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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13화 (13/95)
  • [13화]

    서문이 천태비궁에 들었다. 시종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고 서문은 거침없이 침소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태어의 서문이 천태비님을 뵙습니다. ”

    천태비가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쌔액 쌔액-

    그저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을 뿐인데도 천태비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서문이 가까이 다가갔다.

    천태비가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바쁠 터인데 저 때문에 괜히 더 성가시게 되었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서문이 당치 않다는 듯 일축했다. 눈짓을 하자, 곁에 있던 시종이 천태비의 옷소매를 거두었다.

    그 모습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천태비를 보필하는 시종들은 그녀를 꼭 비단 인형 다루듯이 하였다.

    드러난 손목은 하얗고 깡말라 있었다. 퍼런 심줄이 돋은 자리에 서문의 손가락이 닿았다.

    숨조차 죽이고 진지하게 맥을 짚은 서문이 미간을 좁혔다.

    “속이 편치 않으십니까.”

    “조금요.”

    옆에 있던 시종이 결례인 줄 알면서도 말을 거들었다.

    “이틀 전부터 드신 것을 모두 게워내고 계십니다.”

    밝고 건강했던 천태비의 몸은 귀물의 습격과 낭군이었던 선대 천자의 죽음, 그리고 예기치 못한 회임과 출산 과정을 겪으며 망가져 버렸다.

    회복은커녕 더 나빠지거나 조금 나아지거나를 반복하며 지금껏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상이 있으면 재깍 보고하라 하였거늘.”

    서문이 짐짓 엄한 눈으로 시종들을 노려보았다.

    옷소매를 내린 천태비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재했다.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요. 괜찮습니다. 며칠 이러다 말 것을요.”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서문이 딱 잘라 말했다.

    “태황국의 모든 이가 천태비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르십니까? 혹여 심중을 어지럽히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손톱 색과 눈 밑을 보니 생각이 많으신 듯합니다.”

    천태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부챗살 같은 속눈썹이 빛을 잃은 눈동자를 깊게 드리웠다.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보다 못한 시종들이 한 마디씩 내놓았다.

    “야왕님께서 환궁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그러십니다.”

    역시나. 반소가 다른 때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도 마음이 쓰이십니까.”

    서문이 애처로운 얼굴로 천태비를 바라봤다.

    “그 아이도…, 제가 낳았는걸요.”

    반쪽짜리 천족 아이. 그 아이가 천태비에겐 못내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 불쌍한 아이를, 저도 현이도 감싸줄 수 없는 것이 안쓰러워요.”

    사악하고 사특한 귀물의 씨.

    그런 야왕까지 걱정하는 천태비를 보며 곁에 선 시종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사람의 마음자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자비로움.

    그 관대함이 태황국의 모두가 천태비를 추앙하고 경애하는 이유였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서로의 기운이 상극인 것을.”

    서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야왕께서도 이런 천태비님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실 테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아니요…. 그 아이는 모릅니다. 제가 그 아이를 마주할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고 두려워하니까요.”

    그날. 그 밤.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자신을 지키던 낭군이 눈앞에서 죽었을 때.

    그때의 충격은 제아무리 천태비라도 지울 수 없는 공포였다.

    그리고 이어진 수탈은 천태비의 남아있던 정신마저 탈곡해가는 행위였다.

    허나…, 그 고통 속에서도 떠오른 건 낭군이 제게 준 아기씨였다. 그 아기씨만이 무사하길 간절히 바랐다.

    혹여 그 속에 귀물의 씨가 함께 자라게 될 거란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 아이 입장에서는 어미도 형제도 없는 것과 매한가지겠지요.”

    천녀로 태어나 천자비가 되고 천태비가 될 때까지.

    그녀는 꺾이지 않는 꽃으로 태황궁을 지켰다.

    꿋꿋하게 견뎌내고 살아내어 어둠의 자식인 반소에게까지 마음 한 자락을 내어주고 있었다.

    서문은 그런 천태비야 말로 세상에 다시 없을 강인한 여인이란 생각을 했다.

