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11화 (11/95)
  • [11화]

    흉흉한 일이 있었다는 전갈과 달리, 돌아온 수도는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자신의 존재가 뜻밖으로 느껴질 만큼.

    못해도 반년은 북쪽 땅에 가 있을 줄 알았던 무리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서인지, 성곽 문을 넘자마자 수도는 한바탕 소란이라도 난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그건 태황궁도 마찬가지였다.

    “너. 거기.”

    반소가 날 선 눈을 치뜨며 약초 보관함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옷자락을 가리켰다.

    흠칫하는 옷자락이 보였다. 안 그래도 좋지 못한 기분이 더 불쾌해졌다.

    “서문은 약초방 관리를 이따위로 하던가?”

    비틀린 입술 사이로 험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제가 아무리 이 나라의 흉조라 해도, 천태비의 태를 빌어 태어난 천족(天族)이었다.

    누구도 대놓고 하대하거나 무시할 수 없었다.

    “…자자, 잠시만요!”

    목소리를 낮게 깐 가비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리곤 상의에 붙어 있는 명찰을 떼어 감추고, 주머니에 손수건 대신 넣고 다니던 면포를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약초방의 담당자가 반소 앞에 섰다. 반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담당자는 반소의 눈을 피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냐 만은.

    “죄, 죄송합니다.”

    담당자가 재빨리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반소의 눈은 그 정수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눈빛이 따가운 것을 느꼈는지 담당자가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제가 지금 턱 주변으로 염(炎)이 심하게 돋아…,”

    면포로 얼굴을 가린 것에 대해 변명을 하는 듯했지만, 반소의 귀엔 딱히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태어의 서문에게 약초를 처방받아 조제실로 보내고, 준비된 약은 귀물경비대의 처소로 전하라.”

    귀물경비대?

    가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그 도적 떼 같아 보이던 놈들이 태황궁의 귀물경비대란 말이야?

    방금 스치듯이 책에서 보았다. 태황궁엔 총 세 종류의 경비대가 존재한다는 걸. 낮을 지키는 주경대와, 밤을 지키는 야경대.

    그리고 귀물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귀물경비대가 그것이었다.

    그럼 이놈이 귀물경비대의 대장…?

    가비가 저도 모르게 눈을 들어 반소를 바라봤다.

    “……!”

    눈이 마주쳤다. 사람을 뼛속까지 핥을 것만 같은 서슬 퍼런 회색 눈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예, 예…. 지금 바로 준비하여 태어의님께….”

    “너.”

    반소가 말을 끊었다.

    “뭐 하는 놈이야. 의학도가 맞아?”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가비의 귀를 서늘하게 훑었다. 가비가 침착하게 답했다.

    “맞습니다. 며칠 전 태어의님의 추천으로 의궁에 들어오게 된 의학도입니다.”

    반소의 눈이 느리게, 명찰이 달려 있어야 할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얼굴, 들어봐.”

    차가운 명령조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마른 침을 삼킨 가비가 천천히 고개를 들 때였다.

    “반소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태어의 서문이 들어왔다. 반소를 보고 반가운 기색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딱딱하던 반소의 얼굴도 일순 풀렸으나 서문처럼 살가운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아는지 서문은 개의치 않고 활짝 핀 얼굴로 말을 건넸다.

    “이삼일은 일찍 오실 것 같다더니 늦으셨습니다.”

    “어떤 맹랑하고 건방진 놈 하나가 애를 먹이는 바람에.”

    “반소님께 맹랑하고 건방져요? 그런 속없는 놈도 있답니까? 하하!”

    맹랑하고 건방지며…, 속없는 놈.

    분명 가비 자신을 말하는 거였다. 수면초만 아니었다면 이삼일은 일찍 태황궁에 도착했을 테니까.

    가비가 초조한 눈으로 두 사람을 힐끗댔다. 서문이 웃음을 사그라트리며 말했다.

