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31화 (31/95)
  • [31화]

    “천자님, 기침하셨나이까.”

    평소보다 이른 시간. 문밖으로 장곡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상에 누워있던 현이 조용히 눈을 떴다.

    간밤.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뒤척이길 반복하다 늦은 새벽 까무룩 잠든 게 전부였다.

    침상 아래로 발을 내린 현이 줄을 당기려다 머리맡을 봤다.

    ‘제가 드린 건강인형은 잘 있죠?’

    가비가 생각났다.

    ‘녀석이 사서님의 우환을 가져가 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웃던 아이의 얼굴이.

    현이 손을 뻗어 건강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는 나하고 말도 안 섞을 테냐.”

    가비에게 묻듯 읊조렸다.

    “눈도 안 마주쳐 줄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면 자꾸만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천자님, 세안하실 물을 올리겠습니다.”

    밖에서 다시 한번 장곡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들어왔다.

    현이 느리게 몸을 일으켜 세안하는 자리에 앉았다. 굳은살 한점 없는 고운 손들이 현의 얼굴을 보드랍게 어루만졌다.

    이내 집무실용 의복으로 빠르게 갈아입히고 빛나는 금백색의 머리카락을 황금색의 상투관 안으로 정리했다.

    오늘은 지방 도시를 관할하는 원(元)들이 오는 날이었다.

    이들은 보통 한 달에 한 번, 많게는 두 번 정도 태황궁을 방문했다. 수도 ‘온’과의 거리 차로 인해 도시별로 나누어서 오는데, 보름 전에는 ‘봉, 황, 정’의 원들이 왔었고 오늘은 ‘소, 서, 윤, 영’의 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준비를 끝낸 현이 시종들과 함께 양궁에 있는 집무실로 들었다.

    “소, 서, 윤, 영의 원들이 천자님을 뵈옵니다-”

    모두가 한입으로 우렁차게 인사하며, 현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허리를 깊이 수그린 원들을 가로질러 현이 익숙하게 상석에 앉았다. 오늘 자리에는 태어의 서문도 함께였다.

    곧 집무실은 명료한 보고와 대답, 그리고 여러 가지 사안들과 그것에 대한 승낙과 보류를 말하는 음성으로 채워졌다.

    한 장 한 장 쌓이는 보고서 위로 현의 인장이 찍히고 글씨가 쓰였다.

    붓을 쥔 현의 손에 힘이 실렸다. 제 이름이 새겨진 붓을 보니 가비가 생각났다.

    원들과 회의를 하는 중에 다른 생각을 하다니.

    이런 자신이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마지막 사안에 대해 정리하고 말을 마쳤을 때는 어느덧 시간이 정오를 넘기고 있었다.

    “태어의 서문은 할 말이 있으면 하라.”

    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서문이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의궁에 혈담초가 필요합니다. 혹 혈담초를 구할 수 있는 원께서는 즉시 의궁으로 보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그 말에 원들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천태비님께서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서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천태비님을 지탱해 주는 건 혈담초가 유일하니까요.”

    혈담초는 현존하는 약초 중 제일 귀한 것으로, 수백 년을 살아온 식물 중 특이하게 사람의 핏줄 형태로 변하여 굳어진 것을 말했다.

    “얼마 전 천태비님께 탕약을 지어드리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여 원들께서는 각 지역의 약초꾼들에게 수소문해 주십시오.”

    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천자의 생모, 태황국의 천녀 천태비를 살리는 일이었다. 세상에 영생할 수 있는 약초라도 있으면 다들 기꺼이 찾아 나설 태세였다.

    “허면 오늘 회의는 마치도록 하지요.”

    장곡의 알림으로 회의가 파했다. 원들은 함께 어우러져 점심을 들러갔고, 태어의 서문도 물러갔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현이 피곤한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종들이 다가와 현의 어깨와 팔을 주무르려 하자 손을 들어 물렸다.

    상태를 살핀 장곡이 눈짓하자, 시종들이 목을 축일 수 있는 물과 간식을 준비해 올렸다.

    눈을 감고 있던 현이 설핏 그것을 보더니 이내 그 또한 물렸다. 입맛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드시지요. 드셔야 합니다.”

