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45화 (45/95)
  • [45화]

    쑥대밭이 되었던 어의 시험날은 일단락이 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복수였다. 사건을 일으킨 의학도의 어머니가 과거 죄인에게 수차례 겁탈을 당했고, 그 일로 인해 의학도의 어머니는 자결했다.

    어린 시절 겪었을 의학도의 아픔은 짐작이 되고도 남았지만 그렇다 해서 복수심을 불태우는 건 제 앞길을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에 대한 처결과 처벌이 이루어졌고, 그의 아우와 마을 사람들이 탄원을 올리고는 있으나 한번 결정된 판결이 쉽게 허물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미 그 사건으로 인해 죄인은 감옥소에서 십수 년째 복역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시끌벅적했던 분위기는 가라앉고, 시험 결과가 발표됐다.

    가비를 비롯한 겸복과 오정, 그리고 연화까지 합격하여 태황궁의 정식 어의가 되었다. 이제 그들 모두 태어의 서문의 제자로 의학당이 아닌 명의당에서 머물게 되었다.

    오늘 아침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짐을 막 옮긴 참이었다.

    “진짜 꿈만 같다. 그치, 겸복아!”

    오정이 활짝 웃는 얼굴로 겸복의 침상 위에 털썩 앉았다. 겸복이 책 꾸러미를 풀어헤치며 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방 짐 정리는 다 끝난 거야?”

    “짐 정리라고 할 게 있나? 그냥 이리저리 툭툭 던져두면 되지.”

    “모르는 소리 말아. 어의가 됐다고 끝이 아니다. 선학들께서 불시에 한 번씩 방을 살핀다고 하더라. 미리부터 조심하는 게 좋아. 벌점이 쌓이면 퇴출이니까.”

    “헉!”

    놀란 오정이 후다닥 일어나서 제 방으로 뛰어갔다. 잠시 풀어졌던 긴장감이 겸복의 한 마디로 다시 짱짱해졌다.

    말처럼 어의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해서 다가 아니었다. 앞으로 수년간의 배움이 더 필요했다. 인간의 몸은 그 체질이 각기 다르고 정해진 것 또한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의라는 집단 안에서도 엄연히 계급이라는 게 존재했다. 이제 막 어의가 된 자들은 후학(後學)으로 불리었고, 그 윗선들은 선학(先學)으로 불리었다.

    선학들은 후학들이 어긋나지 않게 솔선수범해야 했고, 후학들은 태어의 서문의 가르침 이전에 선학들에게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 했다.

    올해 어의 시험은 유독 합격률이 높았다. 의학도들끼리의 협업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겸복과 오정 역시 가비와의 지난 허물을 덮고 시험 전날까지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미운 감정 한 톨 없는 친우이자 동료일 뿐이었다.

    “뭐 도와줄 거 없어?”

    각자 방 정리를 끝낸 겸복과 오정이 가비의 방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없어. 나도 끝.”

    가비가 손을 털며 활짝 웃었다.

    “아까 보니까 연화네가 짐이 많던데. 서책도 엄청나고.”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알아서들 잘하겠지.”

    학도당이 그랬던 것처럼 명의당 역시 남녀가 유별하여 건물이 달랐다. 선학들의 특별한 허가 없이는 서로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그나저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말이야,”

    오정이 슬그머니 운을 떼며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이번 어의 임명식이 간이로 치러진 이유가 있대.”

    “뭔데?”

    그 말을 들은 가비와 겸복도 각각 책상과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다.

    듣자 하니 어의 임명식은 천자가 직접 나와 임명장을 전한다고 했다. 헌데 이번엔 그것이 태어의 서문의 손에서 간이로 치러졌다. 그에 대한 추측이 남모르게 난무했다.

    “천자님께서 어디가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야.”

    “뭐어?”

    겸복이 보기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겸복 뿐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그만큼 천자는 태황국을 덮은 하늘만큼이나 존귀하고 드높은 존재였으니까.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겸복이 단언했다.

    “그랬다면 천자님의 주치의신 서문님이 그리 태평하게 임명식을 치르시진 않았겠지. 아무리 간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런가?”

    “물론.”

    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자님의 존체에 이상이 있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경을 칠 일이야. 그분이 어디 우리와 같은 부류냐? 천족이시다. 선대 천자님과 천태비님의 적통, 순혈!”

    행여 부정 탈 소리 말라는 듯 겸복이 으름을 놓았다.

    그 기세에 오정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 나도. 그냥 들리는 소문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 헛소문을 입에 담는 자는 필히 액운이 붙을 거다.”

    “야, 악담은…!”

    “악담은 소문을 옮기는 자들이 하고 있는 거겠지.”

    겸복과 오정의 말을 듣고 있던 가비가 조용히 책상 위로 시선을 내렸다. 어의 임명장이 있었고, 그 아래 현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혹시 그때 봤던 그 병증이 다시 돋은 건가?

    지독한 피부병을 앓고 있는 듯 보였던 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면을 쓰고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올 수 없을 테니.

    생각해보면 병증조차 숨겨야 하는 천자의 삶도 평탄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흠조차 허락되지 않는, 길인의 상징으로 살아야 하는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 역시 천자로 태어난 숙명이자 운명이겠지만.

    하지만 그렇기에 어련히 알아서들 챙기겠냐 만은, 마음 한편이 염려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가비가 음궁으로 찾아오지 않은 지 수일이 지났다. 그게 물론 어의 시험과 그 발표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반소는 가비가 보고 싶었다.

    말을 섞고 눈을 맞추고 그 웃음을 나누고 싶었다. 가비가 웃는 걸 보면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곤 했다. 처음엔 그것이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 망아지 같은 녀석, 시험에 떡하니 붙었답니다!’

