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다른 때보다 유독 심기 불편하고 고루하게 느껴진 회의였다. 집무실을 나선 반소가 음궁 쪽으로 걸음을 틀 때였다. 어디선가 매캐한 연초 향과 함께 나지막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사람 꼬나보는 눈깔하고는.”
퉤-
신경질적으로 연초를 뻐끔거리던 사내 한 명이 입안에 고인 침을 바닥으로 뱉었다.
“진정하시죠.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사내 옆에 선 다른 사내도 잔뜩 찌푸린 미간으로 연초를 빨았다. 방금까지 얼굴을 맞대고 있던 경비대장들이었다. 야경대의 경비대장이 희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중얼댔다.
“지 까짓 게 감히 천태비님과 천자님의 자비 없이 태황궁에 발붙이고 살 수나 있을 것 같아?”
“그야 그렇죠.”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줬으면 입 닥치고 경계에서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그래도 일 년에 절반은 못 보는 게 어딥니까.”
“난 귀물경비대가 태황궁을 제집처럼 누비는 꼴만 봐도 구역질이 올라와. 인두겁만 썼다고 사람인가? 반인반귀 주제에.”
“어디 똥이 무서워서 피합니까, 더러워서 피하지.”
주경대의 좌대장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돌릴 때였다. 기둥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억!”
크게 놀라는 주경대의 좌대장을 보고, 야경대의 경비대장도 뒤를 돌아보다 ‘헉!’ 했다.
“바, 반소님!”
돌아본 자리에 반소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주, 죽여주십시오!”
저승사자라도 본 듯 두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는 명백한 불경죄였다. 빼도 박도 못할 상황. 빌 수밖에 없었다.
“저, 저희는 그저 반소님께서 저희들의 노고를 너무 몰라주시는 듯하여….”
“해서 불만이다? 감히 반인반귀가 그대들의 노고를 몰라주어.”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오라….”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상한 얼굴로 다가와 그 앞에 우뚝 선 반소에게서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무감한 눈길이 뚝, 그들의 정수리로 꽂혔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그래. 죽을죄를 지었지.”
반소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천족을 욕보였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그 씨가 무엇이든 간에, 천녀 천태비의 태를 빌어 난 자였다. 나고서도 내치지 않고 태황궁의 귀물경비대장으로 앉힌 자.
그 영향력이 감히 천자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결코 하대해서는 안 되는 게 바로 야왕 반소였다.
태황궁의 오점. 밤과 달을 상징하는 어둠의 자식.
온갖 불길한 수식어는 모두 달고 있었지만, 그 말을 면전에서 대놓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흥분해서 입을 함부로 놀린 게 화근이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반소님!”
이제는 ‘죽여주십시오’에서 ‘살려주십시오’로 말이 바뀌었다.
반소가 픽, 입꼬리를 올렸다. 허나 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각기 다른 감정이 수려한 얼굴 위로 섬뜩하게 그려졌다.
“그대들이 이리 비는데, 내가 자비를 베풀어야겠지.”
반소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천태비님과 천자님의 자비로 나도 살고 있으니. 안 그런가?”
겁에 질린 경비대장들이 그의 발치로 납작 엎드렸다.
반소의 눈이 차갑게 그들을 응시했다.
“고개를 들라.”
그리 명하자 경비대장들이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그 낯짝이 아주 볼만했다. 방금까지 거만한 태도로 자신을 씹어댈 땐 언제고 지금은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반소가 무릎을 굽혀 그들과 눈을 맞췄다. 지척에서 마주한 회색 눈은 늪지대를 연상케 하는 수렁이었다.
“어쨌든 입이 방정이다. 그렇지?”
반소의 물음에 야경대의 경비대장이 ‘예! 예!’하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혀를 뽑는 것은 너무한 처사이니 이 정도로 봐주마.”
싱긋.
감정 없는 미소에 경비대장들의 얼굴이 아연실색, 공포로 질렸다.
* * *
“어째 한동안 잠잠하다 했어.”
오후 수업이 끝나고 선생이 나가자, 학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럼 지금 경비대장님들은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가 묻자, 또 누군가가 답했다.
“다들 똥독이 올랐다잖아. 아까 내약방이 떠들썩했다니까?”
“우엑- 토 나와.”
그 말에 다들 자신이 똥통에 빠진 듯 헛구역질을 했다.
“아무튼 입 조심 해야지 큰일 나.”
“그러게 말이야.”
사건의 전말은 반소에 대한 경비대장들의 불경죄였고 그 결말은 똥통이었다.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똥 맛 좀 보라며, 반소가 그들을 똥통에 처박았다는 얘기였다.
한참을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 의학도들의 시선이 가비에게로 향했다. 잠자코 서안을 정리하는 가비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은갑아. 너 괜찮아? 이따 음궁 가야 하잖아.”
맘 같아선 내키지 않았지만, 일은 일이었다. 할 건 해야지.
“상관없어.”
봇짐을 둘러멘 가비가 학당을 나갔다. 그러자 우르르 따라붙으며 말했다.