    한 시진 후에 또 다른 회의가 있었다. 그러나 현은 장곡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피로한 듯 눈을 감을 뿐이었다.

    상황을 살피던 시종들이 얼른 다가와 다리를 뻗을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고 머리 아래로 푹신한 베개를 놓았다.

    그렇게 잠이 드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고, 다시 회의에 들어갔다.

    아까 원들이 앉았던 곳에 이번엔 태황궁의 경비대장들이 앉았다.

    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사안은 보통 주술력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주술력은 태황국의 천족들이 천족으로서 군림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이자 혈통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해서 혈통의 문제로, 현은 반소보다 뛰어난 주술력을 가졌지만 육체적인 능력은 그에 한참을 못 미쳤다. 허나 그건 현이 약해서가 아니라, 반소의 신체 조건이 일반 사내들보다 월등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야포청 감옥소에 있는 염옥과 수옥의 주술력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천자님께서 이를 살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야경대의 경비대장이 말했다.

    현이 눈짓하자, 곁에 선 장곡이 일정부터 살폈다.

    “목욕재계를 치르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금번 달엔 흉일도 아직 남아 있으니 괜찮은 날을 점지해 보겠습니다.”

    태황국은 지은 죄보다 처벌의 수위가 높아 범죄율이 현저히 낮았다. 그 이유는 감옥소마다 걸어놓은 흑주술 때문인데, 이에 대한 보수와 보완은 전적으로 천자의 몫이었다. 하여 천자의 몸 상태를 신경 써 유독 좋은 날을 택해야 했다.

    “모든 경비대가 태황국의 안전을 위해 힘 써주니 늘 든든합니다.”

    경비대의 업무 일지와 보고서를 낱낱이 훑은 현이 의례적인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 의례적인 말에도 주경대와 야경대의 경비대장은 감읍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건 귀물경비대의 경비대장, 반소뿐이었다.

    나머지 경비대장들은 그것이 못마땅했지만, 감히 반소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조만간 연회를 베풀 생각입니다. 흉일이 겹치는 바람에 수도로 돌아온 귀물경비대의 노고를 미처 챙기지 못했으니까요.”

    현이 반소를 바라보며 너그러운 얼굴로 말했다. 허나 반소는 단칼에 거절했다.

    “연회는 됐습니다. 평년보다 일찍 환궁한 거로도 모자라 연회라니요. 민폐 중에 민폐가 아닙니까.”

    사실 일 년 중 절반을 경계에 나가 있는 귀물경비대가 수도로 환궁하면 현은 늘 그렇듯 연회를 베풀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를 번거롭게 하는 일이었다.

    우선 날짜부터 길일로 택해야 했고, 기운이 상충하는 탓에 천태비와 현, 그리고 귀물경비대의 연회 자리를 따로 마련해야 했다.

    게다가 서문을 제외한 궁 안 사람 대부분은 반소와 귀물경비대를 꺼리니 사실상 맘 놓고 즐길 수 있는 연회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 건 받는 쪽도 껄끄러운 허례허식일 뿐이었다.

    “민폐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장이 이끄는 귀물경비대 덕분에 항상 경계가 조용한걸요.”

    현이 서운함을 내비치자, 그걸 지켜보던 경비대장들의 표정도 불편해졌다.

    고귀하신 천자께서 저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데, 거기에 화답은커녕 퉁명스럽기만 한 반소가 마뜩잖은 탓이었다.

    “하긴. 귀물경비대의 환궁이 많이 이르긴 했지요. 저희 주경대와 야경대만으로도 이번 수도에서 벌어진 귀물 사건은 충분히 해결 가능했으니까요.”

    주경대의 경비대장,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비대장의 감투를 대신 쓰고 이 자리에 참석한 좌대장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는 귀물경비대에 대한 천자님의 배려가 아닐는지요. 올겨울이 유독 혹독하여 천자님께서 귀물경비대를 평년보다 빨리 환궁시키신 게지요. 천자님의 너른 마음에 항상 감복하는 바입니다.”

    “감복하는 바입니다.”

    주경대의 좌대장을 따라 야경대의 경비대장도 예를 갖추며 동의했다.

    참으로 우스운 꼴이 아닐 수가 없었다.

