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22화 (22/95)
  • [22화]

    석식을 먹은 후 가비는 학도당으로 향했다.

    드륵-

    방문을 열자, 별안간 날 선 음성이 날아들었다.

    “야. 누가 나 위해주는 척하래?”

    겸복이었다. 그가 사나운 눈으로 가비를 노려봤다.

    가비가 기가 막힌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누가 널 위했다고 그래. 착각도 유분수지.”

    겸복이 지나가는 가비의 팔을 붙들었다. 그 손을 가비가 뿌리쳤다.

    “경고했지? 손대지 말라고.”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선생님들한테 잘 보이려고 가식 떠는 거.”

    “뭐?”

    “아님 다들 꺼려하는 음궁에 또 가겠다고 지원하는 건 뭔데?”

    처음은 그렇다 쳐도 또 간다고 한 건, 선생들한테 잘 보이려는 수작이 틀림없었다.

    “네 놈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몰라도, 여기 그렇게 만만한 곳 아니야. 알아?”

    “누가 만만하게 봤다고 그래.”

    “네 놈 행동이 그렇잖아. 태어의님을 비롯해서 모두에게 환심 사려고 난리 치는 거. 그런다고 시험에 가산점이라도 붙을 줄 알아?”

    “후우….”

    가비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겸복을 노려봤다. 저보다 키가 조금 더 큰 겸복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리 왕왕거려도 생겨 먹은 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불안하고 조급해 보였다.

    “야. 너 시험에 목숨 걸었냐?”

    “당연한 거 아냐?”

    “난 내 목숨을 그렇게 걸어본 일이 없어서 몰라. 네가 왜 이렇게 꼬였는지.”

    간혹 그런 친구들을 본 적이 있었다. 항상 눈 밑이 퀭해서 잠 한숨 못 자고 소화 불량을 달고 사는. 고3의 압박이 심하다는 건 알지만 적어도 가비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공부가 중요하지만 인생의 전부라고 배워본 적도 없었고, 낙제가 인생의 끝을 의미한다고 배우지도 않았다.

    해서 그런 친구들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과 길러준 할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난 그저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지, 네가 나보다 잘하는지 못 하는지는 안 중요해. 그게 왜 중요한데? 네가 뭔데.”

    “뭐?”

    “그러니까 너도 좀 너한테만 집중해.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그 시간에 공부 한 자 더하라고.”

    독설이었다. 뼈아픈 독설. 그래서 가슴 한편이 콱 찔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불안한 자신과 달리 당당하게 눈을 빛내는 가비가, 겸복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야, 야! 너 이 자식! 말을 그렇게, 막 그렇게….”

    뒤에 서 있던 오정이 겸복의 눈치를 보며 중얼중얼 댔다.

    주먹을 움켜쥔 겸복이 잇새로 내뱉었다.

    “…음궁. 내가 가도 상관없었어.”

    “그래?”

    봇짐을 싸던 가비가 겸복을 바라봤다.

    “그럼 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바꿔줘?”

    “…….”

    당장이라도 가서 실습자 명단을 바꿀 기세에, 겸복이 입술을 꾹 물었다.

    가비가 봇짐을 낚아채듯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맘에도 없는 소릴 해? 자존심을 지키려면, 지킬 수 있는 말만 해야 하는 거야.”

    겸복의 주먹 쥔 손이 부들거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너 위해준 척 한 적도 없고, 가식 떤 적도 없어. 환심 사려고 난리 친 적도 없고, 여기 만만하게 본 적도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갖는 그 열등감 좀 버려주라.”

    …열등감!

    겸복의 부릅뜬 눈가가 붉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비가 홱 방을 나가버렸다.

    가비가 사라진 걸 확인한 오정이 겸복의 곁으로 다가갔다.

    “겸복아, 너 괜찮아?”

    얄미운 놈이라서 한 방 먹이려고 했더니, 매번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었다.

    겸복이 피가 배어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말싸움으로도 안되고 몸싸움으로도 안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생긴 놈이 만능이었다.

    정말 녀석이 말한 것처럼 열등감일지도 몰랐다. 그렇다 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재수 없는 놈.”

    그때, 혼잣말로 속삭이던 겸복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가비의 서안에서 굴러떨어진 것이었다. 겸복이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웠다.

    “뭔데?”

    오정이 겸복의 어깨너머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놀란 눈을 치떴다.

    * * *

    현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인 천태비의 건강도 호전되었고, 수도에 출몰한다던 귀물들도 잠잠했다. 또 흉일인데도 불구하고 병증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이제 곧 자신의 반려를 만나게 될 거라는 별점이 나왔다.

