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9화 (9/95)
  • [9화]

    “계세요?”

    가비가 입구에 서서 서고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계십니까?”

    하지만 몇 번을 불러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가비가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입구에서 머지않은 자리에 큼직한 책상이 놓여있었다. 보아하니 기가 막히게 좋은 자리였다.

    앞에는 너른 창이 있고 해가 들면 뜰에 있는 풍성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줄 것 같은.

    가비는 그 책상 주위를 서성댔다. 아마도 이곳이 사서의 자리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서는 오지 않았다.

    화장실을 갔나?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멈칫했다. 어둑한 서고 저 안쪽이 무척이나 궁금한 탓이었다.

    “잠깐 구경 좀 할게요.”

    가비가 혼잣말로 허락을 구한 뒤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가까이에서 본 서고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그 규모가 컸다.

    마치 거대한 도미노를 보는 것 같았다. 일정하게 서 있는 책장들 사이를 걸었다.

    빽빽하게 꽂힌 책들 사이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썼던 서재. 낡은 책에서 나는 오래된 종이 냄새였다.

    그 냄새를 맡으며 가비는 저도 모르게 추억에 빠졌다.

    새로운 한약재와 침술에 대해 논의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 곁에서 책을 읽고 있던 가비 자신. 그리고 간식을 들고 들어오던 엄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만큼은 박제된 기억처럼 가비의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아마 모두가 함께했던 마지막 모습이라 그런 거겠지.

    저도 모르게 추억을 곱씹으며 아련한 눈으로 책등을 어루만질 때였다.

    휘익-

    책장을 사이에 두고 무언가가 지나갔다. 가비가 옆을 돌아보았다. 책들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인가?

    천장이 높은 만큼 웃풍도 제법 있는 곳이었다. 간혹 서고 안을 밝히는 초롱불도 간간이 흔들렸다.

    조용히 서 있자, 후웅후웅-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현듯 어둑한 서고 안이 음침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져 얼른 자리를 옮겼다.

    태황국에 대해서 알아볼 만한 책은 없나?

    책장을 둘러보던 가비가 생각을 전환했다. 자유롭게 책을 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까지는 눈치껏 행동했지만, 이곳에 있으려면 기본 지식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문득 가비가 걸음을 멈추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빤히 쳐다봤다.

    이제 보니 글자 순으로 책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가비가 서둘러 다른 책장으로 향했다.

    원하는 글자를 찾자, 그 앞에 태황국에 관련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태황국의 역사. 태황국의 형성, 태황국의 귀물들, 태황국의 족보…. 족보?”

    모두가 공용으로 이용할 것 같은 서고에 태황국의 족보가 있다니. 의외였다.

    “제일 마지막 게 최근 거겠지?”

    손가락으로 족보를 쭉 훑어가던 가비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말이야. 정보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수많은 책 가운데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잇는, 그런 정보를 담은 책이 단 한 권도 없을까?

    뜬금없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저쪽 세계에서 수도 없이 펼쳐봤던 약초도감.

    생각해보면 허구라고 여겼던 그 책이 이곳에선 실존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반대로 이쪽 세계에도 저쪽 세계와 관련된 책 한 권 정도는 있지 않을까?

    저쪽 세계에 있는 약초도감이 선조의 전생으로 만들어진 책이라면, 이곳에도 그런 분이 있었던 건 아닐까.

    막연했지만 말이 영 안 되는 추측은 아니었다.

    또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지금으로선 그 가치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긴 태황국의 중심 태황궁이었다. 다른 어떤 곳보다도 모든 정보가 모여있을 터.

    그렇게 보면 궁에 들어온 게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약초도감이 여기에도 있겠지?

    약초로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곳이니 없을 리가 없었다.

    가비는 즉각 약초와 관련된 책장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어? 이 길이 아닌가?

    분명 방금 왔던 길을 그대로 나왔는데 길이 아니었다. 글자의 정렬된 순서를 따라왔는데 다시 본 글자는 배열이 엉망이 되어있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야!

    마치 책장이 뒤집히기라도 한 듯 뒤죽박죽이었다.

    당황한 가비가 책장 사이를 돌며 헤맸다. 하지만 그럴수록 길은 더 복잡하고 묘하게 꼬여만 갔다.

    “…말도 안 돼.”

    넋 나간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꼭 귀신에게 홀린 것만 같았다.

    “계세요!”

    큰소리로 외치자, 돌아오는 건 허공을 부딪친 제 목소리뿐이었다.

    입구를 찾을 수가 없어….

    머리를 감싼 가비가 제 자리를 맴돌았다.

    침착하자. 어쨌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니까 누구라도 올 거야. 사서라도 와야 하잖아.

    정신을 가다듬은 가비가 침착한 눈으로 서고 안을 다시금 둘러봤다.

    사다리. 사다리가 보였다. 아마도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는 용도인 것 같았다.

    가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다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당황스러워하면 할수록 길이 더 엉키는 기분이었다.

    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사다리가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마침내 손끝에 사다리가 닿자 한시름 놓였다. 올려다본 사다리는 천장에 닿을 듯 높게 뻗어 있었다.

    일단 높은 곳에서 살펴보면 서고 전체가 보이지 않을까?

    가비는 주저하지 않고 사다리를 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앞마당에 있는 나무에 자주 오르곤 했다.

    높은 곳이 그리 무섭진 않았다.