    특히 주경대의 좌대장은 현재 경비대장이 가비의 일로 정직 처분을 받은 상태라 그 자리를 잠시 맡은 것뿐이었다. 헌데 그게 마치 기회라도 되는 양, 현에게 아부를 떨고 있었다.

    어쨌든 태황궁의 모든 이가 그랬다. 어떤 일이든 그 공은 천자에게, 그 흠은 반소에게 돌리는 게 세상의 이치인 듯 굴었다.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지만, 오늘따라 아니꼬웠다.

    “뚫린 입이면, 말은 바로 해야지.”

    반소가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귀물경비대가 평년보다 일찍 환궁한 것은 천자의 간절한 청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리 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경대와 야경대가 귀물을 잡을 능력이 되지 않아서다. 또한, 일은 아직 단서조차 잡히지 않았어. 헌데 해결 가능이라니. 매일 별 탈 없는 수도만 정찰하다 보니 판단 능력들이 떨어진 건가.”

    “어찌 그런 말씀을…!”

    신랄하게 이어진 비판에 호통을 치려던 경비대장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들을 노려보는 반소의 날 선 눈빛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해서 그저 분노한 얼굴로 ‘크흠’ 침음할 뿐이었다.

    “시간이 벌써 미시(未時:13시~15시)를 넘겼습니다. 이만 회의를 파하시지요.”

    장곡이 적절히 상황을 끊었다.

    “휴식을 취하시면서 요기라도 하셔야 합니다. 끼니를 거르시면 아니 됩니다.”

    장곡의 정중한 간언에 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아침 일찍부터 이어졌던 정무(政務)가 끝이 나고 경비대장들은 먼저 자리를 떴다.

    장곡마저 정리된 문서를 들고 나가자, 현이 뒤늦게 일어나는 반소를 불렀다.

    “형님.”

    회의가 파한 터라 호칭부터 달리했다. 말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반소를 향해 현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 아이는…. 그러니까 그 아이를 어찌 아시는 겁니까.”

    계속 궁금했다. 가비와 반소의 인연이.

    “형님께서 감옥소에 갇힌 그 아이를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형 반소는 결코 그런 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측은지심을 갖는 이가 아니었다.

    “대체 얼만큼의 친분을 갖고 계시길래 형님답지 않게 선뜻 나서서 일을 도왔는지 궁금해서요.”

    “나 답지 않게라….”

    반소가 천천히 그 말을 곱씹었다.

    “혹 천자의 허락 없이 내 멋대로 그 아이를 도운 것이 화가 되었습니까?”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라…,”

    “허면 제가 한번 물어보지요.”

    반소가 현의 눈을 직시했다.

    “천자께선 왜, 그 아이를 속였습니까.”

    현의 눈이 흔들렸다.

    “듣자 하니 서고를 지키는 사서를 자처했다던데. 그야말로 천자, 아우님답지 않아서요. 천자께선 사람도 물건도, 하물며 그날 입을 옷과 신발까지도 가려서 받지 않습니까.”

    그런 그가 가비에게 보인 행동은 의외를 넘어서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건…….”

    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반소는 그것이 되레 더 기분이 나빴다.

    대관절 너에게 그 아이는 뭐길래. 천자라는 고귀한 신분까지 거짓으로 감추며 만남을 이어왔던 건지.

    그 의중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그리고 그것에 불쾌함을 느끼는 자신 또한 언짢았고.

    “피차 서로 간 묻고 답할 일은 아닌가 봅니다. 더는 대화가 이어지질 않으니.”

    반소가 굳은 얼굴로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지요. 밖에서 시종들이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는 게 심히 거슬려서요.”

    반소가 휙-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시종들이 들어와 반소가 앉았던 자리와 찻잔 등을 재빠르게 내갔다.

    또 그와 마주했을 천자의 얼굴이며 옷 위로 천태비의 기도가 들어간 정화수를 흩뿌렸다.

    이마 위로 튀긴 정화수가 굵은 눈썹을 지나 눈꺼풀 위로 굴렀지만, 현은 눈 한번 깜짝이지 않았다.

    태황국의 누구도 자신을 경애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오직 반소만이 그랬다.

    자신을 가소롭다는 듯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보듯이 대했다.

    가비에 대한 일을 되물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던 반소의 눈빛이, 오늘따라 긴 잔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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