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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39화 (39/95)
  • [39화]

    처소로 들어온 가비는 곧장 약방으로 향했다. 오늘이 음궁 약방에서의 마지막 실습 날이었다. 이제 남은 닷새 동안 각자 개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누군가는 끝까지 공부할 테고, 누군가는 최상의 몸 상태를 위해 휴식을 선택할 것이었다.

    가비는 아마도 그 둘을 적절히 섞을 것 같지만.

    약방에 들어서자 어쩐 일인지 약방 일지가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뭐지?

    다가간 가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어제 정리한 일지 아래 주치의의 확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짤막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은갑 군. 그동안 고생 많았네. 시험 잘 보게나. ]

    불현듯 제게 일을 떠맡기고 신이 나서 나가던 주치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나쁜 건 태황국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관습과 편견이지.

    하지만 그 또한 나쁘다는 말로 단순히 정의될 건 아니었다. 나라가 있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응당 그곳만의 관습과 편견이 있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일 테니까.

    그런데도 가비는 이곳 태황국의 관습과 편견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그건 아마도 반소 때문이었다. 가비가 알고 있는 그는 액운을 주는 불길한 존재도 아니었고,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으니까.

    “마지막 날이니까 신경 써야지.”

    가비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약초보관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다시 오려면 시험에 붙어야 했고, 일하고 싶은 곳으로 지원해야만 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떨어진다면…, 어의들에게 평가를 받아 의학도로 재수를 해야 했다.

    웬만하면 붙자. 아님 살던 곳으로 돌아가거나.

    그런 생각을 하다 멈칫했다. 가만 보니 순서가 바뀌었다.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일 순위고, 그 후 순위가 시험에 붙는 건데.

    “은가비, 정신 차려. 너 여기 사람 아니야.”

    혼잣말로 자책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금세 이곳에 익숙해져 저쪽 세계를 뒷전으로 밀어둔 건 아닌지, 괜히 마음이 소란스러워졌다.

    정리를 끝내고 마지막 일지까지 기록한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이 든 봇짐을 들고 옆방, 반소의 침소로 향했다.

    혹시라도 보는 눈이 있을 것을 의식하여 정중하게 ‘똑똑’ 문을 두드린 후, ‘반소님, 은갑입니다.’ 자신이 온 것을 알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꽃학도가 등장했군.”

    창가에 기대서 있던 반소가 뜻 모를 말로 가비를 반겼다.

    “꽃학도?”

    가비가 그게 뭔데? 하는 표정으로 탁자로 가 봇짐을 내려놓았다.

    몸을 바로 한 반소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널 그리 부르던데.”

    “누가?”

    “태황궁의 여인들이.”

    “어?”

    가비가 정색하며 책을 펼쳤다. 왜 그런 별명이 생긴 건지,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없으나 이미 ‘꽃’ 자가 붙은 것만으로도 등골이 싸했다.

    “곱상한 외모에 똑똑하고 다정하기까지. 여인들이 네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야.”

    반소가 가비의 맞은 편, 탁자 위에 걸터앉았다.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눈빛이 심히 불편하여 가비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뭐, 어딜 가든 잘생기고 똑똑하고 다정한 성격은 인기가 많은 법이니까.”

    “네가 잘생겼던가?”

    반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가비의 얼굴을 낱낱이 뜯어보듯이 촘촘하고 세심한 눈길이었다.

    “따지고 보면 넌 예쁘게 생긴 거지. 잘생긴 것이 아니라.”

    “…….”

    순간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이 두근거림이 여자인 게 들킬까 봐 그런 건지, 예쁘다는 말 때문인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후자 쪽이면 더 이상하지 않나? 그런 말을 했다고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었다고 내가 왜?

    머릿속을 채운 물음표를 치우며 애써 담담한 얼굴로 교본을 내려다봤다.

    “예쁜 거나 잘생긴 거나. 내가 사는 저쪽 세계에서는 다 똑같이 취급해. 구분하지 않는다고.”

    “그래? 허면 네가 사는 그쪽 세계 사내들은 너처럼 다 매끈한가?”

    “매…, 뭐?”

    가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반소의 깊은 회색 눈이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네 놈 얼굴엔 솜털만 그득하니 묻는 말이다. 수염 한 자락 날 것 같지 않아서.”