    마침내 책장 끝까지 올라가자 서고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워낙 넓어 눈에 다 담을 순 없지만 적어도 입구가 있는 곳까지는 보였다.

    가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완전, 미로잖아?

    마치 놀이동산에 있는 미로처럼 책장이 얼기설기 이어져 길을 내고 있었다.

    가비가 숨을 고르고 제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입구까지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 길이 되는 통로를 연결해 입구까지 이은 다음 그 길을 되뇌었다. 무언가를 보고 외우는 건 자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있는데, 맞은편 책장 너머로 누군가가 보였다. 어둑해서 형체만 보였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저기요!”

    커다랗게 외치자, 검은 그림자가 가비 쪽을 돌아봤다.

    “여기예요, 여기!”

    누군가를 찾았다는 기쁨에 가비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제가 지금 입구로 나가는 길을 못 찾고 있어요!”

    하지만 상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더니 이내 휙 사라져버렸다.

    “자, 잠시만요!”

    가비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여기 사람 있다고요!”

    발을 동동 구르며 사라진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어…, 어어!”

    사다리가 기우뚱,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악!”

    옆으로 쓰러지는 사다리와 그대로 추락했다.

    -쿠당탕!

    사다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과 동시에 가비가 누군가의 품으로 떨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누군가가 가비를 받아낸 것이었다.

    우당탕-

    책 몇 권이 그들과 함께 나뒹굴었다. 가비가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아찔했던 순간이 떠올라 몸이 떨렸다.

    “하아…,”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데, 손바닥 아래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가비는 자신이 누군가를 올라타고 있다는 걸 알았다.

    “…헉!”

    뒤로 급히 몸을 물리자 가비를 구해낸 남자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백색의 아름다운 머리였다.

    그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가비의 시선으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으, 으악!”

    가비가 경기를 일으키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의 얼굴은 기괴했다.

    어깨 한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 담긴 얼굴은 흉측한 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먹물을 잘못 입힌 듯, 도색을 잘못한 도자기와 같았다.

    얼룩덜룩한 남자의 얼굴에 놀란 것도 잠시. 가비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어쨌든 사람이었다. 귀물도 본 마당에 피부색이 좀 이상한 사람쯤이야. 겁먹을 필요 없었다.

    하물며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아닌가.

    “저기 그러니까….”

    가비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마주 선 남자의 키가 생각보다 컸다.

    “사서님…, 맞죠?”

    사서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만큼 남자는 이곳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저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의학도입니다. 책을 받으러 왔습니다.”

    차분히 말을 트기 시작하자 놀란 가슴이 서서히 진정됐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어요. 사서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말 그대로 골로 갈 뻔했다. 그도 아니면 팔다리 중 하나가 부러졌거나.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입구까지 바래다주실 수 있을까요?”

    “…….”

    “잠깐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길을 잃어서요.”

    서고에서 길을 잃었다는 게 웃겼지만 사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상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쪽 세계는.

    잠자코 말을 듣던 남자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괜찮은 척을 하는 것이냐.”

    남자가 딱, 손가락을 튕기자 머리 맡에 있던 초롱불이 밝아졌다.

    마치 마술을 보는 듯해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쏠렸다가 다시 내려왔다.

    가비는 숨을 멈췄다.

    남자의 금색 눈동자가 가비를 직시하고 있었다. 호흡하는 것도 잊을 만큼, 남자는 아름다웠다.

    피부색만 아니라면 오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깊이 가라앉은 남자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그 이유를 가비는 금세 눈치챘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가면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이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가비가 재빨리 가면을 주워 남자에게 내밀었다.

    “하.”

    남자가 조소를 흘리며 가비가 들고 있는 가면을 날카롭게 쳐냈다.

    “이미 봐놓고 못 본 척을 하겠다?”

    남자의 까칠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듯했다.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잖아요.”

    “뭐?”

    “놀란 건 맞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괜찮은 척이 아니라 정말 괜찮다고요. 이렇게 보고 있어도.”

    가비가 남자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리 보니 안타까웠다. 세상에 둘도 없을 미남자의 얼굴에 새겨진 낙인이라니.

    가면을 쳐낼 때의 손등도 색이 그러했다. 알 수 없는 희귀병이라도 있는 걸까.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가면을 쓰고 다니는 남자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믿고 안 믿고는 사서님 마음이죠.”

    가비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아는 아이도 사서님처럼 생겼어요.”

    가비는 저쪽 세계에 있던 고양이 점박이를 떠올렸다.

    “갈색 무늬가 얼마나 예뻤는데요.”

    점박이와 다른 동물들을 떠올리는 가비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그러니까 전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요. 사서님 얼굴이.”

    가비가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다시 주워 올려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 번씩 발병하는 병증이 괴로운 건, 타는 듯한 통증이 아니었다.

    그걸 숨겨야만 하는 자괴감이었다.

    헌데 눈앞에 녀석은 아무렇지 않다는 그 말을 증명하듯 제 얼굴을, 눈을, 빤히 쳐다봤다.

    남자는 따뜻해 보이는 그 갈색 눈이 썩 나쁘지 않았다.

    “갈색 무늬가 예쁘다는 그 아이는, 어디 사는 누구더냐.”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가비가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는 곳에 두고 온 고양이요.”

    “고…,”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가비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웃음을 그친 남자가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네 이름이, 은갑이라 하였지?”

    “예. 사서님 이름은요?”

    남자가 방금과 상반된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내 이름은 현이다.”

    태황국의 천자, 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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