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46화 (46/95)

[46화]

가비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원치 않은 상황에서 맞닥뜨려 그런 건지, 반가움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음궁에 가지 못한 며칠 동안, 가비 역시 반소를 생각했었는데.

“업무에 관련된 일이라 꼬치꼬치 캐묻는 건 곤란해. 나도 이제 어의잖아. 말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어.”

직책과 일을 핑계로 둘러댔다. 그러면서도 반소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통을 바라보던 반소가 고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 보군.”

그 말에 가비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난 네가 보고 싶었는데.”

천천히 눈을 들자 반소가 칠흑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강렬해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시험은 잘 봤는지, 합격은 했는지 내내 궁금했다.”

그런데 넌 왜 내게 기별조차 안 했냐고 따져 묻는 것 같았다.

가비가 더듬더듬 설명했다.

“정신이 없었어. 알다시피 일이 있었고…,”

“일?”

반소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봤다.

가비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몰랐어? 시험 날, 일이 있었거든.”

가비가 그날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듣고 있던 반소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해서 넌!”

반소가 가비의 어깨를 붙들었다.

“어딜, 얼마만큼 다친 거냐!”

금방이라도 옷 매듭을 뜯어볼 기세라 가비가 놀라 두 손으로 가슴께를 가렸다.

“안 다쳤어! 괜찮다고!”

“화소초가 닿았는데 괜찮다고?”

“옷이 날 살렸어.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거든!”

그제야 반소가 거친 숨과 함께 가비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을 떨궜다.

가비 역시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정말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와락 잡는데 심장이 쿵, 하고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이래저래 바빴어. 기별을 넣으려고 했더니 임명식 있지, 학도당 비워줘야지, 명의당으로 짐도 옮겨야지. 말만 들어도 숨차지?”

가비가 빙긋 웃는 얼굴로 동의를 구했다. 그렇다 해도 반소는 기분이 썩 탐탁지 않았다. 가비의 웃는 얼굴을 보니 보고 싶었던 마음은 해소되었으나, 여전히 평소 같지 않아 보였던 서문이 걸린 탓이었다.

“아무튼 넌 헤픈 녀석이다.”

“뭐?”

“아무한테나 실실거리고 아무하고나 친우가 되니까.”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가비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 베프는 너야.”

“베프?”

“저쪽 세계 말로 절친이란 뜻.”

“그만큼 가깝다는 건가?”

“특별한 거지. 아주.”

반소는 ‘특별’이란 말이 좋았다. 무엇이 이리도 갈증이 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비에겐 늘 더한 것을 바라고 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걸 적당히 쥐여주는 가비가 싫지 않았다.

“딱 기다려. 나 오늘 지원서 쓰거든.”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가비가 말을 보탰다.

“음궁 약방으로 갈 거야. 너랑 약속한 대로.”

활짝 웃는 가비를 따라 반소의 입꼬리로 실긋, 올라갔다.

시험날 일이 생긴 줄도 몰랐다는 게 언짢았지만, 평소 같지 않던 서문의 태도가 심히 거슬렸지만, 음궁으로 오겠다는 가비의 말 한마디가 불편했던 심기를 녹였다.

참으로 별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 * *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천태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엔 붉은 입술만이 선명했다. 풍성한 백발을 어깨 한쪽으로 늘어뜨린 모습은 흡사 도자기 인형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다른 일엔 하해와 같은 분이, 아들 천자와 관련된 일엔 가차 없이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천자의 침상 맡에 몹쓸 것이 있던데.”

아마도 헝겊 인형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그것이 천자님께서…,”

장곡이 천태비의 발치에 납작 엎드렸다.

천태비의 침소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일 만큼 깔끔했다. 침소를 지키는 시종들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침소 안을 쓸고 닦았다. 몸이 허한 천태비가 먼지 한 톨 삼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장곡이 드는 날엔 침소 안을 지키고 있던 시종들은 밖으로 물러갔다. 천태비 곁을 지키고 있는 건, 천태비에게 극한 충심을 보이는 천태비궁의 시종관 뿐이었다.

태황궁의 모든 ‘시종관’을 관리하는 것이 ‘시종장’인 장곡이었으나, 천태비궁에 들 때면 항상 말단 시종처럼 몸을 낮췄다. 천태비를 등에 업은 천태비궁의 시종관도 그런 장곡에게 딱히 예를 갖추지 않았다.

