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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25화 (25/95)
  • [25화]

    태황궁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가면 산중 맑은 계곡물이 나왔다.

    태황국을 감싸고 있는 산은 ‘태황산’ 하나뿐인데 그 줄기가 워낙 방대하고 넓어 그 속에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었다.

    스산한 대나무숲도 있었고, 뱀이 많은 뱀골도 있으며, 평지와 같은 숲길, 그리고 수많은 줄기의 계곡물과 폭포수를 지니고 있었다.

    그중 달이 뜨면 달빛을 고스란히 받아 은색으로 빛이 나는 계곡물이 있었다.

    달은 불길한 기운이다. 허나 달이 있어야 해가 있고,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 있는 것처럼 그 둘은 상극이면서도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마치 반소와 현처럼.

    해서 사람들은 반소와 현이 해와 달의 화신(化身)이라 믿었다.

    특히 반소의 탄생은 두려움과 동시에 기대감을 주기도 했다.

    양극인 두 기운이 충돌하여 현이 가진 양의 기운이 반소가 가진 음의 기운을 완전히 눌러버리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태평성대가 찾아올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은…, 언제나 완벽한 존재여야 했다.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고 성스러운 사람이어야 했다.

    말갛게 고여있는 계곡물 위로 붉은 연꽃 등이 하나둘, 띄워졌다.

    이윽고 수많은 등이 계곡물에 휘영청 비친 달을 모두 가려버렸다.

    그 가운데 몸을 담근 현이 조용히 합장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주변은 시종들이 피운 횃불로 낮이 된 듯 훤했고, 누구도 의식이 끝날 때까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바스락-

    나뭇잎을 밟는 소리에 장곡이 내리뜬 눈으로 옆을 돌아봤다.

    숨죽이며 다가온 시종 한 명이 장곡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곡이 말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제야 장곡의 귓가에 입을 바짝 붙이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장곡의 얼굴엔 큰 변화가 없었다. 물러가라 손가락을 까딱이니, 말을 끝낸 시종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태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현이 알고 있어야 했다. 현이 알지 못하는 일은 장곡이 알아야 하고, 장곡이 알지 못할 땐 그가 부리는 시종들이 알아야 했다.

    도둑질이라. 그것도 천자님의 물건을.

    믿기지도 않을 뿐더라 믿지도 않았다. 장곡의 집안은 대대로 천자를 모셔왔다.

    그들의 눈과 귀, 팔과 다리가 되는 삶이었지만 최고의 영광이었다.

    특히 장곡은 선대 천자로부터 최고의 측근이라는 찬사까지 들어왔다. 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허니 이 나이쯤 되면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게 생겼다.

    감히 물건을 훔칠 아이는 아니지. 그 정도로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이 아니야.

    장곡이 본 의학도 가비는 그랬다.

    눈빛이 다채로우며 생기가 돌고 꽤나 영리한 놈.

    그저 어의로만 두고 쓰기엔 아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놈이 도둑질? 말도 안 되지.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지만 드러난 표정은 무감할 뿐이었다.

    장곡의 눈이 정화 의식을 치르는 현을 바라봤다. 그 아이를 예뻐하는 것은 알겠으나, 굳이 이런 사소한 일을 의식 중에 알릴 필요는 없었다.

    무엇도 천자 위에 있을 수 없고, 천자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

    ‘냉옥에 갇혀 고초를 겪는 모양입니다.’

    시종이 전한 말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내 신경 쓰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장난감은 장난감일 뿐.

    놀이가 끝나면 인형은 관심 밖의 물건이 될 뿐이다.

    그 끈은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 * *

    사방이 모두 뿌옇게 달아올랐다.

    가비는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허공에 있었다.

    땅을 딛고 서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니 어딘가에 높이 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긴, 어디지…?

    두려운 감정이 왈칵 솟았다. 자신을 감싼 기운이 소름 돋을 정도로 사나웠다.

    뒤늦게, 가비는 자신이 기다란 원기둥에 묶여 있다는 걸 알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 만큼 아프다는 것도.

    목이…, 타는 것 같아.

    까칠하게 일어난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목구멍으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누가 나 좀…….

    힘없이 고개를 떨구자, 아래로 참혹한 광경이 보였다.

    ‘……!’

    가비의 눈꺼풀이 잘게 경련했다.

    부옇게 솟아오르는 먼지 바람. 그리고 화염(火焰)

    그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 혈투.

    ‘아…, 아아….’

    바싹 말라 버석해진 입안에서 피가 뚝 떨어졌다.

    아아아악-!

    터져 나오지 못한 비명이 안에서 메아리쳤다.

    순간, 해무와도 같은 먼지 바람을 가르며 누군가 우뚝 솟아올랐다.

