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휴우…. 첫날부터 정신없네.”
서고를 빠져나온 가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현’이라고 소개한 사서는 잠시만 기다려보라는 말을 남기더니 여섯 권의 책을 가비에게 안겨주었다.
‘다른 이들보다 반년이나 뒤처졌는데 괜찮겠느냐?’
‘뭐, 해보는 수밖에요. 여기 있으려면.’
그 말이 사서에겐 갈 곳 없는 자의 간절한 바람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입구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가비에게 주었다.
‘이건…,’
‘힘내라고 주는 선물이다.’
글을 쓸 때 쓰는 붓이었다.
붓 선물이라….
저쪽 세계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꼭 필요한 도구였고 자신을 응원하는 사서의 마음이 담겨 있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근데 서고에서 책도 빌려 갈 수 있어요?’
그 말에 사서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원한다면.’
이라고 답했다.
‘그럼 종종 빌리러 올게요.’
‘그리하거라.’
이제 보니 사람이 참 다정하고 괜찮았다. 말투도 상냥하고.
날카롭게 굴었던 건 들키고 싶지 않은 저 얼굴 때문인 듯했다.
어쨌든 사서와 안면도 텄겠다, 앞으로 모르는 게 있으면 은근슬쩍 물어봐야지.
가비가 기분 좋게 학도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임시로 받은 거라 명찰이 없는데.
“누구한테 들었나?”
고개를 갸웃하다 걸음을 재촉했다. 알면 알수록 이상한 게 많은 곳이었다.
허구인 줄만 알았던 약초도감의 실재와 처음 보는 귀물들.
그들이 사는 북쪽 땅. 미로 같은 서고와 그런 서고를 지키는 기괴한 사서.
그리고-
반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맹수처럼 사납고 탄력 있게 뛰어오르던 야차 같은 사내를.
사람을 위압하는 짙은 회색 눈과 제 키만큼이나 크던 은회색의 반월도도 생각났다.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단단한 몸과 잘 벼린 칼날처럼 매섭던 눈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북풍한설처럼 느껴지던 그가 가비의 머릿속을 채웠다.
“…소름.”
어깨를 움츠리며 가비가 서둘러 의궁으로 들어섰다. 모든 건물은 어느새 소등된 상태였다.
서고 안을 헤매는 동안 밤이 되어 버렸다.
“저녁도 못 먹었는데….”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같은 방 학우인 겸복과 오정은 벌써 잠자리에 들어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 덮고 있었다.
가비가 배정받은 제 책상에 책과 붓을 올려놓고 이부자리를 펼쳤다.
어쨌든 성별이 다르니 조심해야 했다. 최대한 부딪치지 않게 그들과 떨어진 구석진 자리에 누웠다.
이세계에 온 후 처음으로 지붕 있는 곳에서 청하는 잠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앞으로의 일이 걱정스러웠지만, 툭 털어버리고 잠을 청했다.
배고픈 것도 잠시. 이내 가비는 깊은 잠에 들었다.
“…….”
오늘 하루가 곤했는지 고르릉 고르릉 가비의 코 고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잠든 줄 알았던 겸복과 오정이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부스스 일어난 그들이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바라봤다.
“저 자식 뭐야. 별일 없었나 봐. 책도 받아왔어.”
오정이 입술을 실룩대며 속삭였다.
“그러게. 제대로 찾아간 모양이네.”
겸복도 아쉽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아무튼 여러모로 눈엣가시 같은 자식이야.”
쑥덕대던 두 사람이 동시에 가비를 노려보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가비는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남장여자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가비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나서 목간을 사용했다.
문제는 화장실, 뒷간을 이용할 때였다. 늘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펴야 했다.
아니면 본의 아니게 남자들의 것을 보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지곤 했다.
그나마 달거리를 하지 않는다는 게 도움이라고나 할까? 정말 웃기지만 슬픈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여기 이 약초가 뭔지 아는 사람.”
선생의 질문에 가비를 비롯한 몇 명이 손을 들었다. 선생이 가비를 지목했다.
“은갑이 말해볼까?”
“검안초입니다.”
“효능은?”
“주로 눈에 염이 돋을 때 쓰는데, 좋은 약수와 달여서 식힌 후 눈에 넣으면 시력이 맑아지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맞다. 박수!”
선생의 말에 학당에 모여앉은 모든 의학도가 박수를 쳤다.
의궁에 들어와 수험생이 된 지 오늘로 나흘째. 지긋지긋한 고3에서 벗어나 졸업을 맞았는데 또다시 공부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공부가 꽤 흥미롭다는 거였다.
“자 그럼, 어제 배웠던 약초와 그 효능에 대해서 시험을 보도록 하겠다.”
의학도들의 입에서 탄성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비의 책상 위로 하얀 종이 한 장이 내려앉았다. 가비는 붓을 들자마자 어제 외웠던 것들을 적어 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비가 저쪽 세계에서 그토록 즐겨 보았던 약초도감이 이곳에서는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반년 늦게 시작한 수업도 금세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여기, 끝났습니다.”
가비가 제일 먼저 답안을 제출하고 나갔다. 남은 의학도들이 부럽다는 듯이 그 모습을 힐끔거렸다.
“자자, 눈 돌리지 말고!”
엄한 호통에 의학도들이 찔끔, 시험지로 다시 눈을 돌렸다.
수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광경을 학당 뒤편에서 지켜보던 서문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 * *
가비는 그 길로 의궁 안에 있는 약초방으로 향했다. 수업을 끝낸 의학도들은 곧장 실습에 들어가곤 했다.
