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12화 (12/95)

[12화]

삼생을 돌아 한 번 태어난다는 천녀는 하늘의 뜻을 읽는 신성한 여인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 성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은 달이 숨은 밤, 별을 보고 하늘에서 내린 뜻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너무도 아름다운 천녀가 천자의 짝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둘 다 하늘이 내린 천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천자와 천녀는 서로의 반려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합이 태황국에 큰 축복을 가져다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기쁨도 잠시.

달도 별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 원인 모를 불안으로 밤잠을 설치던 그 밤.

경계를 넘어 잔혹한 귀물들이 태황궁에 침입했다. 궁 안에 있는 모든 경비대가 이를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천자는 살해당했고 천자비가 된 천녀는 귀물에게 범해졌다.

유례없는 참사였지만, 비극은 여기서 끊이지 않았다.

‘아…, 아아아악!’

습격당한 궁과 수도를 채 보수하기도 전에, 천자비의 배가 기이하게 부풀어 올랐다.

사건이 있기 보름 전, 천자비의 회임 소식이 있었다. 허나 거기에 귀물의 씨가 더해지고 만 것이다.

귀물의 씨는 인간의 것과 달랐다. 천자비의 몸을 숙주 삼아, 천자의 아이와 함께 무럭무럭 자랐다.

결단이 필요했다. 둘 다 죽일 것인지, 둘 다 살릴 것인지.

이미 쌍둥이처럼 얽혔기에 따로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살려야 한다.’

유난히도 별이 많던 밤.

별점으로 하늘의 뜻을 읽어내던 천자비가 눈물을 머금고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 아이는 태황국을 태평성대로 이끌 것이다. 허니 꼭, 낳아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럼 둘 다 낳은 후, 귀물의 자식만 죽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허나 천자비는 말했다.

‘귀물의 씨를 받았지만 나의 태를 빌어 자란 아이다.’

그건 반쪽이지만 천족의 피가 흐른다는 뜻이었다.

‘나를 범한 귀물의 기운이 너무도 사특하여 함부로 이 아이를 해하면 오히려 태황국에 큰 화가 미칠 것이야. 허니……,’

이 아이를 죽여 우리 손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스스로 사(死)해지는 운명에 맡겨야 해.

허나 그 어둡고 불길한 기운이 천자와 섞이지 않도록 항시 조심해야 한다.

어둡고 불길한 기운.

스스로…, 사해지는 운명.

누구 마음대로.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내가 선택해!

-번쩍!

반소가 눈을 떴다. 새까만 어둠이 사위를 잠식하고 있었다.

“…하아.”

거친 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눅눅한 적막이 온몸을 에워쌌다. 얼굴을 쓸어올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불순하고 불결한 귀물의 씨였지만, 고귀한 천녀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쳐지지 않았다.

차별이 존재할지라도 이곳 태황국에서 그를 함부로 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리 대하기 두렵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이 몸이 저주라도 내릴까 봐 무서운 거겠지.

열린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이제 막 노을을 내리고 있었다.

허나 이곳 음궁은 태황궁에서 해가 제일 늦게 뜨고 빨리 지는 자리라 일찍부터 컴컴했다.

저도 모르게 까무룩 졸았으니, 오늘은 밤새 잠을 자기 글렀다.

불면증은 반소를 괴롭히는 몇 안 되는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그런 자신을 수면초를 먹여 잠재운 게 바로 그 녀석이었다.

‘똑똑히 기억해. 언젠가 다시 보게 되면, 네 놈 뒤통수를 칠 테니까.’

생각만 해도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실소든 헛웃음이든, 꽤 오랫동안 반소를 웃게 하는 놈이었다.

* * *

“누가 내 얘기를 하나?”

걸어가던 가비가 귀를 후볐다. 이쪽 세계에서 제 얘기를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있었다. 자신을 흉보고 있을 같은 방 학우들 겸복과 오정.

겸복과 오정은 가비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아마도 가비를 견제하는 듯했다. 덕분에 다른 학우들까지 가비를 슬금슬금 피했다.

그렇다고 여학생들과 친하게 지내자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영 이상하고.

“아무튼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인간관계 때문에 피곤한 건 똑같네.”

혼자 중얼거리며 도착한 곳은 서고였다. 두어 번 와봤다고 이젠 꽤 익숙한 곳이 되었다.

“계세요?”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구에 있던 사서 현이 가비를 반겼다.

“왔느냐.”

나이는 가비보다 몇 살 많다 하였다. 가비는 현이 꼭 동네 오빠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사람이 살갑기도 했고.

“여기 빌려 간 책 잘 봤습니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책을 내밀던 가비가 ‘어!’ 하며 놀란 눈을 떴다.

“사서님 얼굴이…,”

깨끗했다. 흔적도 없이. 마치 거짓말처럼 피부병이 나아 있었다.

가비가 말을 잇지 못하자 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게 맨날 그런 것이 아니거든.”

“그래요?”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증이 발병할 때만 그러하다.”

어머니 천태비의 말에 따르면 여러 날 중 유독 음(陰)의 기운이 강한 날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형 반소와 같은 태를 타고났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그 병이 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는 인간 불로초를 찾아 반려로 들이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럼 이제 통증은 없으시겠네요?”

“통증이 있다는 걸 어찌 알았지?”

티를 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아이 앞에서는.

“가끔 사서님의 눈가가 움찔했거든요.”

가비가 제 왼쪽 눈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몸에 이상이 있으면 통증이 있는 건 당연하잖아요. 고생 많으셨겠어요.”

현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한번 발병하면 못해도 나흘 이상은 가던 병증이 이번엔 이틀 만에 사그라졌다.

