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푸하!”
물에 빠진 가비의 옷깃을 반소가 단숨에 잡아 올렸다.
“욱, 쿨럭쿨럭!”
가비가 기침을 토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는 꼬옥, 옷의 매듭을 움켜잡았다. 마치 풀리거나 뜯길 것을 대비하는 손짓이었다.
가비를 바라보는 반소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연유가 궁금했다.
“누가 널 잡아먹는다더냐.”
상황이 꼭 그러했다.
“아니면 왜 그리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야. 꼭 불한당에게 쫓기는 여인처럼.”
‘여인’이란 말에 가비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자신은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이었고, 이 욕통은 그 생쥐를 가둔 우리 같았다.
가비가 젖은 눈가를 쓸며 눈앞에 있는 반소를 바라봤다. 다행히 몸을 낮추고 있어 욕통에 하반신이 가려진 상태였다.
“그런 거 아냐.”
가비가 반소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도무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네 말처럼 사내끼리 무슨 내외야!”
“그럼.”
반소는 집요했다. 납득시키지 못하면 오늘 중으로 욕통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생각지 못하게 꽤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가비는 머릿속으로 그럴싸한 핑계를 찾고 있었고, 반소는 그런 가비의 답을 진득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거짓말하기 싫단 말이야….
가비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온 건지, 왜 온 건지, 돌아갈 방법조차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 최대한 조용히 지내고자 했다. 그런데 상황은 자꾸만 가비가 바라는 것과 반대로 흘렀다.
학우들과 친해질수록, 반소와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자신의 성별을 속이며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양심의 가책으로 느껴졌다.
결국, 그런 가책을 억지로 누르며 또 한 번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에 흉이 있어.”
“흉?”
“보이기 싫어서 그래.”
가비가 출렁이는 물로 시선을 떨궜다. 더는 반소의 눈을 보며 거짓말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반소는 가비의 반응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크고 아픈 흉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있다. 그런 흉이.”
“뭐?”
가비가 슬쩍 눈을 들어 반소를 바라봤다.
“여기. 날 때부터 달고 있던 흉이지.”
반소의 손길을 따라간 곳엔 커다란 십자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정확하게 왼쪽 가슴,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고?”
가비가 가슴팍의 흉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동안은 반소의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또는 방안이 어둑해서 보지 못한 흉터였다.
그런데 난 왜…, 이 흉터가 낯설지 않은 거지?
무언가에 홀린 듯, 가비가 손을 뻗어 흉터를 건드렸다.
반소가 숨을 멈췄다.
흉터를 바라보는 가비의 시선에 손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마치……,
탁!
반소가 반사적으로 가비의 손을 쳐냈다.
가비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손을 거뒀다.
“아, 미안.”
“그만 나가봐.”
반소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나가도 된다.”
“어? …어.”
가비가 쭈뼛거리며 욕통 밖으로 나왔다. 대충 물기를 털어내며 뒤를 돌아보자,
“…….”
반소는 여전히 까치발로 쭈그려 앉은 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
뭐지? 갑자기 또 왜 저래…?
분위기가 마치 그때 같았다.
반소가 제 정강이를 찼던 날.
설마 또 아니겠지 하면서도 마음이 심란해져 입술을 달싹였다.
“저기……,”
반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란 가비가 부리나케 목간 밖으로 튀어 나갔다.
쿵!
등 뒤로 문을 닫으며 참았던 숨을 토했다.
“후우-”
정말 간발의 차였다. 하마터면 앞모습까지 볼뻔했다.
아무튼 사람 놀라게 하는 데는 뭐 있다니까.
가슴을 쓸어내린 가비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살피며 약방으로 향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어찌 된 일이지 쿵쾅대는 심장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어의 시험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가비가 빤히 제 서안 위를 바라봤다.
“이게 뭐야?”
서안 위에는 겸복과 오정에게 며칠 전 빌려줬던 요약정리본과 흰색 봉투가 놓여 있었다.
“별건 아니고….”
오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요약정리본 잘 봤다고. 이건 그 답례.”
가비가 봉투를 열어봤다.
그 속엔 알록달록한 알사탕과 옥춘당이 들어 있었다.