    며칠 전 곤이 전해준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틀 전 임명식이 있었고, 오늘 아침 명의당으로 숙소를 배정받았다고 들었다.

    허면 얼굴 정도는 볼 수 있겠지.

    태황궁 정찰을 핑계 삼아 의궁 쪽으로 가볼까 싶었다.

    피갑을 걸친 반소가 명경 앞에 섰다. 얼기설기 묶어 놓은 머리를 정돈하다 명경 속에 있는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야수의 눈빛을 한 건장한 사내가 머리를 매만지는 꼴이라니. 볼만했다.

    “정신 나갔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섰다. 불현듯 제 꼴이 우스웠다. 마치 정인을 만나러 가는 사내 같지 않은가.

    고개를 저으며 처소를 빠져나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곤과 풍, 그리고 귀물경비대가 반소의 뒤를 따랐다.

    음궁 정문을 나서며 반소가 손가락질로 갈 곳을 나누었다.

    “태황궁 동쪽부터 돌아라. 난 남쪽을 돌 테니.”

    “예? 같이 가시는 거 아닙니까?”

    곤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눈치가 빠른 풍이 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다녀오십시오. 저희도 한 바퀴 돌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반소님께선 저희와 따로…,”

    끝까지 물곤 늘어지려는 곤의 뒤통수를 풍이 꾹 잡아 눌렀다. 강제로 묵례한 곤이 풍에게 끌려갔다. 그 뒤를 귀물경비대가 따랐다.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소가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완연한 봄이었다. 어느새 봄.

    반소의 시선이 뜰 가득 피어난 꽃에 머물렀다. 확실히 겨울꽃보다는 봄꽃이 화사하고 예뻤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꽃잎부터가 촉촉하니 고왔다.

    꼭 녀석처럼.

    반소는 꽃을 보며 가비를 떠올리는 자신이 퍽 난감했다. 무모증이라던 녀석의 얼굴이 고운 건 인정한다. 허나 꽃을 보고 사내를 떠올리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긴. 가당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녀석의 별명이 꽃학도라 했으니.

    이제 꽃학도가 아니라 꽃어의라 불리겠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 년 중 반년을 경계에서 보내고, 머무는 처소도 얼음장 같은 음궁이니 봄이 와도 봄을 느낀 적도, 만끽한 적도 없었다. 헌데 오늘따라 모든 게 선명해 보였다. 눈에 들어와 박혔다.

    걸음이 가벼워서 그런가.

    주술력에 대한 후유증은 그날 하루가 끝이었다. 꼬박 앓고 눈을 뜨니 몸 상태가 지나치게 좋았다. 활력으로 그득 차 뜀박질을 하면 태황궁의 드높은 지붕도 발밑에 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허나 지나치기에 조심해야 했다. 반소는 한동안 제 행동거지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 넘치는 주술력을 아직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 터졌다간 만천하에 그것을 까발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 그 뒤는 감당할 수 없었다.

    감히 귀물의 씨를 받은 반인반귀가,

    하늘의 자손인 천자보다 강한 힘을 갖고 있다니.

    태황궁이 아니라 태황국 전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었다.

    봄꽃에서 시선을 거둔 반소가 의궁으로 들어서는 뒤뜰을 지나다 멈칫했다.

    며칠 내 보고 싶고 궁금했던 친우의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사람이 잘 지나지 않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서문?

    반소가 나서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그도 그럴 것이 서문의 행동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본 서문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는지 가비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반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뭡니까?”

    가비 역시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한껏 낮춰 물었다.

    서문이 크흠, 헛기침을 하더니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유용하게 쓰일 것이니 받아 두거라.”

    가비가 조용히 봇짐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영문 모를 것이 들어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던 가비가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문이 심상한 목소리로 용도를 말했다.

    “네가 가리개로 사용하는 무명천보다 좋은 것이다. 탄성도 좋아 갑갑하지 않을 테고 통풍도 잘 된다더구나.”

    태황궁에 남기로 결정했고, 여인이 아닌 사내로 지내는 걸 택했다. 그리고 그런 가비를 서문 역시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허니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개짐은…, 넉넉히 넣어두었으니 언제라도 필요하면 말하고. 당연히 필요한 것이니 낯부끄러워할 것 없다.”

    가리개란 가슴을 압박하는 천을 말하는 것이었고, 개짐이란 저쪽 세계로 따지면 생리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가비가 봇짐 안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세심하게 신경 써주는 서문이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옷차림이 얇아져서 걱정이 좀 됐거든요.”

    사실 개짐은 필요치 않았으나 그런 속사정까지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도울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얘기하거라.”

    “예.”

    어깨를 두드리려던 서문이 손을 거두며 급히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비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들킨 게 잘된 일인지 모르겠다. 괜히 서문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건 아닌지.

    “…헉!”

    돌아서던 가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반소가 서 있었다.

    “깜짝이야.”

    가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쩐 일이야? 혼자 온 거야?”

    간혹 귀물경비대가 태황궁을 정찰한다는 걸 알고 묻는 거였다. 하지만 반소는 그에 대한 답은 안 하고 서문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서문과 무슨 얘길 한 거야.”

    “어?”

    “방금 네게 뭔가를 주고 갔잖아.”

    반소가 눈짓으로 가비가 들고 있는 봇짐을 가리켰다.

    가비가 엉겁결에 잽싸게 봇짐을 어깨에 멨다.

    “뭐, 뭘 맡기신 거야.”

    “뭘?”

    반소가 팔짱을 낀 채 미심쩍은 눈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마치 속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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