    살면서 이처럼 여러모로 충족되는 기분을 느끼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모두 가졌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했고, 너무나 당연한 것에서는 쉽게 충만감이 들지 않는 법이었다.

    정말, 이것 때문인가? 병증이 돋지 않은 것이.

    우스운 생각인 걸 알면서도 현은 제 침상 맡에 있는 건강인형을 건드렸다.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고 엉성한, 비루하기 짝이 없는 물건.

    그런데도 이것이 마음에 드는 걸 보면 귀여운 그 아이, 가비 때문이다.

    “오늘 밤도 그 아이를 대령할까요.”

    그림자처럼 곁에 서 있던 장곡이 물었다. 장곡이 묻는 ‘그 아이’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아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현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되었다.”

    이틀 밤을 품고 나니 관심이 뚝 떨어져 버렸다. 애초에 관심이 있었나 싶었지만, 욕구를 풀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과 동그란 눈매.

    수줍어하던 몸짓이 제법 예뻤으나 더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욕구야 풀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었으니.

    허나 자신에게 간택을 받은 여인들은 그것을 집안의 경사로 알았다.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천자와 몸을 섞었으니 하늘이 내린 복을 받아 집안이 번성할 거라 믿었고, 실제로 태황궁에서도 많은 패물을 지급하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언감생심 천자의 옆자리인 천자비 자리를 노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오직 천녀인 천태비가 정한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자리였으니.

    그대가 각성하기만 하면, 내가 찾아갈 텐데.

    천태비만큼이나 존귀한 존재인 불로초.

    그녀가 각성하기만 하면 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대를 빨리 보았으면 좋겠어.

    현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천자님.”

    장곡이 나직이 아뢰었다.

    “지금 그 의학도가 서고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은갑이가?”

    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서둘러 한쪽으로 땋아 내리고 있던 머리를 풀었다.

    뜻을 알아챈 시종들이 튀어나와 의자에 앉아 있는 천자의 뒤로 갔다. 순식간에 머리가 틀어 올려지고 빛나는 상투관이 씌어 졌다.

    흠하나 없이 말끔해지고 나서야 현이 명경 속에 자신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아이는 내가 상투관 쓴 걸 좋아하는 것 같거든.”

    의자에서 일어나 양팔을 벌리고 서자, 입고 있던 옷이 벗겨지고 금세 다른 옷이 걸쳐졌다.

    수수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현이 곧장 처소 문을 열고 서고로 향했다.

    장곡을 비롯한 시종들이 알아서 오십 보 밖에서 그를 따랐다.

    뒷짐을 진 채 빠른 보폭으로 다리를 건너는 현을 보며 장곡은 생각했다.

    그 의학도를 왜 이리도 마음에 들어 하시는가.

    장곡은 현의 수족 같은 존재였지만, 천태비의 사람이기도 했다. 현 몰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다. 그것이 한 번도 양심에 걸린 적은 없었다.

    현은 이 나라의 천자이며, 천자는 곧 이 나라 자체를 의미했다. 허니 병증이 있는 그의 상태를 천녀인 천태비에게 보고하는 건 당연했다.

    허나 간만에 천자님께서 웃으시니.

    늘 평화롭고 온화한 분이었지만, 무언가를 보고 즐거워서 웃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해서 이 정도 일은 딱히 보고하여 넘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낱 의학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밤을 보낸 여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곧 사그라들 것을 알기에.

    서고로 들어가는 현을 보며 장곡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손을 들자 뒤따라 오던 시종들도 그 뒤로 멈췄다.

    당분간은 현이 사서인 척 구는 것에 동참할 생각이었다.

    현이 잠시나마 정사(政事)를 잊고 즐거워 웃을 수만 있다면 마다할 리 없는 연극이었다.

    현이 서고로 들어섰다. 그러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비가 몸을 일으켰다.

    “사서님!”

    반갑게 자신을 부르는 가비를 보며 현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은갑이 왔구나.”

    정말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정겨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보며 입을 활짝 열어 웃는 아이를 보자 이른 봄이 찾아온 것처럼 마음이 평안했다.

    “오늘도 상투관을 쓰셨네요?”

    가비가 제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 마음에 들면 줄까?”

    “아니요!”

    가비가 손사래를 쳤다.

    “전 쓸 일도 없고, 또 쓴다 해도 사서님처럼 귀티가 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귀티?”

    “거기에 부티까지.”

    “하-!”

    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 눈엔 내가 그리 보이나 보지?”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고 안으로 들어가 책장 사이를 누볐다.

    “사실 궁에서 사서로 일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아요?”

