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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35화 (35/95)
  • [35화]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반소와 가비의 눈동자가 미세한 떨림을 동반했다.

    가비가 서둘러 손을 빼내려 했지만 반소는 놓지 않았다. 다만 가깝던 거리가 반걸음쯤 멀어졌을 뿐이었다.

    “놔주십시오.”

    가비가 잡힌 손목을 비틀며 말했다.

    반소의 손아귀에 힘이 더욱 실렸다.

    손끝이 아리다 못해 뜨거웠다.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극렬하게 뛰어서.

    그건 비단 가비와의 접촉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시선 때문이었다.

    가비의 갈색 눈에 자신이 담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반소는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인지를 알았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뛰게 한다는 것도.

    “누구도, 날 그렇게 보지 않아.”

    반소가 읊조렸다.

    “누구도 너처럼 날, 그렇게 눈동자에 담아두지 않는다.”

    헌데 넌 왜 그렇게 당당한 것인데.

    뻔뻔할 정도로 날, 그저 그런 사람으로 취급해 주는 건데.

    “바라보는 것도 불손하다 하면 그 또한 조심하겠습니다.”

    가비가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야왕님 한 분 안 보자고 장님 노릇을 하며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방금은 실수니까 한 번쯤 눈감아 주시고요.”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가비가 세차게 잡힌 손목을 빼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소의 손이 가비의 뺨을 건드렸다. 살짝 부은 뺨을 엄지가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내려갔던 가비의 시선이 다시 반소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심장으로 찌릿한 전율이 올랐다.

    “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그게 맞거든.”

    다들 반소를 그렇게 대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혐오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두려움과 공포가 그것조차 짓눌러 없애버린다고 믿었다.

    “이제는 내가 무서우냐?”

    내가 불길한 존재라고 믿어?

    내게 닿으면 액운이 붙는다고.

    “혐오스러워?”

    신성한 천족의 피를 더럽힌 반인반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런 존재로 보여?

    “해서 싫어졌느냐?”

    네 놈에게 향하는 이 알 수 없는 끌림이 사람에게 처음 가져보는 첫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여 이렇게 널 내치고도, 네가 날 미워하고 싫어할까 봐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걸 느껴.

    반소의 말을 듣고 있던 가비가 고개를 떨구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고개를 다시 든 가비의 얼굴엔 옅은 비웃음이 남아 있었다.

    “무서우면 어떻고 혐오스러우면 어떻습니까. 해서 싫어졌으면요. 바라는 바가 그거 아니었습니까? 다른 이들처럼 순종적으로 구는 것. 말씀하신 것처럼 의학도 주제에 함부로 기어오르지 않는 것. 그것에 그리도 확답이 받고 싶으십니까?”

    말을 할수록 가비의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헌데 그건 굳이 답을 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이미 수십 번 침소와 약방을 오가며 향을 태웠으니까요. 원하시는 대로 수면초 한뿌리를 넣어드렸으니까요. 밤새 이렇게 하라시면 할 거니까요!”

    반소의 손을 탁, 치워내며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은 유리 조각을 모으려는데 반소의 손이 다시금 가비를 일으켜 세웠다. 가비가 반항했다.

    “왜 이러십니까!”

    “손가락이 베었잖아.”

    “알 바 없잖아요!”

    “뺨도 부었고.”

    “무슨 상관인데요!”

    실랑이 끝에 결국, 양쪽 팔뚝을 반소의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리고 말았다.

    가비가 거친 숨을 토하며 반소를 올려다봤다. 돌연 눈물이 나려 했다. 눈물이 이리 헤프지 않은데, 어제부터 반소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뭘, 어쩌라고…!”

    저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 나갔다. 자신을 헷갈리게 하는 반소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리고 서러웠다.

    “손가락이 베고 뺨이 부은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보다 더 아픈 건 어제 네가 걷어찬 내 정강이야!”

    그제야 알았다.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종일 기분이 별로였는지.

    정강이에 든 멍보다, 마음에 든 멍이 더 시퍼렇다는 걸.

    “네가 찬 건 내 정강이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가비가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네가 날 도와주고 믿어줘서…,”

    그게 고마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을 만난 것만 같았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세계에서.

