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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16화 (16/95)
  • [16화]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답은 하나였다.

    야왕이니까.

    여긴 음궁이고, 야왕의 침소였다. 야왕이 아닌 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통째로 넣으라는 말. 안 들리나?”

    두 번 말하는 게 귀찮다는 듯, 싸늘한 음성이 날아왔다.

    흠칫한 가비가 마른 침을 삼켰다.

    비스듬하게 돌아앉은 몸을 더 깊이 틀었다. 제 뒤통수만 보이도록.

    지금은 명찰을 떼어낼 수도, 면포로 얼굴을 가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불필요한 움직임은 수상쩍게 보일 테니까.

    “이봐, 너.”

    얼어붙은 듯 반응이 없는 가비를 보고, 반소가 몸을 일으켰다.

    그 기척에 가비의 손이 절구와 공이를 꼭 움켜쥐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침상에서 발을 내린 반소가 삐딱한 시선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사내치고는 퍽 마른 어깨. 마치 겁을 먹은 듯 보였다.

    하긴. 울며 겨자 먹기로 왔을 테니 무리도 아닐 테지만.

    허나 그런 녀석을 눈 뜨고 봐줄 만큼 반소는 자비롭지 않았다.

    “셋 셀 동안 대답해라. 아니면 네 놈 낯짝을 갈겨줄 테니.”

    반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

    “…….”

    “둘,”

    “…….”

    반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간혹 반인반귀를 경멸하는 자들이 있었다.

    제가 야왕이라는 칭호를 달고 천자의 형으로 있어도 감히, 그 불쾌함을 숨기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숨겨도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그 혐오감이 말투에서, 눈빛에서, 그리고 행동에서 배어나는 자들.

    그런 자를 반소는 천족에 대한 불경죄로 그냥 두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 태황궁에서 야왕으로, 귀물경비대의 수장으로 있는 한 그건 합당한 처벌이었다.

    결국, 눈앞에 이놈도 다르지 않겠지.

    “세…,”

    “이걸 다 넣으면…!”

    마지막 숫자를 외려던 찰나, 녀석이 다급하게 외쳤다.

    “부작용이 생깁니다.”

    가비가 여전히 돌아앉은 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먹으면 내성이 생기기도 하고요.”

    “해서, 안 하겠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입니다.”

    가비는 멋대로 움직이는 제 입을 때리고 싶었다. 그냥 넣어주면 될걸.

    그럼 이 이상 엮이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텐데.

    헌데 양심상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귀물의 땅에서는 생명에 위협을 느껴 수면초를 대량으로 사용하여 달아났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어쨌든 이자는 태황궁의 야왕이었고, 자신은 어의 시험을 준비하는 의학도였다.

    몸에 해가 되는 것을 저 편하고자 권할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무엇보다 사람의 건강을 돌보는 한의사로서 항시 바른말만 전했다.

    그것이 당장은 뼈아픈 말일지라도.

    “수면초가 불면증에 특효이긴 하나 그만큼 신중히 써야 합니다. 이렇게 뿌리째로 드시다 보면 내성이 빨리 찾아오고, 결국 부작용이 납니다. 심각해지면 환각초를 먹은 것처럼 헛것이 보일 수도 있고, 몽유병이 생길 수도 있고요.”

    긴장한 목소리였지만 자신의 의사를 또박또박 피력하고 있었다.

    의학도 주제에, 제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식의 유무가 아니라 자신을 상대로 다른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그랬다.

    서문 외에 처음이었다. 제게 입바른 말을 하는 자는.

    “아직 정식으로 어의가 되지도 않은 주제에 말이 많구나.”

    “아직 정식으로 어의가 되진 않았으나, 그걸 위해 공부하는 의학도니까요.”

    …하.

    제법 맹랑한 말투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갈색 눈동자.

    언제고 다시 보면 제 뒤통수를 칠 거라며 웃던 그 건방진 놈을.

    “…….”

    한동안 말이 없는 반소로 인해 가비의 긴장감은 배가 되었다.

    이렇게 돌아선 채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헌데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제가 누군지 알아본 순간 정말 얼굴부터 갈길 것 같아서.

    터벅터벅.

    그때 등 뒤로 느린 발소리가 들렸다. 바로 뒤까지 다가왔던 반소가 다시 멀어지는 소리였다.

    풀썩-

    침상으로 눕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공이와 절구를 움켜쥐고 있던 손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그런 가비에게서, 반소는 눈을 떼지 않았다.

    어둠에 또렷해진 시야로 가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보다 보니 의자에 오롯이 앉아 있는 그 형태가 눈에 익다.

    마치 본 적 있는 것처럼.

    “허면 어찌할 것이냐. 날 재울 방도를 내봐.”

    뜻밖의 과제였다. 가비가 서둘러 멈췄던 작업을 다시 했다. 다 빻은 수면초를 찻물에 타자,

    “그 정도론 어림없다.”