그 사실이 이상하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제 본 얼굴을 가비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헌데 가비는 제 외모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병증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같은 눈빛이었다.

그것이 되레 마음 편하게 느껴졌다. 때론 칭송받는 제 외모가 병증에 대한 압박감을 높였다. 어쨌든 흉측한 몰골이 아무렇지 않다는 가비의 말은 정말이었다.

“해서 오늘은 어떤 책을 빌려 가려고?”

현이 가비와 발을 맞춰 걸으며 물었다.

“혹시 약초도감을 볼 수 있을까요?”

“약초도감?”

“예.”

혹시나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이어줄 만한 정보가 있을까 해서 찾는 책이었지만, 현은 가비가 어의 시험을 준비하고 있기에 찾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쪽으로.”

현이 안내하자 가비가 얼른 따랐다. 아니면 또 길을 잃을지도 몰랐다. 외부인의 출입을 엄히 통제하고 책의 도난을 막기 위해 주술이 쳐진 곳이라고 했다.

주술이라니.

듣고 나서도 귀를 의심했지만, 이미 이곳에서 길을 잃어본 가비로서는 믿지 않을 수 없는 얘기였다.

해서 서고를 돌아다닐 땐 꼭 현과 함께 다녀야만 했다.

“여기.”

현이 책장 하나를 가리키며 가비를 돌아봤다. 두 눈이 동그래진 가비가 저도 모르게 ‘허얼-’ 소리를 냈다.

“이게 다 약초도감이에요?”

커다란 책장 한쪽을 약초도감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게 다 몇 권이야.”

두어 달 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분량이었다. 대충 훑어본다 해도 족히 반년은 걸릴 양.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일단 달려보는 수밖에.

“후우….”

가비가 팔짱을 낀 채 눈앞에 있는 책들을 노려봤다. 그 모습이 꼭 공부하기 싫어서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제 막 약관을 넘겼다더니.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아이는 또래의 사내보다도 어려 보였다.

“약초도감은,”

현이 손가락으로 맨 뒤에 꽂혀 있는 책 몇 권을 가리켰다.

“이것만 보면 된다.”

가비가 ‘왜요?’라는 눈빛으로 현을 봤다.

“앞쪽에 있는 것들은 실패의 실패, 실수의 실수를 거듭한 기록본이니까.”

“아.”

정확하게 이 식물의 종류가 무언지. 약초로 쓸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쓸 수 있다면 이것이 과연 사람에게 좋은 건지 짐승에게 좋은 건지.

그 수많은 경험이 압축되어 지금의 약초도감 몇 권으로 거듭나 있었다.

하지만 가비가 필요로 하는 건 그 이상의 정보였다. 그것도 약초와는 상관없는.

“그럼 기록본은 빌려 갈 수 없어요? 그것도 궁금한데….”

가비가 슬쩍 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눈길이 참으로 곰살가웠다.

“이건 반출이 금지된 책이라 빌려줄 수가 없구나.”

오직 천족과 태황궁의 태어의인 서문만이 볼 수 있는 자료였다.

“아…. 그렇구나. 그럼 뭐….”

‘할 수 없죠’라는 말을 입안에서 사그라트리며 가비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안되는 걸 해주고 싶다는 별스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빌려달라고 사정한 것도 아닌데.

“허면 시간이 될 때마다 이곳에 와서 조금씩 보고 가는 건 어떨까.”

현이 물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보고 가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호기심으로 술렁술렁 넘겨보는 거야 무슨 문제가 될까. 가비는 모르겠지만 현으로서는 큰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이걸 빌미로 가비를 조금 더 자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래도…, 돼요?”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비가 활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시간 날 때마다 놀러 와서 보고 갈게요.”

“놀러 와?”

“책도 보러 오고 사서님도 보러 온다고요.”

현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을 보러 온다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그래. 언제라도 오너라. 저녁 무렵이면 더 좋고.”

“저도 저녁이 편해요. 낮에는 수업에 실습에, 정신없거든요.”

“힘들겠구나.”

“근데 좀 재밌기도 하고요.”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터졌다.

어쨌든 약초도감을 볼 수 있단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비가 책장 사이를 서성대며 다른 책들을 살폈다. 그 뒤를 현이 느린 걸음으로 따랐다.

책 한 권을 선택한 가비가 까치발을 들었다. 꽤 높은 곳에 있어 손이 닿지 않았다.

그러자 현이 다가와 뒤에서 팔을 뻗었다. 금백색의 머리카락이 가비의 뺨을 간질였다. 등 뒤로 온기가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움찔하자, 현이 의식하지 못한 듯 뽑은 책을 건네주었다.

“자.”

“감사합니다.”

“기한은 이틀 주마.”

“네. 늦지 않을게요.”

책을 빌린 가비가 서고를 나섰다. 꾸벅- 현을 향해 인사한 뒤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현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가비가 마음에 들었다. 똑똑한 듯하면서도 왠지 모를 무지함이 순수하게 느껴졌다.

아마 천족의 특징을 알고 있는 자였다면, 자신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깔만 보고도 그 신분을 짐작했을 것이다.

허나 일반 백성들은 평생 천자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건 태황궁에 들어온 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먼발치에서 보는 것이 전부일 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천자의 얼굴을 코앞에서 대면하기란 어려웠다.

허면 언제쯤 알게 될까.

이 서고가 보통 서고가 아니라, 천족의 서고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사서가 아닌 천자라는 것을.

언제가 되든 상관없었다. 가비가 이곳을 어찌 잘못 알고 들어왔는지도 중요치 않았다.

오랜만에, 아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을 천자나 병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대해주는 이를 만났다.

그 사실 만으로도 현은 이 만남이 퍽 유쾌하고 즐거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