“예전에 의학도 중 한 명이 불경죄를 지었다가 야왕님께 호되게 당했다잖아.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시험도 포기하고 태황궁을 나갔대.”
“그뿐이야? 누구는 야왕님의 반월도에 머리카락이 싹둑 잘렸다던데?”
“눈물 콧물 짜면서 살려달라고 빌면, 이런 표정으로 웃는대.”
학우 중 한 명이 눈을 위로 치뜨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려 보였다. 그 모습이 반소와 영 딴판이라 우스웠지만 다른 의학도들은 소름이 돋는다는 얼굴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가비가 반소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넌 진짜 싸가지도 없고, 평판도 별로야.
아직도 걷어차인 정강이가 얼얼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멍이 든 건 다리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착잡한지. 정강이가 욱신댈 때마다 반소의 표정과 말투가 떠올라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은갑아!”
그때, 저만치서 연화가 가비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함께였다. 연화 무리가 다가오자 가비 뒤에 있는 학우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서로 머리를 매만져 주고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지금 이 분위기, 뭐지?
가비가 미간을 그러모으며 돌아보자, 학우들이 발그레한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은갑아. 우리 다과방 갈 때까지만 같이 있어주라. 어?”
청춘은 청춘이었다. 그것도 이제 막 만개하려는 ‘꽃청춘’.
시험도 중요하겠지만, 이성 간의 호기심도 왕성할 때였다. 첫사랑에 대한 설렘도 있을 테고.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려는 학우들이 귀여워 가비는 자리를 뜨지 않고 연화를 기다렸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가비가 감옥소로 끌려갔을 때 연화가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게다가 가비에게 고백하고 차인 사실도 본인이 직접 얘기를 하고 다녀 소문이 난 것이라고. 생각보다 성격이 시원하고 털털했다.
내가 여자인 걸 밝힐 수만 있다면 너랑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가비가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연화에게 물었다.
“수업 끝난 거야?”
“응. 은갑이 너희 반도?”
“어. 그래서 다과방 가려고.”
그 말에 연화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연화가 하고픈 말을 가비가 먼저 꺼냈다.
“같이 갈래?”
연화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그럴까?”
연화 무리가 가비 무리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다과방으로 향하는 내내 다른 의학도들의 시선이 꽂혔다. 남학생들은 연화 무리와 어울리는 가비네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봤고, 여학생들은 가비 무리와 어울리는 연화네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분위기는 서먹하다 못해 어색했다. 그동안 서로 오며 가며 얼굴만 익혔을 뿐이지, 이렇게 함께 하는 자리를 가져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남녀공학으로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 가비와는 달랐다.
“오늘 다과방 간식은 뭐가 나온대?”
침묵을 깨고 묻자, 연화가 냉큼 대답했다.
“타래과랑 수정과.”
“연화 너 타래과 좋아해?”
“타래과 싫어하는 여인도 있어? 거의 다 좋아할걸?”
“그래?”
“달짝지근해서 맛있잖아.”
“여기 준식이 아버지가 장터에서 가게를 크게 하신대. 타래과도 판다고 들었어.”
“정말?”
가비의 눈길을 따라 여학생들의 시선이 준식이라고 불린 의학도에게 향했다. 쏠린 시선이 부끄러우면서도 좋은지 준식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약과랑 강정도 팔아. 4대째 하고 있어.”
“와- 대단하다.”
그 말을 계기로 조금씩 말문이 트기 시작했다. 대화가 끊길 때쯤이면 가비가 다른 학우들을 들먹이며 이야기를 끌었다.
그러는 사이 다과방에 도착해 간식을 먹었고 분위기는 아까와 달리 자연스럽고 편해졌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 음궁에 가야 한다는 핑계로 가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도당으로 향하는 길이 느지막한 오후 햇살로 나른하게 반짝였다.
“날씨 좋네.”
바람결에 어렴풋한 온기가 느껴졌다.
진짜 봄이구나….
아직 이르긴 했지만 분명 봄이 오고 있었다. 그 계절의 변화가 새삼스러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얼어 죽을 것처럼 추웠는데.
그러고 보니 다들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졌다. 두툼한 상의를 걸치고 있는 건 가비 뿐이었다. 그래도 이 옷이 여자임을 숨기는데 방패 같은 역할을 해줬다. 땀이 그리 많은 건 아니라 봄까지는 어찌 버틸 수 있겠지만,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하는 수 없이 벗어야 했다.
그때까지 들키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그동안은 사람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학우들과 부쩍 가까워지면서 얼굴을 보는 시간도 길어졌다. 알면 알수록 다들 열심이고 순박한 면모들이 보여 성별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 한구석에 걸렸다.
천족의 서고에 들어갈 방법은 없을까?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지만,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직관대로라도 행동해야 했고, 가비의 직관은 자꾸만 천족의 서고에 있는 약초도감을 가리켰다.
천족의 서고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반소가 따라왔다.
쓸데없이.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떨치는데, 학도당으로 향하는 입구 저편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의학도들이 가족들과 만날 수 있는 면회실이 있는 곳이었다.
뭐지?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음성의 파고가 심상치 않아 다가가서 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곤 놀란 눈을 치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