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8화 (8/95)

[8화]

의궁은 어의들이 머무는 숙소인 ‘명의당’과 실질적으로 궁 안의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살피는 ‘내약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중 뜰 제일 안쪽에 있는 ‘학도당’이 이번 어의 시험을 준비하는 의학도들이 머무는 숙소였다.

가비는 학도당에 있는 방 하나로 안내받았다.

드륵-

문을 열자 제법 널찍한 정사각형의 방이 나왔다.

좌식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던 의학도 두 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나란히 섰다.

“지금부터 함께 방을 쓰실 분입니다.”

여시종의 단아하고도 단출한 설명에 수험생 두 명이 짧게 고개를 수그렸다.

“자, 그럼 인사들 나누시고 짐을 푸시지요. 목간은 복도 끝에 있습니다.”

“아, 예.”

가비가 방을 안내해준 여시종에게 인사를 건넸다.

몸에 두르고 있던 모포가 펄럭거리자 여시종이 저도 모르게 코를 막다가 성급히 떼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가비가 방으로 성큼 들어서며 방안을 둘러봤다.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좌식 책상과 방 모서리에 두툼하게 잘 개어져 있는 이불 세 채가 보였다.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사내들이 머무는 숙소로 안내받았고, 여인들이 머무는 숙소는 여기와 반대편에 있다고 했다.

남자들과 한 방이라니.

이곳에서 남자로 살아갈 것에 대해 초연한 마음으로 의학도 두 명을 돌아봤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학도당에 있는 대부분이 또래라는 것이었다.

“반가워. 내 이름은 은가비야. 듣자 하니 나랑 동갑이라던데.”

사내 두 명이 서로 눈을 맞추더니 가비를 쌩하니 모른 척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 지금 쌩까는 거야?

심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여시종이 주었던 옷부터 챙겨 들었다.

“야, 겸복아. 어디서 똥구렁내 안 나냐? 아무래도 방에 똥이 굴러들어온 모양인데.”

“그러게 말이야. 냄새 한 번 역겹네. 난 그렇다 쳐도 오정이 넌 비위도 약한데.”

자신을 두고 하는 말에, 가비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헐.

가비가 썩은 미소를 입에 물며 목간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한방 학우들과 친해질 생각은 일찍부터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 * *

그러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말끝마다 ‘요’ ‘오’ ‘다’ ‘나’ ‘까’ 만 잘 붙여도 보다 자연스러운 말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서문의 말처럼 가비는 눈썰미도 좋고 눈치도 빠른 편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쪽 세계에 적응하고 있었다.

속으로 ‘요, 오, 다, 나, 까’를 되새기고 있는데, 저만치서 서문이 걸어왔다.

의궁에서 명의당이 아니라 단독으로 지어진 기와집. 그곳이 서문의 거처였다.

“새삼 이리 보니 인물이 아주 훤하구나.”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릴 때까지 씻고 옷도 말끔하게 갈아입었더니 세상 살 것 같았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가비가 서문을 향해 활짝 웃었다.

“적어도 똥구렁내는 안 나겠죠?”

“하하.”

같은 방 학우들이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자 서문이 웃음을 터트렸다.

“참, 아직까지 내가 네게 묻지 않은 것이 있더구나.”

“은가비입니다. 제 이름.”

마치 무얼 물을지 알았다는 듯이 대답하자, 서문의 미소가 깊어졌다.

서문은 가비가 썩 마음에 들었다. 영민하고 밝은 기운을 가진 아이였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 그럼 천자님을 뵈러 가보자.”

가비가 서문의 뒤를 따랐다.

천자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궁과 궁을 잇는 뜰과 연못, 그리고 다리를 몇 개씩 건너면서 가비는 태황국에 있는 모든 것이 천자의 것임을 알았다. 실로 절대 군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자님을 뵈러 왔네.”

마침내 당도한 양궁 앞에서 서문이 문지기들을 향해 말했다.

서문을 알아본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고 궁의 대문을 넘자마자 장곡이 나와 그들을 맞았다.

태황궁에는 각 궁마다 시종들을 관리하는 시종관이 있었고, 장곡은 그 시종관들을 다스리는 시종장이었다.

한마디로 시종들의 제일 웃어른으로서 천자의 수족과도 같았다.

지긋한 나이에도 그는 꼿꼿한 자세로 예를 갖추며 그들을 천자의 거처로 안내했다.

“헌데 서문님. 오늘은 흉일이라 천자님의 얼굴은 뵐 수가 없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래? 오늘이 흉일이었던가?”

장곡의 말을 들은 서문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 전 천태비님께서 별점을 보셨다고 하더니 점괘가 그리 나왔나 보군.”

“예.”

무슨 말인가 싶어 가비가 갸우뚱하자 서문이 작게 속삭였다.

“간혹 천녀이신 천태비님의 점괘에 따라 천자님께서 얼굴을 숨기실 때가 있네.”

천녀? 점괘? 뭐 미신이나 신앙 같은 그런 건가?

서문이 한 말을 곱씹는 사이, 금빛으로 수놓아진 문 앞에 당도했다.

“천자님. 태어의 서문이 들었습니다.”

“들라 하라.”

장곡이 알리자,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중저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내 묵직한 문이 열리며 시종들이 물러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가비는 고개를 숙이고 서문을 따라 들어갔다.

쿵-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알을 굴려 천자의 거처를 살폈다. 양쪽으로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태어의 서문, 천자님을 뵙습니다.”

서문이 잘 닦인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가비도 얼른 그를 따라 엎드렸다.

“그래. 서문. 오랜만에 보는구나.”

“예. 수도에 있는 약초방을 순방하느라 스무날 만에 뵙습니다.”

