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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34화 (34/95)
  • [34화]

    “야, 네 놈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음궁에 온 가비를 보고 곤이 쌤통이라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누가 보면 계집이 분칠을 잘못한 줄 알겠다!”

    딱 봐도 맞아서 붉어진 얼굴인데 그걸 보고 웃다니. 아무튼 이 인간도 심보가 막돼먹었다. 딱 그 대장에 그 부하였다.

    “분칠 잘못한 여인도 좌대장님 같은 남자는 싫어할걸요?”

    “뭐야? 이 건방진…!”

    “눈길이라도 받고 싶으면 일단 그 말투부터 고쳐요. 계집이 뭡니까, 계집이.”

    가비가 쌩, 찬바람을 일으키며 반소의 거처로 들어갔다.

    곤이 뒤에서 방방 뛰었다.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자식이…!”

    지켜보고 있던 풍이 곤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게 왜 약은 올려서.”

    보아하니 어디선가 단단히 혼쭐이 나거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좀 놀려먹겠다고 깐죽대다 오히려 놀림을 받은 꼴이었다.

    혼자 씩씩대던 곤이 돌연 진지한 얼굴로 풍을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저놈 말이 맞을까?”

    “뭐가?”

    “눈길이라도 받고 싶으면 말투부터 고치라는 말.”

    실로 기생집에 가면 기녀들에게 제일 인기가 없는 게 바로 곤이었다. 가비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는 곤을 보며, 풍이 혼잣말을 중얼댔다.

    “꼭 그게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단순히 말투의 문제가 아니었다. 접근성이 어려운 불곰 같은 외모가 제일 큰 문제라는 걸, 헌데 그걸 본인만 모른다는 게 안타까워 풍은 고개를 저었다.

    처소로 들어온 가비의 걸음이 느려졌다. 저도 모르게 반소의 침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끝에 힘을 주며 지나쳤다. 평소처럼 하자고 다짐했는데 생각처럼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걸음걸이와 그에 따른 발소리, 그리고 약방의 문을 열고 닫는 것까지 지나치게 어색했다. 침소에 있을 반소를 의식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건 가비만 그런 게 아니었다.

    침소에 있는 반소 역시 가비가 왔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느린 발걸음과 약방으로 들어가는 것에 주저함이 있었다는 게 느껴졌다.

    오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모질게 대했으면,

    선을 그었으면,

    오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차마 그 말까진 하지 않았다.

    되레 오늘도 일찍 오진 않겠지, 하며 문밖 너머로 들리는 인기척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수도 정찰을 돌고 침소에 들어앉은 순간부터 내내 그랬다.

    원래 이리 줏대가 없었나.

    갈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제 마음이 덧없고 우스울 지경이었다. 허면 안 보면 그만인 것을 이왕 왔으니 그 낯짝이 어떠한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어제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로 나갔으니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한 거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도, 이리 신경 쓸 거라면 그리 걷어차지도 않았지 하며 애써 외면하길 반복했다.

    아니면 그저 끝까지 불손하게 굴던 그 태도가 과연 바뀌었을까, 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그래. 그런 건지도 모른다. 확인해 보고 싶은 건지도.

    침상에 걸터앉은 반소가 머리맡의 줄을 잡아당겼다.

    딸랑딸랑딸랑-

    요란한 종소리가 약방을 울렸다. 책상에 앉아서 일지를 살피고 있던 가비가 눈을 들어 흔들리는 종을 바라봤다. 내내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묵직했던 가슴이 시큰, 내려앉는 것 같았다.

    구겨진 상의 끝자락을 탁, 잡아당기며 내려앉았던 심정 또한 끌어올렸다. 그리고 표정 없는 얼굴로 반소의 침소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나직하게 묻자,

    “들라.”

    평소와 다르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금 이른 저녁 시간이었기에 방안은 다른 때보다 밝았다. 약간의 어스름만이 깔린 상태였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물었다. 해서 바닥만 보일 뿐 반소가 어디 있는지, 그의 얼굴이 어떠한지는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지도 않았고.

    잠시 말이 없던 반소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향을 태워라.”

    “예.”

    가비가 명을 듣고 나갔다. 그리고 차분히 마른 꽃잎과 호롱 등을 준비해 다시 침소로 향했다.

    탁자 위에 가져온 것들을 내려놓고 마른 꽃잎을 갈아 호롱에 얹었다. 기름을 넣고 불을 붙이자 이내 향이 은은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짧은 묵례 후 나가려는 가비를 반소가 불러세웠다.

    “냄새가 역겹다. 다른 걸 태워.”

    “…….”

    즉각 대답하지 않던 가비가 ‘예’ 하며 나갔다.

    약방으로 돌아온 가비가 다른 꽃잎을 챙겨 침소로 향했다. 호롱의 불을 끄고 타고 있는 꽃잎을 제거해 깨끗이 한 다음 가져온 것을 새로 갈아 태웠다.

