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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27화 (27/95)
  • [27화]

    ‘할아버지. 이게 뭐야?’

    묵직한 나무함에 귀하게 담겨 있는 책 한 권은 늘 가비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가비가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할아버지 은수만은 가비를 앉혀놓고 나무함을 열어 책을 보여주었다.

    ‘와-’

    가비가 탄성을 내질렀다. 벽돌처럼 두꺼운 책은 책장도 매우 얄팍했다.

    어린 가비조차 이것을 함부로 넘겼다간 찢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때. 신기하지?’

    할아버지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이게 우리 집 가보다.’

    ‘가보?’

    ‘그래. 가보. 집안에 전해지는, 아주 귀한 물건이란 뜻이야.’

    할아버지가 눈을 반짝이는 가비 앞에 책을 펼쳐 주었다.

    가비의 갈색 눈동자가 빠르게 그 내용을 훑었다.

    글자는 벌써 뗐지만 처음 보는 단어, 즉 생소한 약초 이름이 많았다.

    ‘이건 쑥처럼 생겼네? 이건 미나리.’

    ‘하하. 그렇지?’

    할아버지가 가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가비가 책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 장 한 장씩 넘겨보았다.

    섬세한 그림을 어린 눈이 빤히 관찰했다. 마치 빨려 들어갈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한 장씩 넘기던 것이 쌓이고 쌓였을 때,

    ‘아버님, 식사하세요! 가비도 나오고!’

    문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비가 퍼뜩 눈을 들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이었다.

    분명 점심때 보았는데 어느새….

    놀란 눈으로 할아버지를 돌아보자, 할아버지가 온화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재밌어?’

    ‘응.’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

    ‘할아버지. 나 이거 또 봐도 돼?’

    ‘또 보고 싶어?’

    ‘응.’

    ‘그럼 내일 또 보자.’

    ‘으응!’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서 내려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갔다.

    그러면서도 책상 위에 있는 책을 연신 돌아보았다.

    막연히 책을 보면서 심장이 뛰는 건 처음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의 얼굴에 주름이 한껏 늘어났을 때.

    책은 수없이 넘겨본 탓에 부쩍 낡아 있었다. 그런데도 한가할 때면 거실 소파에 엎드려 책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잊지 않고 말했다.

    ‘가비야.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단다.’

    ‘뭐래. 할아버지. 그런 게 어딨어.’

    ‘진짜래도. 인석아.’

    ‘할아버지. 내가 아직도 초딩으로 보여? 산타클로스랑 피터 팬도 안 믿은 지 오래됐거든?’

    ‘이런…. 우리 강아지가 많이 메말랐구나.’

    ‘메마른 게 아니라 현실 직시.’

    책을 탁, 덮으며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럼 현실을 직시하는 녀석이 그 책은 왜 읽누.’

    ‘재밌잖아. 판타지 소설 같고.’

    ‘판타지 소설?’

    ‘응. 세상에 없는 약초도감이니까 판타지지. 아무래도 이걸 만드셨다는 선조분은 시대를 앞서간 것 같아. 지금 태어나셨다면 유명한 판타지 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리셨을 텐데.’

    ‘이눔아. 그거 실존하는 거 맞다니까?’

    ‘어디에. 저 세계에?’

    ‘그렇대도.’

    ‘어휴. 내가 이래서 우리 할아버지를 좋아해. 어쩜 아직도 소년 같을까?’

    ‘뭐라고? 욘석이!’

    가비가 웃었다. 할아버지도 웃었다.

    그런 일상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싶어.”

    가비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보고 싶어.”

    아까부터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보고 싶어.’ ‘가고 싶어.’

    깊게 가라앉은 반소의 눈이 가비를 응시했다.

    “대체 넌, 정체가 뭐야.”

    땀에 흠뻑 젖은 가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어디에서 온, 누구야.”

    이곳을 제외한 다른 세계.

    그런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엔 오직 태황국뿐이니까.

    헌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녀석이 어디에서 온 누군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녀석의 말을 어느 정도는 믿는다는 뜻이었다.

    “가고 싶다는 건….”

    네가 왔다던 다른 세계일 테고.

    “보고 싶다는 건….”

    글쎄. 누굴까. 가족은 없다 했는데. 혹 숨겨둔 정인이라도 있는 걸까?

    “별…,”

    헛생각을 다 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가?”

    가비가 다른 말을 뱉었다. 멈칫한 반소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꼭 감겨 있던 가비의 눈꺼풀이 살짝 뜨였다.

    “…어디, 가?”

    갈라진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미간을 그러모은 반소가 가비를 빤히 바라봤다.

    비몽사몽 간에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하는 말 같았다.

    “그냥 있어….”

    가비가 속삭였다.

    “있어 줘. 혼자 있기 싫으니까….”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무언가가 가비의 눈꼬리를 타고 귓가로 떨어졌다.

    그 말을 끝으로 가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방금보다 숨소리가 편해진 걸 보니 한숨 더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감옥소에 다녀온 사람은 누구라도 심한 몸살을 앓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벌을 주기 위해 흑주술을 걸어 설계한 곳이니까.

    긴 세월을 시달린 사람들은 풀려나서도 후유증을 달고 살아야 했다. 그에 비하면 가비는 발만 담갔다 나온 격이었다. 고작 하루도 있지 않았으니 걱정할 일은 없었다.