“듣자 하니 장터에서 자네를 사칭하는 자를 잡았다고?”

“예. 경비대에 넘겼으니 합당한 처벌을 주시면 추후 이런 일을 방지할 수 있을 듯합니다.”

서문과 천자는 꽤 가까워 보였다. 서로 격식은 갖추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어투가 정다웠다.

“그자는 네가 장터에서 데려왔다지?”

천자의 시선이 서문 바로 뒤에 있는 가비에게 향했다. 몰래 마른 입술을 적신 가비가 조용히 숨을 죽였다.

“예. 장터에서 저를 사칭하는 사내를 저보다 먼저 알아본 자입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알쏭달쏭한 얼굴로 미간을 좁히는데 서문의 말이 이어졌다.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그자를 잡아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장터야 원래 시끌벅적한 법. 적당한 소란이었다면 그냥 지나갔을 텐데, 야무지게 따지고 드는 가비의 목소리가 서문의 발길을 멈춰 세운 것이었다.

“집 없이 떠도는 신세이긴 하나 약초꾼이었던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약초에 대한 지식을 해박하게 익힌 자입니다. 하여 제가 어의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의학도로 추천하고자 하는데, 이에 대해 천자님께서 허락해 주시길 간곡히 청 드립니다.”

서문의 말투엔 가비에 대한 확신과 기대감이 있었다.

심히 부담스러웠지만 이를 통해 서문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얼마나 신뢰받는 자인지를.

사실을 증명하듯 천자가 흔쾌히 답했다.

“가난하지만 똑똑한 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서문 자네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가비 같은 사람이 더러 있다는 소리였다.

“허나 그것 또한 흔한 일은 아니지. 서문 자네가 보기보다 까탈스러운 성격이거든.”

“까탈이라니요. 농으로 듣겠습니다.”

짧은 웃음 끝에 천자가 가비를 향해 물었다.

“까탈스러운 서문의 선택을 받은 자네. 자네의 이름이 무언가.”

그제야 가비는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펼쳐진 검은색의 가림막.

사람의 인형(人形)만 간신히 비치는 그 뒤에 태황국의 천자가 앉아 있었다.

얼굴을 숨긴다는 게 저런 의미구나.

막상 가림막 뒤에 숨어 있는 천자를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은가비입니다.”

“그래. 좋은 이름이구나.”

천자의 목소리에 설핏 웃음이 어렸다.

“서문 자네가 데려온 자이니 내 허락이 무슨 소용이 있나. 아무쪼록 자네 밑에서 훌륭한 인재로 거듭나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천자님.”

“이만 돌아가 쉬도록 하라. 나도 그만 일을 봐야겠으니.”

“예.”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조아린 뒤 빠르게 천자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양궁을 벗어나자마자 가비가 긴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왕이든 천자든 사람인 건 분명한데, 그 신분이 주는 위엄이라는 게 있었다.

서문이 사람 좋은 얼굴로 가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반년 전부터 들어와서 공부를 시작했으니 그것을 따라잡으려면 만만치 않을 걸세. 자네까지 포함해서 사내는 스물한 명, 여인은 스무 명이 이번 어의 시험을 보게 될 것이야. 모두 영리한 친구들이니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공부하게.”

그 말을 끝으로 서문은 의궁에 있는 내약방으로 들어갔다. 가비도 터덜터덜 학도당으로 향했다.

드륵-

방문을 열자 겸복과 오정이 가비를 힐끔 보더니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돕고 의지하긴 개뿔.

머리를 긁적인 가비가 들어올 때 시종에게서 받았던 보따리 하나를 풀었다.

그 속에는 앞으로 입어야 할 옷과 신발, 공부할 필기구 등이 들어 있었다.

상의를 펼쳐본 가비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상의 왼쪽 가슴팍에 달린 제 명찰 때문이었다.

[ 은갑 ]

이름이 ‘은가비’가 아니라 ‘은갑’이로 새겨져 있었다.

하긴. 자신을 남자로 보았으니 발음이 저렇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사내 이름으로는 이게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어쨌든 알아서 신분세탁이 되었으니 나쁠 것은 없었다.

가비가 옷을 정리해 제 이름이 붙어 있는 서랍장에 넣었다.

“저기.”

가비가 겸복과 오정에게 말을 걸었다.

“공부할 책은 서고에 가서 사서에게 받아오라던데. 서고가 어딨어?”

그 말에 겸복과 오정이 짧게 눈을 맞췄다.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겸복이 답을 했다.

“의궁을 나가자마자 왼쪽으로 돌아서 다리 하나를 건너. 뜰 두 개를 지나면 팔각정이 나올 거야. 거기서 쭉 직진. 해 문양이 새겨진 건물이 하나 있어. 거기가 서고다.”

“어. 땡큐.”

“뭐?”

“고맙다고.”

의궁을 나선 가비가 서고로 향했다. 겸복이 알려준 방향대로 길을 찾았고, 마침내 해 문양이 새겨진 건물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지나가는 여시종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반소님이 돌아오신다며?”

“뭐? 이렇게 일찍? 아직 환궁하시려면 몇 개월 남았잖아.”

“천자님께서 전갈을 보내신 모양이야. 수도에 귀물이 출몰한다잖아.”

“맞아. 저번에도 아이 한 명이 당했대.”

“으, 끔찍해라.”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시종들을 가비가 돌아봤다.

반소? 지금 반소라고 한 거야?

확실하지 않았다.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고.

그걸 증명하듯 시종들이 밝은 얼굴로 꺄르륵 거리며 사라졌다.

설마. 잘못 들었겠지.

잘못 들은 것이어야 했다. 녀석을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누군가가 뒤통수를 잡아채는 듯한 기분에, 가비가 서둘러 서고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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