    가비가 당황스러움에 입술을 벙긋댔다.

    “무…,”

    “무?”

    “…무모증이야.”

    반소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기도 있던데…? 무모증인 사람.”

    교본에도 짤막하게 적힌 걸 본 적이 있었다.

    “저쪽 세계에도 있어. 무모증. 내가 그거라고.”

    반소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설마. 말은 들어봤지만, 무모증이 있는 사내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녀석의 얼굴이 이리도 고왔군.

    그저 영양분이 부족해서 성장이 더딘 줄로만 알았더니.

    이유가 확실한 거였다.

    “허나 그렇다 해도 충분히 사내다울 수 있으니 너무 괘념치 마라.”

    반소가 무심한 표정으로 위로하듯, 가비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하아- 이제는 하다 하다 무모증 걸린 남자라니.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 얼굴로 가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작금의 상황이 몹시도, 상당히, 개탄스러웠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참, 그때 그 귀물은 어떻게 됐어? 잡았어?”

    반소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 정도의 귀물을 잡았다면 태황궁이 떠들썩했을 테고, 시험을 앞둔 의궁조차도 시끌벅적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 후 다시 흔적을 감춰버렸다.”

    분명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 한동안 또 잠잠하지 않을까?”

    가비가 붓대의 끄트머리를 입에 대며 물었다.

    “그때 그러지 않았어? 내가 태황궁에 들어오기 전에도 사건이 있었다가 잠잠해졌다고.”

    반소가 물끄러미 가비를 바라봤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걸 증명하듯 가비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렇다는 건 뭔가 일정이 주기적이지 않을까 싶어서.”

    “같은 생각이야.”

    반소가 수긍했다.

    “보통 귀물들이 사람을 습격하는 건 초가을부터 초봄까지고 지금은 그 시기가 거의 지났지. 헌데도 이리 활보하고 사람의 살가죽만 벗겨 간다?”

    “그게 꼭 필요한 이유가 있겠네.”

    “그렇지.”

    “그래도 살가죽을 벗겨간다니 정말 끔찍해. 당한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어. 꼭 잡았으면 좋겠다. 그 귀물.”

    가비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그러다 답이 없는 반소를 쳐다봤다. 반소는 여전히 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한시도 눈을 뗀 적이 없는 것처럼.

    가비가 몸을 살짝 물리며 뺨을 매만졌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때처럼 먹물이라도 묻혀온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을 이렇게 뚫어지게 볼 일이…….

    “너 말이야.”

    반소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가비가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비를 바라보는 반소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네 말대로라면 네가 살았던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는 분명 다른 곳일 텐데, 어떻게 이곳 약초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었던 거지? 수면초를 먹이고 달아난 것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그 부분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서문의 눈에 띄었다는 건 네가 약초에 대해 보통 해박하단 소리가 아니거든. 손쉽게 의학도가 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 서문이 누군가를 발탁할 땐 그만의 기준이 뚜렷하다. 단순히 네가 가난하고 착해 보여서가 아니야.”

    이제 반소의 질문은 가비의 정체를 파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호기심과 궁금함으로 무장된, 가비를 향한 순수한 관심 그 자체였다.

    “음, 그게….”

    가비가 설명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게 의문이야. 저쪽 세계에 우리 선조가 남긴 약초도감이 있거든.”

    “약초도감?”

    “응. 거기에 이쪽 세계에 대한 약초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어. 실물에 가까운 그림과 함께. 난 어릴 때부터 그걸 보고 자랐고. 달달 외울 정도로 봤으니까 서문님 눈엔 내가 해박해 보였을 거야.”

    “허면 그런 약초도감이 어째서 그쪽 세계에 있는 거지?”

    “할아버지 말씀으론 선조께서 전생을 기억하고 기록해 놓은 책이랬어. 우리 집 가보라고도 했고. 또 이 세상에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 말고도 다른 세계가 있다고 말씀하셨고.”

    할아버지는 이미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혹시나 하는 거지. 이쪽 세계에도 저쪽 세계랑 연관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가비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역으로 보면, 이쪽 세계에 누군가가 저쪽 세계의 전생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아!”

    말을 하던 가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환한 얼굴로 외쳤다.

    “맞다! 너 천족이잖아!”

    “그런데?”

    “천족의 서고, 갈 수 있지?”

    반소가 미간을 모은 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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