    “내 정체가 진짜 의심스러웠다면, 그랬으면 애초에 날 경비대에 넘겼겠지. 근데 그냥 놔뒀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넌 날…,”

    갑자기 목이 메어 말문이 막혔다.

    “나는 너랑 친구 정도는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했는데…….

    울음을 삼키자 어깨가 잘게 반동하며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래. 맞다.”

    반소의 손이 가비의 눈물을 쓸었다.

    “네 말이 다 맞아.”

    눈물에 젖은 속눈썹과 작은 콧구멍 아래로 빼꼼 보이는 콧물조차 더러워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이 녀석이 정말로 좋은 모양이었다.

    살면서 사람 간 정을 나눈다는 게 무언지 배워본 적이 없었다.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귀물경비대를 중히 생각하긴 하지만 이는 엄연한 상하 관계였고 끈끈한 동료애로 점철된 관계였다.

    허나 가비에게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그건 반소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정(情)이었으며, 교감이었고, 마음이었다.

    실은 그것이 너무도 달콤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너무 낯설어서 거부감이 들었지만 결국, 이 감정들을 놓을 수 없다는 것도.

    모르면 모른 채로 평생을 살았겠지만, 이미 알게 된 것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마치 덫에 걸린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가비가 제게 주는 인간적인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지금, 이 순간, 여실히 깨달았다.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를 편견 없이 대해주는,

    “내 사람, 내 정인.”

    그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혼자인 삶이 숙명일 거로 생각했고 그 사실이 아무렇지 않았다. 헌데 지금은 단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동등한 관계로 자신을 허물없이 바라봐 줄 사람이.

    그리고 그 사람이 가비이길 바랐다.

    “나와 친우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

    반소가 물었다.

    “그 눈에 계속 나를 담아줄 수 있겠어?”

    가비가 젖은 눈을 들어 반소를 응시했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울음이 속으로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면서도 믿지 못했다.

    “지금 나한테…,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반소의 말투는 들판을 지나는 가을바람처럼 심상했지만, 분명 그런 진심이 있었다.

    반소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부탁. 부탁이라….

    그 또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어느새 눈물이 개어 맑아진 가비의 눈동자를 보며 반소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부탁이란 걸 하면, 우린 친우가 될 수 있는 건가.”

    교차한 시선에서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반소가 담고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그건 조금도 정제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에 가까웠다.

    그가 겪어보지 않은 것이었고 그로 인한 혼란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걸 인정하고만, 체념 같은 것들도 담겨 있었다.

    그런 감정들은 거칠지만 순수했다. 감정에도 형체가 있다면 티클 만큼의 불순물도 없는 원재료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가비는 그가 자신을 밀어내고 거부하려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부탁하지 않아도 될 수 있어. 지금처럼 날 대해준다면.”

    사람 간 나눌 수 있는 정이 무언지, 그에 대한 감정들이 어떻게 쌓이고 표출되는지 모르는 사내이기에, 오히려 드러나는 행동들이 더 진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비가 물기 어린 눈가를 훔치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해.”

    “악수?”

    “어제 우리 싸웠으니까.”

    반소가 미간을 좁혔다. 싸웠다는 가비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그런 반소의 생각을 읽은 듯 가비가 말했다.

    “물론 싸웠다기보다 네 쪽에서 일방적이긴 했지. 무턱대고 내 정강이부터 깠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속상하고 서운했던 마음은 친구가 되어달라는 그의 말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건 화해의 악수야.”

    “…….”

    “원래 친구끼리는 다투기도 하고 화해도 하니까.”

    반소가 눈을 내려 제게 내밀어진 작은 손을 바라봤다. 이 손에 닿을 때마다, 아니 가비에게 닿을 때마다 느꼈던 알 수 없는 전율이 꼭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생경하고 낯설어서 당황스러웠을 뿐.

    이 손을 잡으면 너하고 난…….

    반소가 손을 잡았다. 지금 잡지 않으면 이 손을 영영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맞잡은 손에 은근한 힘이 실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제 마음에 대해 이토록 상냥한 답례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단단한 빙벽이 가비로 인해 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빙벽을 벗어나 처음 본 건, 제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 가비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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