    “천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반소의 얼굴이 다시금 무표정해졌다. 반소가 먼저 약초방을 나갔고, 그와 동시에 가비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포를 내렸다.

    그제야 가비를 바라본 서문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비에게 내밀었다.

    “여기 적힌 약초들을 조제실로 넘기고 준비된 약은…,”

    “귀물경비대로 보내겠습니다.”

    서문이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반소의 뒤를 따라 나갔다.

    쿵-

    약초방의 문이 닫히자, 가비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후우!”

    하마터면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가비가 축축한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지르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미쳤어. 왜 하필 여기서…,”

    세상은 넓고도 좁다더니. 그 말은 저쪽 세계뿐만 아니라 이쪽 세계에서도 통하는 말인가 싶었다.

    하필이면 궁에서, 그것도 저보다 신분이 높은 자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어쩌지….

    언제까지 얼굴을 감추며 숨어다닐 수는 없는 일.

    조만간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천자가 있는 양궁, 현의 거처는 반소의 등장으로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뜰을 관리하던 시종들도, 양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도.

    모두 반소가 지나가자 바짝 얼어붙은 얼굴로 눈을 떨구며 예를 갖추었다.

    어디에서도 근 반년 가까이 경계에 머문 이를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여전하군. 이 얼음장 같은 궁은.”

    “억측이십니다. 모두 반소님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그 입에 발린 소리도 여전하고.”

    “입에 발린 소리라니요. 요새 수도에 사건이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사건이 있어서 다들 불안할 테다. 귀신 같은 귀물들이 사람의 살가죽을 뜯어가고 있으니.

    허나 그렇다 해도 반소와 그 무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리 만무했다.

    소속이 태황궁에 있다 해도 반은 사람이고 반은 귀물인 그들이 환영받을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천자님- 야왕 반소님과 태어의 서문이 들었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장곡이 그들의 방문을 알렸다.

    반소가 힐끔 바라보자 장곡이 눈을 깔며 고개를 더욱 숙였다.

    반소의 입꼬리가 픽, 올라갔다. 이렇듯 뻔한 반응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경계에서 만난 ‘은갑’이라는 녀석이 떠오른 탓이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뻗대던 그 건방진 말투가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귓가를 맴돌았었다.

    “들라 하라.”

    짤막한 허락이 떨어지자 이내 처소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반소가 커다란 보폭으로 걸어가 접견실 중앙에 섰다.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자 천자 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소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눈을 들자, 늘 그렇듯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쪽에 마련된 탁자 위로는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현과 반소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고, 그 곁에 장곡과 서문이 섰다.

    “경계는 형님 덕분에 깨끗이 정돈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현이 반소의 찻잔에 따뜻한 찻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전갈에서 보셨듯이, 요새 그 사건이 수도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소는 말없이 차를 마실 뿐이었다. 현이 그런 반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머니의 한배를 타고난 자신의 쌍둥이 형제. 쌍둥이지만 그 외모부터가 남달랐다.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현의 얼굴과 달리, 반소는 남자답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거칠고 차가운 느낌이 강했다.

    뿐만 아니라 현은 금백색의 머리카락에 금안을 타고났지만, 반소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회색 눈을 타고났다.

    한 배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선대 천자의 씨와 귀물의 씨는 그 외모부터가 확연히 구분됐다.

    “하여 이번 일을 형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주경대와 야경대를 아울러 수도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태주세요.”

    “험한 일은 또 우리보고 앞장서라는 말씀이시군요.”

    반소가 곱씹듯이 뇌까렸다.

    곁에 있던 서문과 장곡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현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리 들으셨다면 송구합니다.”

    세상천지 둘도 없이 귀한 몸. 그런 천자가 늘 제 형님에겐 깎듯이 존대를 하고 예를 지켰다.

    그런 성정이 현과 반소를 더 극명하게 갈랐다. 사람들로 하여금 현을 더욱 추대하게 만들고 반소를 더욱 기피하게 만들었다.