태황궁의 실질적인 주인은 천자가 아닌, 천자를 낳은 천태비이기 때문이었다. 감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사람도, 인정할 사람도 없었으나 적어도 장곡만큼은 그리 확신했다.

“해서.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고요? 왜요?”

천태비가 소녀처럼 고운 목소리로 물었다.

“장곡의 역할이 무언가요. 부정한 것으로부터 천자를 지키는 일 아니었던가요?”

“예. 예, 맞습니다. 천태비님.”

“읊어보세요. 그대가 해야 할 일을.”

그건 압박이었다. 천자를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갈아 넣어야 함을 상기시키는 일.

“천자님의 눈과 귀가 되어 험한 것을 걸러주며, 천자님의 손과 발이 되어 존체가 상할 일을 없게 함이며, 부정한 것은 물리치고, 그 탁한 기운이 감히 스미지 못하게 방패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자님의 귀한 씨가 결실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 그 흔적이 천한 몸에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천자의 씨물은 꼭 천자비를 통해서만 잉태되어야 해요. 허니 밤을 보낸 여인이 있다면 필히 그 씨가 결실이 되지 못하도록 싹싹 긁어내야 합니다.”

천자와 밤을 보낸 여인들의 입을 막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패물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으니.

설사 입방정을 떨면 죽이면 그뿐이었다. 대가를 받고도 약조를 지키지 않는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대가 그 나이 먹도록 매병(呆病)에 걸리지 않고 건강히 육체를 보존하고 있는 이유를 항시 잊지 말아요.”

“예. 예, 천태비님.”

“천자와 관련된 건 그 어떤 것도 허투루 들이지도 말고 내보내지도 말고요.”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 모든 게 천자를 위함임을 알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요.”

천태비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방금과 다른,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장곡을 향해 손짓했다.

“가까이.”

장곡이 무릎으로 기어 천태비의 발치까지 다가갔다.

천태비가 살짝 고개를 내려 장곡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대가 은밀히 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요.”

“분부만 내리십시오.”

“천자비를 찾는, 아주 중대한 일을 그대에게 맡길까 해요.”

장곡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내 천태비의 음성이 나긋하게 흘러들었다.

* * *(뉴_토_끼_지_나_가_던_행_인)

이른 저녁. 평소와 달리 양궁은 적막하기만 했다. 천자를 시중들던 시종들도 모습을 감추었고, 현의 침전에는 오직 장곡뿐이었다.

벌써 한 시진째. 현은 욕통 안에 풀어놓은 약초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온몸이 병증으로 인해 얼룩덜룩했다. 제 몸이지만 차마 눈 뜨고 보기 흉한 꼴이었다.

어의 시험날도, 임명식도, 공식적인 자리에 아무것도 참석하지 못했다. 감옥소에서의 일부터 연이은 부재까지.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떠돈다는 걸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날 때부터 병증을 안고 있었다지만 이번처럼 길게 이어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 사실이 현의 신경을 잘 벼린 칼날처럼 예민하게 만들었다. 며칠째 통증으로 이어진 불면으로 잠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얼굴엔 피로가 역력했고 부드럽게 휘어있던 눈초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촤악-

욕통에서 일어나자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고 있던 장곡이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 더 앉아 계시지요.”

“됐다.”

“아직 물이 따뜻하니 조금만 더…,”

“됐다고 하지 않았느냐.”

싸늘하게 일갈한 현이 물도 닦지 않은 알몸으로 목간을 빠져나갔다.

장곡이 서둘러 마른 면포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방으로 돌아온 현에게 장곡이 보드라운 침의를 입혔다. 텅 빈 침전이 오늘따라 무덤가처럼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탁!

현이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침소에 있는 명경을 뒤집어엎었다. 명경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더럽고 추한 몰골은 천자 현이 아니었다.

천자 현은 아름다운 금백색의 머리카락에 금안을 지녔으며 여인보다도 고운 피부를 지닌 자였다. 이렇게 흉측한 꼴로 성난 짐승 같은 눈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제가 아는 아이도 사서님처럼 생겼어요.’

불현듯 가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갈색 무늬가 얼마나 예뻤는데요.’

이런 괴상한 얼룩을 고양이에 빗대어준 가비의 얼굴이, 그 미소가, 허물없는 눈빛이 현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보고 싶다. 보고 얘기를 나누며 가비를 따라 웃으면 이 기분이 좀 나을듯한데.