    해를 등지고 선 검은 그림자는 분명 남자였다.

    누구…?

    흐릿한 시야 속으로 남자의 모습이 흔들렸다.

    날…, 알아?

    남자의 얼굴을 보려고 가늘게 뜬 눈앞으로,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제야 알았다.

    뺨을 스치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붉은색이라는 걸.

    생(生)을 상징하는 피와 같고,

    삶을 불태우는 불꽃 같은,

    하여 하늘을 덮고, 해와 달을 모두 집어 삼켜버릴 붉은 여인.

    그건…….

    * * *

    가비가 번쩍 눈을 떴다. 감옥소로 끌려온 후, 까무룩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무슨 꿈이지…?

    한 번도 꾼 적 없는 생소한 꿈이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만큼 생생했다.

    가비가 손을 더듬어 제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바람에 나부낄 정도로 길지도 않았고, 붉은색은 더더욱 아니었다.

    너무 추워서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걸까.

    눈을 뜨자마자 살을 에는 냉기가 느껴졌다. 이건 보통 추위가 아니었다. 날씨로 겪을 수 있는 수준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갗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아파.”

    가비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지하 감옥소는 여러 갈래로 그 영역이 나뉘어 있었다. 모든 방은 독방으로 이뤄졌으며, 죄질에 따라 벌을 주는 방식도 다양했다. 그중 가비가 갇힌 곳은 냉옥이었다.

    보통 이곳은 상습 절도범이나 강도, 질 나쁜 암거래나 폭력 등을 행사했을 때 갇히는 곳이었다.

    단순한 도둑질로는 갈 곳이 아니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천자의 물건을 훔친 죄였다.

    더한 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주경대의 경비대장은 죄에 대한 판결을 천자에게 확인받고자 가비를 임시로 이곳에 가둔 것이었다.

    “하아…”

    가비가 웅크린 두 손에 입김을 불었다. 힘겹게 몸을 움직여 창살 앞으로 다가갔다.

    “…이봐요.”

    딱딱거리는 이 사이로 뭉개진 발음이 흘러나왔다. 불현듯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아니라고 했잖아.”

    억울했다.

    “난 아니야! 아니라고!”

    남은 힘을 끌어모아 외쳤지만,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훔치지 않았어. 정말, 훔친 게 아니야….”

    결국, 한쪽 구석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하얗게 서리가 낀 옷이 서걱거리며 피부를 쓸었다.

    “대체 왜….”

    현이 제게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곳이 애초부터 평범한 서고가 아니었고, 천자 현이 사서 현이 아니란 걸 알았다면 두 번 다시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차를 내주고 웃어주던 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심심풀이 장난 정도였을까?

    자신이 천자인지도 모르고 까불거리던 제 모습이 우습고 재미있어서.

    “…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을 놀리는 줄도 모르고, 농담을 건네며 함께 웃었다. 그 사실이 기가 막혔다.

    “…으으.”

    더는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감옥소는 애초부터 벌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실제로 몸에 위해는 가지 않지만, 그에 버금가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하여 다른 죄인들은 익숙한 듯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을 버텨낼 수 있었지만, 가비는 그렇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흐으….”

    이내 가비의 몸이 기울었다. 공처럼 동그랗게 말린 몸이 냉골 같은 얼음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하아….”

    차가운 얼굴은 감각이 없었다. 숨을 쉬는 건지 안 쉬는 건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렇게 바랐던 대학 생활 한번 못 해보고….

    보고 싶은 사람들도 보지 못한 채….

    불현듯 마당을 채우던 동물들이 생각났다.

    제 옆에서 늘 떠들썩하게 말을 붙여주던 친구 은영이도.

    사고가 났던 펜션.

    그 시간 속에 멈춰버린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의 얼굴이 가비의 눈앞으로 차례대로 지나갔다.

    차가운 눈물방울이 눈가를 타고 흘렀다.

    ‘가비야. 내 새끼. 할애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우리 강아지가 이렇게 잘 컸으니. 네 엄마 아빠 볼 면목이 있어.’

    그 말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밤. 그런 말을 남기고 웃는 얼굴로 방에 들어간 할아버지는, 잠을 자듯 평온한 얼굴로 생을 마감했다.

    “어이.”

    그때, 묵직한 저음이 가비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로 남자의 모습이 어룽졌다.

    ……반소.

    그가 삐딱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무심한 어조였다.

    도와줘….

    가비가 입술을 달싹이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아파. 죽을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가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눈앞에 있는 사내, 반소를 향해 외쳤다.

    여기서 날 꺼내줘.

    무언(無言)의 외침을 들었는지.

    그도 아니면 절박한 가비의 마음을 읽었는지.

    침잠돼 있던 반소의 눈빛이 달라진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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