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열어라.”
반소가 명령했다. 감옥소를 지키는 보초병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바, 반소님, 저자는…….”
“열어.”
차갑게 번득이는 회색 눈이 보초병들을 노려봤다.
서슬 퍼런 눈빛에 보초병들이 고개를 떨궜다. 식은땀이 절로 났다.
야왕의 명을 거절할 수도, 냉옥에 갇힌 가비를 함부로 풀어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주경대의 경비대장이 감옥소로 들어왔다.
“반소님!”
반소의 출현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모양이었다.
반소의 무감한 눈이 경비대장을 향했다.
경비대장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감히 천자님의 물건을 훔친 죄인입니다. 처결이 있을 때까지는 풀어줄 수 없습니다.”
“보았느냐?”
“예?”
“이 자가 천자의 물건을 훔친 것을.”
“그, 그것은 아니지만 익명의 신고자가….”
“그것이 모함인지 오해인지 증명할 수는 있고?”
“증거품이 있습니다. 천자님께서 쓰시는 붓이….”
“천자가 주었다잖아.”
반소가 경비대장의 말을 잘랐다.
“천자가 준 물건이라고, 이 아이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미 풍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듣고 온 상황이었다.
“허나 그것은 명백한 거짓입니다.”
경비대장이 고집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천자님께서 어찌 한낱 의학도에게 이유도 없이 물건을 하사하신단 말입니까. 이는 특별한 연유가 아니고서야 전례 또한 없던 일입니다.”
“하.”
반소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경비대장이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보초병들이 초조한 얼굴로 두 사람을 훔쳐봤다.
반소가 경비대장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자신보다 키가 작은 경비대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죄의 경중을 누구보다 엄히 따지고 물어야 하는 것이 그대의 본분 아닌가.”
“…….”
“전례라는 건 언제든 깨질 수 있지.”
“…….”
“해서 정말. 만에 하나 말이다. 천자가 이 아이에게 붓을 하사한 것이라면 어찌할래.”
반소의 커다란 손이 경비대장의 어깨를 지그시 잡아 눌렀다.
“그런 아이를 네가 지금, 잡아 족치고 있는 거라면.”
경비대장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반소의 입가로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볼만하겠군. 그 평온한 천자가 어찌 나올지.”
“하, 하오나 반소님의 말씀 또한 짐작이지 않습니까.”
“그래. 확률은 반반이다. 녀석이 정말 훔쳤을 가능성이 반, 아닐 가능성이 반. 그건 목욕재계를 간 천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확실해질 일이야. 네 놈이 사사로운 판단으로 누군가를 도둑으로 만들 일이 아니라는 거다.”
반박하고 싶었으나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직 천자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받은 건 아니었으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경비대장의 어깨를 툭 치며 반소가 표정을 굳혔다.
“자. 그럼 이제 데려가도 되겠느냐.”
“허나 반소님. 여기 주포청은 저의 관할…, 허억!”
순간 경비대장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나갔다. 놀란 경비대장이 뒤로 물러났고, 보초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자빠졌다.
콰창!
반소가 휘두른 검이 창살에 붙어 있던 자물쇠를 깨부쉈다.
쾅!
발로 문을 밀어젖힌 반소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웅크린 채 굳어버린 가비를 안아 올렸다. 몸에서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냉옥을 나선 반소가 경비대장을 지나치며 말했다.
“천자가 돌아온 뒤 문제가 생기면 음궁으로 와라. 내가 그 문책을 두 배로 받을 테니.”
그리고는 서둘러 감옥소를 나갔다.
챙그랑-!
부서진 자물쇠와 발끝에 채는 자신의 검을 보며 경비대장이 허옇게 질렸다. 보초병들도 겁을 먹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실로 검을 휘두르는 반소의 모습은 야차 같았다. 그가 남기고 간 위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어째서 귀물은 귀물경비대만 잡을 수 있는지, 그 수장이 왜 반소일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았다.
* * *
“……워.”
반소에게 안긴 가비가 몸을 떨며 말했다.
“추, 워….”
“참아.”
반소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품에 안은 가비가 너무도 가벼웠다.
깡다구 하나는 좋은 녀석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더 연약하고 왜소한 느낌이었다.
“반소님!”
음궁에 들어서자마자, 반소를 기다리고 있던 귀물경비대가 달려왔다.
“주포청엔 왜 다녀오신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혹시 그 의학도 놈이 반소님의 물건도……!”
뒤따라오던 귀물경비대가 반소의 품에 안긴 가비를 보고 놀란 입을 벌렸다.
“이놈은…!”
이리 보니 모두가 아는 얼굴이었다. 특히 풍과 곤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그때 그, 저희에게 수면초를 먹이고 달아난 놈 아닙니까?”
곤이 놀란 눈을 치뜨며 외쳤다.
“시끄럽다. 문이나 열어.”
그 말에 풍이 재빨리 처소 문을 열었다. 반소가 그 안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모습을 곤이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게…, 뭔 일이야.”
당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 * *
“당장 욕통에 따뜻한 물부터 받아라.”