    반소가 느른한 말투로 내쏘았다.

    “네가 말한 그 내성은 벌써 생겼단 소리야. 그러니 한두 이파리 가지곤 날 재우지 못해.”

    입술을 깨문 가비가 동작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을 잠시만, 주시겠습니까?”

    “일각 주마.”

    가비가 침소를 나서서 약방으로 향했다. 봇짐에 들어있는 서책을 꺼내어 살피고 약초보관함을 열어 찬찬히 훑어봤다.

    생각지도 못했다. 만성인 불면증에 내성까지 생겼다니.

    보통 불면증은 환경적 요인이나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 누구나 일시적으로 겪을 수 있었지만, 이것이 만성으로 굳어졌다면 심리적 요인일 가능성이 컸다.

    가비는 자신의 경우를 떠올렸다.

    어릴 때 이유 없이 악몽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사람이 없는 차가운 땅에 홀로 버려져 무서운 동물들로부터 쫓기는 꿈이었다.

    꿈은 이상하리만치 똑같았고 한번 꾸면 일주일 이상을 꿨다.

    그럴 때마다 식은땀을 흠뻑 흘리며 우는 가비를 엄마는 따뜻한 품에 안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품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직접 만든 향초였다.

    심신 안정에 좋다는 향초를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정성껏 만들어서 가비의 방에 놓아주었다.

    ‘냄새 좋지, 가비야? 우리 애기 좋은 냄새 맡으면서 기분 좋게 잠들면, 무서운 동물들이 예쁜 동물들이 돼서 우리 애기랑 같이 놀거야.’

    엄마의 마음이 닿았던 건지, 그 후 가비는 꿈을 꾸지 않았다.

    꿈을 꾼다 해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엄마의 말처럼 사납던 동물들은 온순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비의 곁에 머리를 비비며 있을 뿐이었다.

    해보자.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가비가 서둘러 음궁의 시종관을 찾아갔다. 시종관은 곤히 자다 깨서 조금은 귀찮은 얼굴로 가비가 말하는 것을 찾아 내주었다.

    “헌데 이것으로 무얼 하려고요.”

    가비는 말없이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곧장 반소의 침소로 향했다.

    체감상 반소가 말한 일각이 다 돼가는 것 같았다.

    침소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어둑했다. 그나마 달빛이 깊어져 짙은 쪽빛을 띠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다행히도 반소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다만 한쪽 발을 까딱이는 것으로 보아 잠들지 않고 가비를 기다렸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가비가 숨을 고른 후 자리로 돌아갔다. 초롱불 아래서 가져온 것을 늘어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반소가 가는 눈을 떴다. 눈동자만 돌려 탁자 쪽을 보자, 무언가를 넣고 닿고 호롱에 올리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보면 볼수록 녀석과 겹쳐 보였다.

    꼭 샌님처럼 생겼을 것 같단 말이지.

    하지만 반소는 굳이 얼굴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일단 하는 양을 지켜보기로 했다. 대체 어떤 방도로 저를 재울지 궁금했다.

    치익-

    호롱으로 불이 올랐다. 이내 파스스슥- 무언가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눅진한 기름 냄새와 함께 묘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잠시 후. 기름 냄새마저 사라진 자리엔 향긋한 냄새만이 가득했다.

    향을 음미하던 반소가 무심결에 물었다.

    “무슨 향이냐.”

    “꽃향입니다.”

    “꽃향?”

    가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꽃도 풀도 제각각 향을 가지고 있거든요. 아무리 좋은 향도, 자연이 가진 본래의 향엔 못 미칩니다. 수면에도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제 경험상 잠든 후 악몽은 꾸지 않았어요.”

    사실 태황국에서 ‘꽃’과 ‘향’은 치료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저 치장하거나 장식하는 용도, 그도 아니면 사내들의 욕구를 동하게 하는 은밀한 목적으로만 쓰일 뿐이었다.

    헌데 그런 것을 가져와 태우다니. 반소로서는 낯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햇살이 눈부신 봄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코끝을 맴돌다 폐부로 들어가는 꽃향이 처음으로 싫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이…, 방안 가득 찼네요.”

    가비가 살짝 고개를 들며 나직이 말했다. 향을 피운 본인조차도 어딘가 나른해진 목소리였다.

    “그럼 이제 눈을 감으십시오.”

    달빛 아래 스치듯이 보이는 가비의 얼굴 형태를 반소가 가늘어진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잠이 온다…, 생각하시고요.”

    짐짓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깊은 밤.

    향기로운 냄새가 반소의 영혼을 잠식해갔다. 그리고 긴장을 풀어지게 했다.

    그제야 반소는 제가 잠자리에 누워서도 늘 긴장된 상태였다는 걸 알았다.

    “…….”

    이후 가비도 반소도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감싼 공기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반소가 가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가비를 담았다. 눈에 익은 뒷모습이, 그 형태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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