    “그렇, 지?”

    “사서님을 보면 집안도 좀 사시는 분 같고…,”

    “그리고?”

    “뭔가 되게 안정적인 삶을 사셨을 것 같아요.”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사실도 아니었다. 그는 사서가 아니었으니까.

    “혹 내가…,”

    현이 조금 망설이듯 물었다.

    “내가 네 말처럼 집안도 부유하고 부족할 것 없이 자란 사람이라면. 그럼 넌 내가 불편해질까?”

    그 말에 가비가 빤히 현을 쳐다봤다.

    “제가 왜요?”

    그리곤 활짝 웃었다.

    “바로 형님 삼아야죠. 그렇게 든든한 뒷배가 어딨다고.”

    “형님?”

    “네. 형님.”

    한껏 짓는 눈웃음에 현의 얼굴도 사르르 풀어져 버렸다.

    형님이라. 그것도 좋겠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란히 걷던 가비가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저번에 빌렸던 책, 다시 빌려 갈 수 있을까요?”

    현이 곧 책을 찾아내어 가비에게 주었다.

    “다시 보려고?”

    “네. 시간이 없어서 너무 대충 봤거든요.”

    가비가 잠시 자리에 서서 파라락- 책을 넘겨보았다.

    그 모습을 현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자란 머리카락이 이제는 목선에서 넘실거렸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에 꽂혔다. 가늘고, 하얗고, 보드라워 보였다.

    무슨….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는 것을 알고 퍼뜩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다시, 가비를 돌아보았다. 마침 고개를 든 가비와 눈이 마주쳤다.

    “약초도감을 보여줄까?”

    불현듯 몸으로 열이 올라 당황스러움에 성급히 물었다.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또 한참 눈길을 두었다. 간혹 무슨 말인가 물으면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곤 했는데, 현은 그게 참 좋았다.

    자신을 너무도 허물없이 대해주는 것이 예뻐서.

    그래. 예쁘다.

    소년티를 채 벗지 못했다고는 하나 약관을 맞은 사내였다. 그런 사내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너무도 기이하고 당혹스러웠다.

    “사서님?”

    말없이 서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가비가 동그란 눈으로 불렀다.

    “아, 그래. 따라오너라.”

    앞서 걷자 자박자박, 자신을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약초도감이 있는 책장 앞으로 데려가자 가비가 곰곰 하더니 세 번째 순서에 꽂혀 있는 책을 뽑았다. 그리고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깐이면 되는데.”

    “개의치 말고 편히 보거라.”

    “심심하지 않으실까요?”

    “설마.”

    자신을 신경 쓰는 것 같아 현도 아무 책이나 뽑아 그 옆에 앉았다.

    그제야 가비가 약초도감을 살피기 시작했다. 꼭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책의 맨 앞장과 뒷장을 먼저 살펴보더니 뒤늦게 내용을 뒤적였다.

    잠시 서로 입을 닫은 채 가비는 약초도감을, 현은 약초도감을 보는 가비를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자꾸 책에 눈이 안가고 가비를 힐끔거리게 되었다.

    “오늘도 실습을 나가겠구나.”

    혹여 방해가 될까 봐 넌지시 흘리듯이 말했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가비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현처럼 흘리듯이 답했다.

    “예. 나갑니다.”

    “어디로?”

    “음궁이요.”

    현이 멈칫, 가비를 바라봤다. 미간까지 좁히며 책을 살피는 가비는 그 눈길을 알지 못했다.

    음궁?

    분명 장곡에게 듣기로는 오늘부터 제가 있는 양궁으로 온다고 들었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도 음궁으로 나가지 않았느냐.”

    그제야 가비가 눈을 들어 현을 바라봤다.

    “이번에도 제가 가겠다고 지원했습니다.”

    “…어째서?”

    기대와 다른 소식에 말투가 조금 뾰족하게 나갔다. 눈치채지 못한 듯 가비가 웃었다.

    “그냥요. 전 음궁, 괜찮거든요.”

    “…….”

    가비의 시선은 다시 책으로 향했고, 현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장곡을 통해 접한 실습자 명단엔 분명 가비가 양궁에 오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허면 오늘 저녁에도, 어쩌면 밤까지도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럼 말해주려 했다.

    실은 내가 태황국의 천자라고.

    조만간 알게 될 사실을, 더는 숨기지 않고 스스로 밝히려 마음먹었다. 헌데 그것이 모두 틀어져 버렸다.

    그제야 현은 알았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던 건 다른 무엇보다도 이 아이를 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는 걸.

    그 하나가 무너지자 충만했던 기분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