    그마저도 반소에겐 별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천자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반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령이신데 당연히 따라야지요. 다만 귀물경비대의 녹봉은 두 배로 올려 주십시오.”

    반소가 유일하게 챙기는 것. 그건 자신을 따르는 귀물경비대뿐이었다.

    “그럼요. 노고가 큰데 그리해야지요.”

    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반소가 짧게 현을 향해 묵례했다.

    그가 접견실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종들이 튀어나와 반소가 머물렀던 의자와 탁자를 닦고 반소가 마셨던 찻잔을 급히 거두어 갔다.

    음의 기운이 결코, 천자 현에게 섞여서는 안 된다는 하늘의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하늘의 계시를 읽어내는 유일한 사람.

    어머니인 천태비를 만나러 반소는 곧장 천태비궁으로 향했다.

    서문이 따라붙으며 잔소리를 했다.

    “천자님께서는 반소님을 각별하게 생각하시는데 왜 그리 차게 대하십니까.”

    “태어날 때부터 글러 먹었으니 삐딱할 수밖에.”

    자신의 처지를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자조 섞인 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다만 냉소적일 뿐이었다. 그렇게 타고났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천태비님 건강은 어떠신가.”

    “고만고만하십니다. 괜찮으신 날은 간혹 산책도 하시고요.”

    천태비궁으로 이어진 뜰로 들어가자 화원을 가꾸고 있던 여시종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천태비궁에 남자들은 없었다. 마음이 여리다 못해 유약하게 변해버린 제 어머니는, 이십여 년 전의 사건 이후로 주치의 서문과 아들 현을 제외한 모든 남자를 두려워했다.

    그중 제일은 반소였다.

    “…야왕께서 오셨다고요.”

    침상에 누워있던 천태비가 반소의 방문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도착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기운이 없어 마중하지 못했습니다.”

    마른 몸과 자그마한 얼굴. 핏기없이 창백한 안색은 병약해 보였지만, 도저히 쌍둥이를 낳은 어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그래, 다친 곳은 없고요?”

    “없습니다. 천태비님이야말로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걱정해주어서 고마워요, 야왕.”

    의무적인 물음과 짤막한 대답만이 오갔다. 적어도 반소가 기억하는 둘 사이는 딱 여기까지였다.

    사건이 있었던 그 밤.

    붉은색이었던 천태비의 머리카락은 백발이 되어버렸다. 시력도 크게 떨어져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기민한 감각으로 사람과 사물을 구분할 뿐이었다.

    “허면 쉬시지요.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더 있다간 천태비님께서 혼절하실 것 같으니.”

    끝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자식을 무서워하는 어미라.

    기억하는 한 저 품에 단 한 번도 안겨본 적이 없었다.

    냉소적인 말과 차가운 눈빛에, 이불을 움켜쥔 천태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못 본 척 묵례를 한 뒤 돌아섰다.

    천태비궁을 나서자 밝은 햇살이 태황궁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오직 제 처소, 음궁을 제외하고.

    뒤에서 들리는 서문의 발소리에 차갑게 일갈했다.

    “따라오지 마라. 기분 더러우니까.”

    서문이 멈칫, 자리에서 멈춰 섰다. 섣불리 기분을 풀어주고자 나서는 것은 오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지 못한 자. 부모의 사랑을 한 톨도 받아보지 못한 자가 저 정도로 비뚤어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해서 저런 상태일 때의 반소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성큼성큼-

    반소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빌어먹을.

    갑자기 몰려온 갑갑증에 목이 죄었다. 옷깃을 뜯어내듯 거칠게 풀어헤친 반소가 음궁으로 향했다.

    햇살이 뜨겁고 불편한 것은 어둡고 차가운 제 태생 때문이리라.

    그늘진 음궁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저 멀리 귀물경비대가 처소 밖으로 나와 있었다.

    급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월도를 휘두르며 땀이라도 내지 않으면 이 기분을 풀 길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