    “자, 답이 없는 걱정은 그만하시고 제가 지어온 탕약부터 드시지요.”

    서문이 시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냉큼 탕약이 든 그릇을 대령했다.

    마치 죽은 피처럼 거무죽죽한 탕약에서는 늘 그렇듯이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다.

    시종들이 저도 모르게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릴 때도, 천태비는 그것을 순순히 들어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꿀떡꿀떡 삼켰다.

    “잘하셨습니다.”

    서문이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천태비가 입을 헹구자 시종들이 입가를 닦아주고 달큼한 사탕 하나를 입에 물렸다.

    “나흘간 꾸준히 올릴 테니 빼놓지 말고 드십시오.”

    “고마워요. 서문.”

    천태비가 다시 자리에 눕는 것을 본 서문이 궁을 나섰다.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밤이 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달이 기운 것도 아닌데 별이 지나치게 반짝였다.

    아마도 천태비가 말한 인간 불로초가 이 세상 어딘가에 나타나긴 한 모양이었다.

    * * *

    의궁에서 일하는 어의는 총 이십여 명에 달했다. 그중 ‘태어의’란 호칭을 달고 있는 건 서문뿐이었다.

    듣자 하니 서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출난 기운으로 약초의 효능을 더하거나 줄일 수가 있다고 하였다.

    태황국에서 그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실로 몇 되지 않았다. 사람에게도 급수가 있다면 가히 천족 다음이라 할 수 있었다.

    하여 서문은 태황궁에 있는 모든 어의에게 선망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 다들 일어나! 학도당 마당으로 집합!”

    깊은 밤. 옆방에서 옆방으로. 또 그 옆방에서 옆방으로 잠을 깨우는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도 사내들만 머무는 숙소에.

    단잠이 들어있던 가비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겸복과 오정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마친 참이었다.

    갑자기 뭐야.

    가비가 얼른 옷을 껴입으며 휘청이는 걸음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이미 앞서 나온 의학도로 가득했다. 마당 곳곳을 밝히는 초롱불. 그리고 그들 앞에 연차가 조금 있는 어의가 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정신을 차린 가비가 얼른 일렬종대 끝에 섰다.

    “이 녀석들! 너희가 그러고도 의학도라 할 수 있느냐!”

    호통이 떨어졌다.

    “감히 태황궁의 어의가 되어 태어의님의 제자로 살고 싶다는 자들이 좋고 싫은 일을 가리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조용히 눈만 굴렸다.

    “내 분명 음궁의 약방으로 숙직 갈 사람을 지원받는다 하였거늘, 어찌 이틀이 지나도록 나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가비가 옆에 선 겸복과 오정을 힐끗 봤다. 가비의 눈길을 받은 겸복과 오정이 시침을 뚝 떼며 눈을 피했다.

    이것들이 진짜….

    가비가 입술을 꾹 물었다. 가끔 어의들에게서 내려오는 공첩이 있는데 그걸 가비만 뺀 채 둘만 공유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음궁의 약방으로 숙직 갈 사람은 손들어라!”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서로 힐끔힐끔 눈치만 볼 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 추워….

    가비가 발가락을 꼼질댔다. 버선도 신지 못한 맨발로 나왔다. 차디찬 칼바람이 발등을 스쳤다.

    “어허! 이것들이 그래도!”

    마당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에 모두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선뜻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기 싫어서. 무서워서. 겁이 나서.

    달을 상징하는 어둠의 자식이 혹시라도 제게 불길한 기운이라도 묻힐까 봐.

    몰랐으면 모를까. 태황국에 대해 조금 알아본 터라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지원할게요!”

    가비가 번쩍, 손을 들었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가비에게 쏠렸다.

    “음궁 약방 숙직실, 제가 지원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 들어가자.

    가비가 차갑게 굳은 발가락을 오므리며 말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의학도들 사이로 어의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은갑이, 네가?”

    “예.”