    없는데도 왜…….

    “…….”

    식은땀이 맺힌 가비의 이마 위로 젖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반소의 손이 그곳에 닿을 듯 말 듯 허공에서 맴돌았다.

    이건,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미친.”

    나직하게 속삭이며 손을 거뒀다. 그래봤자 사내놈이었다. 그런 놈이 이리도 안쓰러운 건 그저 불쌍해서였다.

    그래. 불쌍하다. 녀석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녀석은 이곳에 연고조차 없는 외톨이니까. 저와 다를 바가 없는 이방인.

    그래서였다. 제 마음이 심란한 것도. 단지 그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후우-”

    반소가 침상에서 물러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등줄기로 말간 땀방울이 흘렀다. 불현듯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휘돌았다.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며 원인 모를 갈증을 느꼈다. 침상 주변에 놓인 화로 때문이라며 눈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가비를 더, 바라볼 수가 없었다.

    * * *

    코끝으로 타다 남은 숯 냄새가 맴돌았다. 가비가 조용히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새벽녘을 몰아낸 여린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비의 시선이 천천히 주위를 살피다가 이내 한 곳에 멈췄다.

    반소.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 그곳에 반소가 앉아 있었다. 잠이 든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밤새 자리를 지킨 듯했다.

    가비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웠지만, 어제와 달랐다.

    추위도 없고 통증도 없고.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꿉꿉해.

    가비가 옷자락을 끌어당겨 냄새를 맡아봤다. 밤새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희미하게 땀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지난밤의 기억이 가물거리며 떠올랐다.

    자신을 가뿐하게 안아 올리던 두 팔.

    투박하지만 온기가 느껴지던 품.

    제 옷을 벗기려던 마디가 굵은 손가락.

    목간을 채우던 뿌연 수증기.

    그 사이로 보이던 급박한 표정.

    가비가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옷은 매듭 하나 풀리지 않고 그대로였다. 싫다는 자신의 말을 들어준 거였다.

    어울리지 않게.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이나, 날 선 회색 눈이 익숙한 남자였다.

    상대를 비웃듯, 비뚜름히 올라가는 입꼬리가 표정의 전부인 듯 보였는데.

    “…….”

    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언제 깬 건지. 반소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반소는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허리만 세워 뻐근한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리곤 가비를 응시했다.

    이상하게 그 눈빛에서, 전과 같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살았군.”

    “덕분에.”

    그가 자신을 살려줬기 때문이었다. 날 선 회색 눈과 비웃는 입매가 익숙한 남자였지만, 그런 남자가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굳게 믿어줬기 때문에.

    “…고마워.”

    “고마워할 필요 없다.”

    반소가 무뚝뚝하게 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물 한잔을 따라 단숨에 들이켜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네 놈 정체가 궁금했을 뿐이야.”

    “…….”

    “그대로 죽어버리면, 알 수 없을 테니까.”

    어제 본 가비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죽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래 보였다. 핏기없는 얼굴과 퍼렇게 변한 입술에 심장이 뛰었다. 아플 만큼 뛰어서 반소 자신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난 네 놈이 누군지 꼭 알아야겠거든.”

    뭔데 날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는 건지.

    거슬리게 하는 건지.

    움직이게 하는 건지.

    어쩌면 정말 궁금한 건 녀석의 정체가 아니라, 녀석을 향한 알 수 없는 제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명심해.”

    반소가 물 한잔을 새로 따라 가비에게 내밀며 말했다.

    “네 놈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나라는 걸.”

    “…어째서?”

    “내가 널 처음 봤으니까.”

    마치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억지라는 걸 알지만, 가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내민 물을 받아 마실뿐.

    이내 물 한잔을 깨끗하게 비운 가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신이 또렷하고 맑아졌다.

    “나, 수업 들으러 가도 되지?”

    다시금 혈색이 도는 가비의 얼굴을 보며 반소의 입가로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가 어렸다.

    “가도 된다. 지금까지 조용하다는 건, 별일 없단 뜻이니까.”

    밤새 음궁도 주경대도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 말은 즉 천자의 귀에 이 일이 보고되었다는 것이고, 그건 곧 가비가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었다는 것이었다.

    “헌데 너.”

    반소가 방을 나서려는 가비에게 물었다.

    “천자를 대체 어디서 만난 거야?”

    궁금했다. 어떤 연유로 천자를 만나 인연이 닿은 건지.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사 태황궁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천자를 대면하기란 흔치 않았다.

    “몇 번 봤어. 서고에서.”

    “서고?”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 방 학우들이 장난을 좀 친 것 같거든.”

    일부러 서고를 잘못 알려준 게 분명했다.

    “그래서 몇 번 만났던 거야. 붓은 그때 받은 거고.”

    반소의 미간이 좁아졌다. 얘기를 듣고 나니 더욱 의아했다.

    잘못 들어간 서고라 하면 분명 천족의 서고를 말하는 듯한데, 그걸 천자가 바로 잡아주지 않고 계속 녀석이 오게 놔두었다고?

    한술 더 떠서 붓까지 주고.

    “아무튼 다행이야.”

    그 말에 반소가 눈을 들었다. 가비가 활짝 웃고 있었다.

    “너도나도 별 탈 없이 일이 잘 마무리돼서.”

    순간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햇살 아래 웃고 있는 가비의 얼굴이 반소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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