무심코 돌린 시선 끝에 인형이 보이질 않았다. 가비가 준 건강인형이.

“여기 있던 인형은 어디 있느냐?”

현이 침상 맡과 그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인형을 어디에 두었냐고 물었다!”

현이 고함을 지르자 장곡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치웠습니다.”

“어째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부정한 것이 천자님의 침소에 있어 해를 끼칠까 하여….”

“출처를 알 수 없다니. 그것은 은갑이가 준 것이다. 이번 어의 시험에 단번에 붙은, 그 똑똑한 아이가 날 위해 준 것이야.”

허나 장곡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아무리 똑똑하다고는 하나, 그 근본은 천한 아이가 아닙니까. 태어의가 발탁한 아이 중 근본이 귀한 아이는 없습니다. 아무거나 보고, 아무 소리나 듣고, 가난 속에 배를 곪고 자란 아이들뿐이지요. 그런 아이가 어의가 되었다고 한들, 하늘처럼 높은 천자님께 좋은 기운을 줄 리가 있겠습니까.”

장곡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늘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었고 그래서 늘 옳았다. 헌데 오늘은 그 말조차 귀에 가시처럼 박혔다. 울화가 치밀었다.

“해서. 버렸느냐.”

“…….”

장곡이 대답 대신 더욱 고개를 숙였다.

현의 입술에서 기가 막힌,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똑똑-

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태어의 서문이옵니다.”

장곡이 문을 열어주었다.

서문이 탕약을 들고 안으로 들었다. 그러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장곡을 돌아봤다. 이내 말이 없는 장곡을 지나쳐 현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탕약이옵니다.”

서문이 성심껏 준비한 탕약을 현이 내리뜬 눈으로 바라봤다.

“효과는 있는 것이냐?”

평소 같으면 군말 없이 마시고 말 것을 딴지를 걸었다.

“이딴 게 내 병증에 효험이 있느냐, 이 말이야.”

서문이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유독 길어진 병증에 날카로워진 천자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현재로선 영약으로 알려진 불로초를 반려자로 맞는 것 외엔 방법이 없습니다. 허나 통증은 줄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불로초의 존재를 아는 이는 태황궁에서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서문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 천태비님께서 불로초를 찾기 위해 애를 쓰고 계시니 조금만, 조금만 더 견디시지요.”

서문의 차분한 응대에 현이 못 이긴 듯 탕약 그릇을 들었다. 그러면서 이번에 합격한 의학도들의 소식을 물었다.

“모두 학도당에서 명의당으로 거처를 옮겼느냐.”

“예. 사흘 전 모두 지원서를 작성하였고, 그에 대한 재가를 마쳤으며, 이틀간의 휴가일을 거친 후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갑니다.”

“그래? 허면 양궁 약방에 은갑이를 배치하라.”

“예…?”

서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의궁에 관한 사항은 일이든 사람이든 모두 태어의 서문의 소관이었다. 적절한 곳에 인재를 배치하는 것 또한 서문이 두루 살펴 결정할 일이었다.

하여 가비가 지원서에 음궁 약방을 썼을 때 적절한 곳이라 생각했다. 사람의 시선이 적게 닿는 곳일수록 가비에겐 좋을 테니.

헌데 그리 결정된 일을 바꾸라 하니, 서문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자님, 그것은 태어의 서문의 소관입니다.”

장곡이 먼저 나서서 만류했다.

“이미 재가된 일을 번복하는 것은 뒷말을 낳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탕약을 마시던 현이 멈칫했다.

지켜보던 서문이 말을 보탰다.

“시종장인 장곡의 말이 옳습니다. 이는 번복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또 이제 막 어의가 된 자를 양궁 약방에 배치할 수는 없습니다.”

양궁 약방에 기거하는 어의들은 모두 서문의 가르침을 몇 년씩 받은 이들이었다. 새내기 어의가 그곳에 합류된 적은 없었다.

“허면,”

현이 탕약 그릇을 내리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되는 것은 뭐가 있느냐?”

“천자…,”

“물건도 내 맘대로 못 둔다, 사람도 내 맘대로 못 둔다! 대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냔 말이다!”

쨍그랑-!

내던져진 탕약 그릇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것을 서문과 장곡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가슴을 씨근덕대는 현의 눈빛이 사나운 기세로 형형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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