처소로 들어온 반소가 대기 중이던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뜨거운 목욕물을 조금 식혀 욕통에 가득 채우고 몸을 닦을 면포를 준비했다. 또 가비가 갈아입을 옷까지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반소가 목간으로 들어가자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욕통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이 목간을 가득 채웠다.
반소가 가비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옷을 벗기려고 매듭을 푸는데,
“안…,”
가비가 반소의 손을 잡았다.
“…안, 돼.”
시린 손이 반소의 손을 움켜잡았다. 반소가 미간을 좁혔다. 꽁꽁 언 옷이 버석거리며 피부를 쓸고 있을 것이었다.
다시 옷을 벗기려 들자, 가비가 몸을 말며 방어했다.
“안 돼, 안….”
“너 지금!”
“…제발.”
가비의 손이 매달리듯 반소의 옷소매를 잡았다. 그 힘이 터무니없을 만큼 미약했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제 손에 걸려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쩐 일인지 위태롭고 절실해 보였다.
“사내놈이.”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사내끼리 내외라도 하자는 건지.
이 와중에 까탈스럽게 구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그러면서도 반소는 다시 가비를 안아 올렸다. 목간을 나오자 잡담을 떨고 있던 시종들이 금세 몸을 바로 했다.
반소가 침소로 걸어가며 말했다.
“당장 화로를 준비해라. 세 개. 아니 네 개.”
“예.”
금세 침상 주변으로 화롯불이 놓였다. 방안은 금세 따뜻하다 못해 후끈해졌다.
가비를 침상 위에 내려놓은 반소가 두툼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가비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냉옥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이를 딱딱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침상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반소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가비의 파들거리는 속눈썹이, 보라색으로 변한 입술이 몹시도 눈에 거슬렸다.
“…미안.”
가비가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
“헛소리.”
늘 자신을 향해 또박또박 대들고 말대꾸를 할 것만 같은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자, 어딘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했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그 말이 왜 이렇게 껄끄러운지.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런 말은 알지만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말이었다. 적어도 반소에겐.
“혹시라도 나 때문에…, 네가 곤란해지면….”
“입 처닫고 자라. 시끄러우니까.”
반소가 이불을 홱 당겨 가비의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쌕쌕-
이내 이불이 작게 들썩였다. 적막한 방안 가득, 가비의 숨소리가 흘렀다.
* * *
“방금 뭐라 했느냐.”
현이 장곡을 돌아보며 물었다.
“은갑이가 어찌 돼?”
의식이 끝나자마자 장곡이 다가와 가비의 소식을 전했다.
옷을 입히려는 시종의 손을 치우며 현이 다시 한번 물었다.
“도둑으로 몰리다니?”
“옷부터 입으시지요. 고뿔이라도 걸리실까 염려됩니다.”
그제야 현이 팔을 벌렸고, 시종들이 익숙하게 옷을 입혔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을 마른 면포로 빠르게 닦아내고 말렸다.
현이 답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장곡을 바라봤다.
장곡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혹시 그 의학도에게 무언가를 하사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사라니. 나는 그런 적이…,”
순간 현이 말을 멈췄다.
“설마 내가 준 붓이….”
장곡이 무감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무래도 그것이 오해를 부른 듯합니다. 알아본 바로는 그 의학도와 같은 방을 쓰는 의학도들이 신고한 듯한데….”
“아니다. 은갑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 차라리 주웠다면 모를까 남의 물건에 손을 댈 아이가…!”
“천자님께서 하사하시는 모든 것들엔 응당 그 이유가 분명해야 하지 않습니까.”
현은 말을 멈췄다. 장곡의 말투는 매우 공손했지만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그랬다. 천자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그냥 들어오는 것도, 그냥 나가는 법도 없었다.
난 다만 그 아이가….
귀여웠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빤히 제 눈을 보며 얘기하는 그 얼굴이.
기특했다. 어리지만 당차고 의연해 보이던 그 눈빛이.
해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건네준 그 붓이 이렇게 큰일로 번질 줄은 몰랐다.
“그럼 지금 그 아이는 어찌하고 있느냐.”
“냉옥에 갇혔다고 들었습니다.”
“냉옥에?”
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천족의 서고뿐만 아니라 태황궁의 주요한 곳엔 모두 주술이 걸려 있었다. 그건 감옥소도 마찬가지였다. 그 효력을 유지하는 건 오직 천자의 주술력뿐. 하여 현은 알고 있었다. 감옥소마다 각기 다르게 지정해 놓은 고통의 정도가 어떠한지.
냉옥이라면 얼음송곳이 피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곳에 갇혀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을 가비를 생각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걸 왜 이제야 말 하느냐!”
“당연한 일 아니옵니까.”
보기 드문 호통에, 장곡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신성한 의식을 어찌 잡다한 일로 더럽힐 수 있는지요.”
잡다한 일.
현의 눈가가 미세하게 꿈틀댔다.
그렇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곡의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옳다는 것을.
그만큼 의식은 중요했고 무엇도 그걸 방해할 순 없었다.
순간 발끈했던 자신을 가라앉히며 현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환궁한다.”
그 말에 장곡을 비롯한 시종들이 황급히 현의 뒤를 따랐다.
밤은 어느새 깊어져, 달빛마저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