    “두통이 온다. 다른 거.”

    그제야 가비는 반소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알았다. 제 말을 따르는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건 곧 전처럼 불손한 태도를 보일 시 경고한 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일 테고.

    가비 역시 더는 반소를 전과 같이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 선을 그은 건 반소였고 그에 서운한 감정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이곳이 태황국이란 이세계임을, 그리고 반소가 범접할 수 없는 야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취향이 아니다. 다른 거.”

    가비가 태우던 것을 다시 치우고 새것을 가져왔다.

    “별로야. 다른 거.”

    그 후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반소는 잠잘 생각은 아예 없는 것처럼 침상에 걸터앉아 삐딱한 시선으로 명령했다.

    다른 거. 다른 거. 다른 거.

    처음엔 이유라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턴 이유조차 없었다. 그저 가비를 물 먹이기 위한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반소는 멈추지 않았다.

    그럼 어떤 향이 좋은지, 취향이 무언지, 정말 향 때문에 두통이 오는 것인지, 가비가 아무것도, 그 어떤 말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예’라는 대답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다였다. 벌써 수십 번째 향을 바꿔 태우길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방안을 채운 향기는 꽃향이 아니라 잡향이 돼버렸다.

    어지럽게 뒤섞인 향처럼, 가비를 지켜보는 반소의 마음도 시간이 지날수록 난잡해져만 갔다.

    난 네게 무얼 바라는 걸까.

    끝난 줄 알았던 의문이 다시금 가슴을 파고들었다. 던져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수리검이 되어 돌아왔다.

    끊어버리고자 했는데 막지 않고,

    안 보면 그만인 것을 이리 보고 있고,

    불손하지 말라 해놓고 불손하길 바라는,

    내 마음을 나도 알 수 없다.

    어느새 좁아진 미간으로 가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내 제게 눈 한번 맞추지 않는 얼굴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예를 갖추라 한 것도 자신이고,

    불경한 태도를 보이지 말라고 경고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다른 거.”

    나직한 명령이 떨어졌다. 똑같은 그림을 옮겨서 붙여놓은 것처럼, 똑같은 명령에 똑같이 행동했다. 태우던 향을 치우고 새로운 향을 가지러 가기 위해 호롱을 정리했다.

    밤새 이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왔다 갔다 하기 귀찮으니 약초방에 있는 꽃잎을 죄다 가져와서 태워도 되겠지만, 필시 반소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닐 것이다.

    오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 모습이 보고 싶어 이러는 것일 테니.

    묵례를 하고 나가려는 가비에게 반소가 말했다.

    “향은 됐고, 수면초를 가져오라.”

    가비가 명을 따라 자리를 깨끗이 비우고 약방에서 수면초를 가져왔다. 작은 잎사귀 하나를 넣어 갈자 반소가 말했다.

    “더.”

    가비가 잎사귀 하나를 더 따서 절구에 넣었다.

    “더.”

    한 잎 더 따서 넣었다.

    “뿌리째 넣어라.”

    “…….”

    가비가 멈칫한 것과 동시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수면초를 타기 위해 가져온 뜨거운 찻물의 온도가 적당해졌다.

    입술 안쪽을 짓씹던 가비가 결심한 듯 수면초 한뿌리를 통째로 절구에 넣었다.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성이 생기든 말든. 부작용을 일으키든 말든.

    그가 말한 대로 자신은 그저 한낱 의학도에 불과했다.

    주치의에게 들은 말로는 간혹 이렇게 양을 넉넉히 한다고도 했다. 이는 서문도 허락한 일이라고. 다만 습관이 되지 않게만 조심하라 일렀다. 허니 그동안 자신이 내성이며 부작용을 운운한 것 역시 주제넘은 참견일 뿐이다.

    가비의 손이 일정한 속도로 수면초 한뿌리를 갈아 고운 가루를 내었다. 그리고 따뜻한 찻물에 그것을 부어 녹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반소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비가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을 반소가 손날로 쳐서 날려버렸다.

    퍽-

    쨍그랑!

    찻잔이 날아가 깨졌지만 가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말했다.

    “치우고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순간 반소의 눈가가 움찔했다. 가까이에서 본 가비의 한쪽 뺨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너, 얼굴이 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는데 가비가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 찻잔이 깨진 곳으로 가서 쭈그려 앉았다. 반소의 눈이 가비를 쫓았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눈빛이었다.

    “얼굴, 누가 그랬어.”

    가비는 대답 대신 깨어진 찻잔 조각을 모았다.

    “누가 그랬냐고 묻잖아.”

    반소가 성큼성큼 걸어 가비 앞으로 다가갔다.

    “…아!”

    그때 가비가 움찔하며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유리 조각에 밴 검지 끝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반소가 그런 가비의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와락- 거칠게 당겨져 반소의 품에 안기듯이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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