    확실하게 대답하자, 그제야 어의의 얼굴이 한결 누그러졌다. 비어 있는 실습자 명단에 가비의 이름을 적어 넣으며 다시 한번 호통쳤다.

    “다들 은갑이를 본받아라! 어의가 되고 싶은 자들이 감히 분별심을 내다니. 그런 마음으로는 누구도 이번 시험에 붙지 못한다!”

    날 선 꾸지람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기가 죽었다.

    “해산하라!”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가비가 후다닥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온돌방의 온기가 기분 좋게 온몸을 데웠다.

    얼어붙은 발가락을 녹이는데 누군가 퍽, 가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가비가 이불 밖으로 눈을 내밀었다. 겸복과 오정이 가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또 한 번 걷어찰 기세라 가비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건방진 놈.”

    겸복이 화가 난 얼굴로 뇌까렸다.

    “너야말로 뭐냐?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데 매사 잘난 척이야?”

    반년이나 늦게 합류한 주제에 수업이고 평가시험이고 야무지게 척척척.

    모른 척 따돌리고 무시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흥흥흥.

    그런 녀석을 보고 여학생들은 멋있다고 꺅꺅꺅.

    정말 눈엣가시 같은 놈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야.”

    가비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겸복을 노려봤다.

    “그러는 너희야말로 한 번만 더 내려오는 공첩 공유 안 하기만 해봐.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가만있지 않으면. 네깟 놈이 뭘 어쩔 건데?”

    지켜보던 오정도 겸복 옆에 서서 가세했다.

    “네 놈이 태어의님을 믿고 까부는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

    “뭐?”

    “아니면. 이미 정원이 다 찬 어의 시험에 네가 어떻게 끼어드냐고!”

    어의 시험을 볼 수 있는 정원은 남자 스무 명과 여자 스무 명으로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헌데 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녀석이 갑자기 툭 끼어든 것이다.

    “아아, 이제 보니까 그게 불만이었어?”

    가비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희가 이러는 건 이해하는데 나도 사정이 있어서 온 거야.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 그대로 춥고 배고프고. 그러다 얼어 죽을까 봐 들어오게 된 곳이 궁이었다.

    “나도 공부하는 거 싫어. 삼 년 내내 코피 터져가며 공부했는데 난들 여기서 이러고 싶겠냐고!”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연고도 없는 땅에서 그걸 가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그리고 너희가 존경해 마지않는 태어의님. 그분이 누굴 편파적으로 봐줄 분이셔? 물론 내가 낙하산을 탄 것처럼 보이겠지.”

    그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솔직히 반년 늦게 들어온 내가 니들보다 잘하잖아. 그걸 알아보신 것뿐이야. 내가 여기 들어 올만 하니까 데리고 들어 오신 거라고. 그게 팩트야!”

    “팩, 뭐?”

    오정과 겸복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식은 꼭 알아먹지 못할 말을 지껄여!”

    그조차도 잘난 척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오정이 와락 덤벼들었다.

    멱살을 잡히기 전, 가비가 오정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잡았다.

    “아, 아악!”

    “야. 좀 조용히 지내자. 박힌 돌도 피곤하겠지만, 굴러온 돌도 피곤해. 굴러오고 싶어서 굴러온 게 아니라니까?”

    “너 이 자식! 그 팔 안 놔!”

    이번엔 겸복이 달려들었다. 가비가 재빨리 피하며 겸복의 정강이를 찼다.

    “아악!”

    겸복이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뛰었다. 가비가 붙들고 있던 오정의 팔을 내쳤다.

    휘청이던 오정이 겸복과 부딪치며 벌렁 나자빠졌다.

    한데 엉킨 둘을 보며 가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있지, 무시하고 투명인간 취급하는 건 상관없는데 나한테 손대지는 마. 나 그런 거 참아주는 캐릭터 아니야.”

    가비가 구겨진 옷소매를 탁탁, 잡아당기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불을 끌어 올리고 잠을 청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정과 겸복이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고르릉고르릉- 가비에게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미친놈이 아닐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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