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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17화 (17/95)
  • [17화]

    어슴푸레 새벽녘이 밝았다. 누운 자세 그대로 잠이 들었던 반소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덕분에 몸 상태는 어제보다 가뿐하고 좋았다.

    날 선 신경도 조금쯤 누그러진 것 같았다.

    가볍게 몸을 일으킨 반소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자리옷을 추릴 새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우뚝, 멈춰선 곳은 가비가 잠들어 있는 탁자 앞이었다.

    어느새 초롱불은 타다 꺼졌고, 밤새 방안을 메웠던 꽃향도 모두 타고 사그라든 참이었다.

    네 놈이, 맞구나.

    반소의 내리뜬 눈이 가비의 얼굴로 향했다. 흐트러진 마른 꽃잎들 사이로 엎어져 자고 있었다.

    그 숨소리가 무척이나 곤했다.

    역시 네 놈이었어.

    의심이 확신이 된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반소를 휘감았다.

    건방지고 괘씸한. 그래서 허물없이 자신을 대하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을 다시 보게 되면, 혹시라도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막연하게도.

    “적어도 뒤통수는 안 맞겠군.”

    반소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자신이 야왕이란 걸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뒤통수를 때리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고 죽여주십사 애원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쩐지 그리 뻔한 놈은 아닐 것만 같았다. 그 점이 반소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하여 경비대로 넘겨야겠다는 생각조차 사라져버렸다.

    기꺼운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반가운 것 같기도 했다. 우스웠지만 그랬다.

    허나 네 놈을 그냥 둘 순 없지.

    덕분에 귀물경비대의 환궁이 늦어졌었다.

    조금 골려볼까?

    짓궂은 생각과 달리 입술이 끝이 올라갔다.

    “두고 보자, 너.”

    반소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겨, 잠들어 있는 가비의 뺨을 건드렸다.

    “으음….”

    가비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 * *

    “…학도님?”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의학도님!”

    힘주어 부르는 호칭에 가비가 번쩍 눈을 떴다. 어떤 여자의 커다란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억!”

    깜짝 놀라 경기를 일으키자, 간밤 가비에게 도움을 주었던 시종관이 떨떠름한 얼굴로 몸을 바로 했다.

    “여, 여기가…,”

    가비가 입가를 훔치며 주위를 둘러봤다.

    맙소사….

    장소를 확인한 순간, 몸이 땅 밑으로 꺼지는 듯했다.

    잠이 들었어.

    그것도 반소가 있는 방에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가비가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침상 쪽을 돌아봤다. 텅 비어 있었다.

    “반…, 아니 야왕님은….”

    “벌써 나가셨지요. 새벽같이 수도를 정찰하시니까요.”

    그 말은…,

    가비가 불안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시종관이 안됐다는 얼굴로 가비를 바라봤다.

    간밤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혼절하듯 잠이 들었을까.

    안 그래도 무턱대고 찾아와서 향을 낼만한 것이 있는지 물을 때부터 짐작했다.

    의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 의학도가 야왕님께 단단히 밉보였음을.

    이럴 줄 알았으면 귀띔이라도 해줄 걸. 그분께는 그저 ‘예’라는 대답만이 살길임을.

    혹여 감정이 보일 수도 있으니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말해줄 걸 그랬다.

    시종관이 안타까운 얼굴로 선심을 쓰듯 말했다.

    “여긴 제가 정리할 테니 어서 가보십시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가비가 사색이 된 얼굴로 음궁을 나섰다.

    날 봤을까? …봤겠지?

    아니야. 못 봤을 거야.

    나한테 관심도 없었을 걸?

    학도당으로 향하는 내내 가비의 머릿속으로 상반된 생각이 오갔다.

    그래. 못 본 게 틀림없어.

    봤으면 날 가만뒀겠어?

    멱살잡이라도 했겠지.

    말 그대로 자신을 애먹이고 달아났으니 그냥 둘리 없었다.

    그 성질에. 말도 안 돼.