그중 가비는 이 약초방에 기거하는 걸 제일 좋아했다. 의궁의 어의들을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을 진단하고 약초를 조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약초방에 있으면 개인적인 시간을 제일 많이 가질 수가 있었다.
“은갑아 안녕!”
지나가던 여학생 무리가 가비를 향해 알은 척을 했다.
“어, 안녕.”
가비가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받았다. 무리의 중심에는 연화가 있었다.
“수업 끝났어?”
“응. 너희도?”
“응. 그래서 지금 잠깐 다과방으로 가는 길이야. 같이 갈래?”
다과방은 의학도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 중 하나였다.
“아니. 난 약초방 가려고.”
“쉬는 시간도 없이 바로?”
“응.”
단지 약초방이 좋아서 가는 것뿐인데, 여학생들을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가비를 대단한 눈으로 바라봤다.
“너 진짜 열심히 한다.”
“열심이라기보다는 그냥…,”
말을 하던 가비가 연화의 머리에 붙어 있던 작은 약초 잎 하나를 떼어냈다.
“이거.”
“어머!”
연화가 수줍은 듯 볼을 붉혔다. 뒤에 서 있던 무리도 괜히 웃는 얼굴로 눈을 맞추기 바빴다.
이 반응 뭐지? 쎄한데…?
“그럼 난 이만. 나중에 보자.”
가비가 서둘러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학생들이 꺄르륵 거리며 수군댔다.
따가운 뒤통수를 긁적거린 가비가 얼른 약초방으로 들어갔다.
삐걱-
“음…. 좋은 냄새.”
문을 열자마자 알싸한 약초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이쪽 세계에서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였다.
익숙한 냄새를 마음껏 맡을 수 있다는 것.
약초방에 들어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운영했던 한의원이 생각났다.
가비는 서둘러 봇짐을 내리고 그 안에서 필기구를 꺼냈다.
며칠 전 사서 현이 주었던 붓은 딱 보아도 고급스럽기에 수업시간에는 들고 다니지 않았다.
“오늘 새로 들어온 약초는 뭐가 있나….”
매일 약초꾼들을 통해 새로운 약초가 이 약초방으로 들어왔다. 약초들은 보관 방법이 제각각 달랐다.
드넓은 약초방을 돌아다니며 가비가 약초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가비가 이 약초방의 책임자였다. 반출입되는 약초들을 꼼꼼히 기재하고 제출해야 했다. 이 또한 실무와 관련된 실습 중 하나였다.
눈 깜짝할 새에 일을 마친 가비가 약초 보관함 뒤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틀 전 서고에 가서 현에게 책 한 권을 빌렸다. 태황국의 역사를 알아보기엔 그 내용이 너무도 방대해 짧은 시간 습득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해서 적당한 것을 골라 속독하기로 마음먹었다.
막 책장을 넘기며 빽빽한 글씨들을 가볍게 훑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후다다닥- 사람들이 어딘가로 달려가는 것 같더니, 이내 웅성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누가 또 농땡이 치다가 걸렸구만.
간혹 하라는 실습은 안 하고 몰래 놀다가 걸리는 이들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하며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두었다.
빠르게 책장을 넘겨보던 가비가 잠시 눈을 떼고 생각을 정리했다.
짐작한 대로 태황국은 절대 군주 체제이며, 수도 ‘온’을 비롯해 총 8개의 지방 도시로 나뉘어 있었다. 각 도시는 천자가 보낸 ‘원(元)’이라는 직급의 사람들이 다스리고 있었고.
한 마디로 원은 천자의 아바타라는 거지.
이렇듯 천자의 힘이 막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태황국의 시초부터 전해진 신앙과도 같은 믿음 때문이었다.
태황국을 지탱하는 건 하늘의 피를 이어받은 천족이었다. 그들이 태황국의 실질적인 주인이었으며 권력자였다.
하여 태황국의 ‘천자’라는 호칭은 하늘의 아들을 뜻하는 것으로, 태황국의 국민은 밝은 ‘해’를 신성시하고, 어두운 ‘달’을 불길하게 여겼다.
그 불길한 기운이 뭉친 땅이 바로 내가 봤던 귀물의 땅, 북쪽인 거고.
낮과 밤. 음과 양. 빛과 그림자.
상반된 이 모든 것들이 신성과 불길로 나뉘어 점철된 곳이 바로 태황국이었다.
헌데 그렇게 천자만이 절대 군주로 군림하던 이곳에, 믿지 못할 사건이 생겼다.
야왕. 어둠의 자식이 태어난 것.
책에는 ‘천자’와 ‘야왕’이란 글씨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가비가 ‘야왕’이란 글자를 손가락으로 느리게 쓸었다.
찬란한 태양 뒤에 감추어진 깊은 어둠. 달. 상반된 운명을 타고난 형제.
가비는 어쩐 일인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야왕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닐 텐데.
태어날 때부터 이유도 없이 불길한 존재로 점찍힌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보면 호칭부터도 차별적이었다. 그들이 머무는 궁의 이름도 양궁과 음궁으로 그 뜻이 분명했고. 그뿐만 아니라……,
덜컹-
그때 약초방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묵직한 나무문을 가볍게 밀어젖힌 뒤, 뚜벅뚜벅 발소리를 냈다.
책을 덮은 가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말을 삼킨 가비가 재빨리 보관함 뒤로 몸을 숨겼다.
약초가 필요한 어의나, 그 어의의 심부름을 받은 의학도가 아니었다. 약초방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건가.”
들어본 적 있는 서늘한 목소리가 가비의 귓가를 울렸다. 숨을 죽인 가비가 힐끔, 보관함 앞을 훔쳐봤다.
맙소사…!
반소였다.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반소가 가비의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