가비가 동그래진 눈으로 오정과 겸복을 바라보자, 겸복이 조심스레 말했다.
“동생들이 있다고 들었다. 면회실 옆에 우편이나 전보를 붙일 수 있는 우전실이 있으니 동생들에게 보내줘.”
가비가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 말이 없자, 오정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양이 너무 적나? 적지?”
그리고는 겸복의 옆구리를 찌르며 난감하게 웃었다.
“거봐. 이거로는 턱도 없다니까.”
겸복 역시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산 것이 저것밖에 되지 않으니.
그걸 알기에 가비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고마워. 너무 뜻밖이라.”
“이걸로 되겠냐 만은, 그간 있었던 일은 잊어주라.”
오정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같이 시험 잘 봐서 꼭 어의가 되자. 응? 은갑아.”
“…그래.”
가비가 웃는 얼굴로 봉투를 고이 봉했다.
“동생들이…, 좋아할 거야.”
“그치? 애들은 다 이런 거 좋아한다니까? 우리 순정이도 엄청 좋아하는데.”
식모살이한다는 여동생이 생각났는지 오정이 코끝을 찡긋댔다.
그들을 바라보는 가비의 마음 한편도 찡해졌다.
그 길로 겸복과 오정에 대한 묵은 감정을 털며 학도당을 나섰다.
음궁으로 향하는 길. 면회실 옆에 있다는 우전실을 바라봤다.
이걸 줄…, 동생도 부모님도 없는데.
손에 쥔 흰 봉투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음에 얹어진 죄책감도 무게를 더할 것을 알았다.
이걸 줄 동생도 부모님도 안 계시지만, 귀한 마음 고맙게 받을게.
가비가 어깻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 * *
“어이, 망아지!”
음궁으로 들어서자마자 저만치 서 있던 곤이 알은 척을 해왔다. 썩 반가운 인사는 아니었지만.
“망아지요?”
가비가 걸음을 멈추고 곤을 돌아봤다.
“제가 왜 망아집니까?”
“고삐 풀린 것마냥 이래저래 나대고 다니니까 망아지지.”
“허.”
가비가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좌대장님은 이제 막 산에서 내려오신 것 같네요.”
“뭔 소리야?”
“곰 닮았고요, 곰.”
“뭐야!”
버럭하는 곤을 두고 가비가 팩 돌아섰다.
“얌마! 야!”
씩씩거리는 곤의 어깨에, 풍이 손을 얹었다.
“그만해라. 저놈은 네 구닥다리 놀림에는 절대 당할 놈이 아니니까.”
“이런, 니미럴!”
곤이 풍의 손을 거칠게 털어냈다.
“어린놈의 자식이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그러니까 이리 음궁에 드나들지.”
풍이 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덕분에 속정이 깊다는, 생전 듣지도 못한 소리를 반소님께서 듣고 계시잖아. 안 그래?”
태황국에 흩어져 있는 반인반귀를 끌어다 모은 것은 반소였다. 그 수는 현저히 적었지만 분명 존재했고, 수컷이 더 많은 귀물의 특성 때문인지 모두 사내였다.
반소 나이 열다섯을 넘긴 해에 천자와 천태비에게 이를 허락받아 그들을 태황궁으로 불러들였고, 무예를 연습하여 지금의 귀물경비대를 만들었다.
태황궁에서는 귀물 때문에 낭비되는 주경대와 야경대의 군력을 아낄 수 있어 좋았고, 또 그들을 곁에 두고 감시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명분까지 챙길 수 있었다.
“반소님은 우리의 수장이시기 전에 은인이시다.”
그것이 나이를 불문하고 그들이 반소를 따르는 가장 큰 이유였다.
“반소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구석진 마을에 숨어 살면서 죽을 때까지 천대를 받았겠지.”
풍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의 삶을 구제해주신 분이다. 그게 사람이든, 반인반귀든. 허니 그분에게 저런 녀석 하나쯤 있어도 되잖아. 겁대가리를 상실해서 반소님을 편히 대해줄 그런 사람.”
곤은 어느새 입을 꾹 다물고 풍의 말을 듣기만 했다. 가끔 풍은 너무 옳은 말만 해서 대꾸할 말조차 없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