    아닐 거란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인 가비가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밥을 먹고 오전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은갑아!”

    그때 멀리서 연화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늘은 웬일인지 무리와 함께 있지 않고 혼자였다.

    “밤새 음궁은 괜찮았어? 별일 없었고?”

    간혹 거기서 일이 생기긴 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자마자 안부부터 묻는 걸 보면.

    “응. 그냥 뭐…. 그럭저럭.”

    가비가 대답을 얼버무리며 걸음을 옮겼다. 연화가 그 옆을 나란히 걸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았다.

    “날이 많이 풀린 것 같아. 그치?”

    “응. 그러네. 금세 봄이겠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비를, 연화가 수줍은 얼굴로 훔쳐봤다.

    “그나저나 그저께 받은 과제는 다 했어? 음궁 숙직실에 있으면 과제하기 힘들다던데.”

    실로 그랬다. 반소만 없으면 세상 편한 장소였지만, 어제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과제는커녕 잠 한숨 자기 어려워보였다.

    “난 받자마자 다 했어. 연화 넌?”

    “응. 난 어제…,”

    말하는 연화의 눈앞으로 포슬포슬한 꽃씨가 어른거렸다. 가비가 그것을 휘이- 손으로 날려주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고 연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가비가 얼른 한걸음 떨어졌다. 분위기가 어색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망설이던 가비가 걸음을 멈추고 연화를 돌아봤다.

    “연화야.”

    “응?”

    “잠깐 나랑 얘기 좀 할래?”

    “어? …그래.”

    연화가 순순히 가비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슬쩍 뒤를 한번 돌아봤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친구들이 힘내라는 손짓으로 연화를 응원하고 있었다.

    다과방 뒤편에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그 아래 가비와 연화가 서로를 마주 본 채 섰다.

    “저기 연화야. 너 혹시…….”

    나 좋아해?

    묻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건 설레발이어도 문제였고 아니어도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좋아해!”

    연화가 내지르듯 말했다.

    “나 너 좋아해, 은갑아.”

    설마설마했지만 역시나.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예상에 가비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건 아는데….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연화뿐이 아니었다. 가비의 등장은 여학생들에게 적잖은 파장을 안겼다. 의학도 중 잘난 사람이야 여럿 있었지만, 가비 같은 사내는 처음이었다.

    아무쪼록 사내라 하면 듬직하고 과묵한 것이 매력 아닌가. 허나 가비는 정반대였다.

    여인만큼이나 고운 얼굴에 하얀 피부.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몸은 듬직하기보다는 낭창낭창 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게다가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말투라니. 거기에 머리까지 좋아 어의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으니 눈길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이미 여학생들 사이에서 가비는 ‘의학도’가 아니라 ‘꽃학도’로 불릴 만큼 인기가 좋았다.

    가비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연화야, 나는…….”

    가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여자라는 걸 밝힐 수도 없고.

    “좋아 해줘서 고마워. 고마운데….”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하지. 머릿속으로 수많은 말들이 떠다녔다.

    “지금은 내가 마음에 여유가 없어.”

    결국, 통속적이지만 제일 무난한 핑곗거리가 튀어나왔다.

    “실은 아무에게도 말 못 했지만…, 우리 집이 생각보다 가난해. 상상 그 이상으로.”

    연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비가 짐짓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가장이고 딸린 동생들이 줄줄이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누굴 좋아할 수 있겠어.”

    “은갑아….”

    “내가 바라는 건 오직 어의가 되는 것뿐이야. 그때까지 사랑은 사치라고 생각해.”

    손발이 오글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비를 바라보는 연화의 눈이 촉촉해졌다.

    “미안해, 연화야.”

    연화를 속인 죄책감에 진심으로 사과했다.

    “우리 그냥 공부에만 전념하자. 오늘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정말 미안해.”

    말을 마친 가비가 잠시 시간을 두다 자리를 떠났다.

    “…….”

    우두커니 서 있던 연화가 가비가 사라진 자리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멋있어.”

