐냐고 물었잖아. 야왕 반소라고 했어. 못 들었나?”

“…….”

일순 정적이 흘렀다. 가비가 마른 침을 삼키며 밖에 상황을 주시했다.

이내 사내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

“꺼져.”

후다다닥 달아나는 사내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가비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퉁퉁-

반소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씻어라. 계속.”

그 말에 굳었던 긴장이 풀리며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밖에서 벌어진 일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그 칠흑 같은 눈으로 사내들을 노려봤겠지.

가비가 편안한 기색으로 욕통에 몸을 담갔다. 가만 보면 은근히 뒤에서 챙기는 성격이었다. 지금도 굳이 왜 목간 앞을 지켜주는 걸까 생각해보니, 전에 가비가 했던 말 때문인 듯했다.

몸에 흉이 있어서 남에게 보이기 싫다는.

아무튼 츤데레야. 아까 윤이 일도 그렇고.

가비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샐쭉이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스스스슥-

공중에서 무언가가 내려왔다.

무심코 눈을 든 가비가 단전에서 올라온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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