    연화에겐 가슴 뛰는 첫사랑이었다.

    * * *

    그날 오후. 수업을 마친 가비가 학도당으로 향했다. 막 대문을 넘으려는데 내약방을 나오는 서문과 마주쳤다. 가비가 공손히 손을 모으며 묵례했다. 오랜만에 보는 서문은 여전히 온화한 얼굴이었다.

    “그래. 잘 지냈느냐? 공부하는 건 어렵지 않고?”

    종종 수업받는 걸 지켜봤기에 가비가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허나 서문은 내색하지 않고 가비의 의중을 물었다.

    “솔직히 재밌기도 하고 힘들기도 합니다.”

    가비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래도 주신 기회는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요. 시험에는 꼭 붙겠습니다.”

    처음엔 그저 숙식 제공이 목적일 뿐이었다. 허상이라 생각했던 약초들이 실존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효능을 내는지 배우는 일도 꽤 흥미롭고 즐거웠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에너지를 쏟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적당히. 저쪽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만 대충 때우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앉아 있는 의학도란 자리가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의궁에서 모든 혜택을 누리며 맘 편히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그것을 뜻밖의 행운으로 자신이 거머쥐었다고 생각하자 더는 적당히, 대충대충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에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자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 결심이 느껴졌는지, 서문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음을 확신하는 미소였다.

    “이번에 실습 장소로 음궁 약방을 지원했다지?”

    “예.”

    “소감은 어떠하냐. 야왕님의 성정이 만만치는 않을 터인데.”

    “그냥…, 할 만합니다.”

    이래저래 얼굴 보는 것만 피할 수 있으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을 좀 주무시면 과제도 편히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음. 야왕님의 불면증이 고질적이기는 하지.”

    “약방 일지를 보니까 수면초를 자주 드셨더라고요.”

    이미 알고 있는 듯 서문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한 뿌리를 달라고 하시는데 좀 난감했습니다.”

    “한 뿌리를?”

    천하장사 서너 명도 잠재울 수 있는 양이었다.

    “해서, 주었느냐.”

    “아니요. 그걸 어떻게 드립니까. 한 뿌리가 두 뿌리가 되고 세 뿌리가 될 텐데.”

    “그렇지.”

    “대신 꽃잎을 태워서 향을 내봤는데 효과는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꽃잎을 태워?”

    “예.”

    뜻밖의 말이었다. 꽃을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니.

    게다가 반소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방도를 찾은 것이 의외였다. 그런 경우는 서문이 아니면 없었다. 그 때문에 간혹 음궁의 주치의가 제게 와서 도와달라고 하소연을 하곤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서문은 이 아이가 너무도 기특했다.

    “듣자 하니 오늘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다던데.”

    그 말에 가비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예.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요.”

    사실 대부분의 실습이 저녁쯤 끝나기 때문에 다들 학도당으로 들어가서 과제를 시작하면 됐다. 허나 음궁의 약방을 지키는 일은 변수가 작용했다. 그 변수는 다름 아닌 반소였고.

    오늘도 불면증으로 가비를 불러대면 과제는 물 건너간 일이었다. 제발 그런 일이 없길 바랄 수밖에.

    “허면 오늘은 음궁 약방이 아니라 약제실에서 실습하거라.”

    “예?”

    가비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서문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중요한 과제인데, 적어도 그 시간이 공평하게는 주어져야지.”

    가비뿐만이 아니라 음궁 약방으로 가는 의학도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해줬겠지만, 서문의 속마음은 평소와 좀 달랐다.

    “그럼 음궁 약방은 누가……,”

    “늘 그렇듯 주치의가 있으면 될 일이다.”

    “와…!”

    가비가 저도 모르게 쾌재를 부르려다 입을 막았다. 멋쩍은 얼굴로 올려다보자, 서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감사합니다!”

    서문이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약제실로 가보아라.”

    “네!”

    가비가 우렁차게 인사하며 발길을 돌렸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무엇보다 반소를 안 봐도 된다는 확정된 사실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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