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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7화 (7/95)
  • [7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니면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은영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이 한참 육체적인 성장기를 겪을 때 가비 혼자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그렇다고 변화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또래보다 키는 큰 편이었고 몸도 유려한 곡선을 갖기 시작했으니까.

    단 거기까지였다.

    쭉 뻗은 팔다리와 군살 없는 몸은 비율이 좋아 스타일리시했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여성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도 밋밋한 브라 톱 하나로 커버가 될 만큼 작았고.

    그 덕분인지. 여기 이세계, 태황국에서는 누구도 가비를 여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태황궁의 태어의라는 서문도 마찬가지였다.

    “열이 나서 괴로운 자에게 해열초랍시고 온열초를 달여 먹였으니 탈이 날 수밖에.”

    낡은 집. 좁은 방. 가비와 함께 소년의 집을 찾은 서문이 소년의 어머니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안색을 보니까 약만 잘 처방 받으면 금방 낫겠는데요?”

    가비가 빼꼼, 서문의 어깨너머로 소년의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그 바람에 바로 지척에서 서문과 눈이 마주쳤다.

    가비가 얼굴을 물리자, 서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눈썰미도 제법이고.”

    서문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렸다.

    “넌 어디 사는 누구냐. 나이는 어찌 되고.”

    “보시다시피 집 없이 떠도는 신세고, 나이는 약관입니다만.”

    반소에게 들었던 ‘약관’이란 단어를 써먹자, 서문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목소리가 가늘어 키만 큰 소년인 줄 알았더니.”

    목소리가 가늘다는 말에 가비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어쨌든 여기 태황국에 머물려면 여자보다는 남자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특히 외양만으로 남녀 구분이 확실한 이런 보수적인 곳에서는 남자인 게 여러모로 편하고 유리할 테니까.

    서문의 말처럼 목소리가 얇은 편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하이톤도 아니니 적당히 감출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흠흠. 얘는 괜찮나?”

    가비가 괜스레 헛기침하며 음성을 한껏 낮췄다.

    은근슬쩍 집 밖으로 내빼자,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소년이 보였다.

    소년의 눈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어룽져 있었다.

    “야.”

    내뱉듯이 툭 부르자, 소년이 가비를 돌아봤다. 그 눈엔 두려움이 그득했다. 혹시라도 제 어미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가비가 소년 옆에 털썩 앉자 소년이 슬금 옆으로 물러났다.

    “어쭈. 이 녀석 봐라? 은인한테.”

    가비가 보란 듯이 바짝 붙어 앉자 소년이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막았다.

    가비가 제 옷소매를 킁킁거리더니 해탈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봤다.

    “너도 그런데 난 오죽하겠냐? 나도 좀 씻고 싶다.”

    그 말에 소년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비도 씨익 웃었다.

    “이름이 뭐야?”

    “윤이요.”

    “어머니는 괜찮아.”

    윤이 둥그런 눈으로 가비를 올려다봤다.

    “약만 잘 처방받으면 열도 떨어지고 기력도 웬만큼 회복하실 거야. 살펴보니 손에 상처가 있던데.”

    “열흘 전쯤에 밭일하시다가 다치셨어요.”

    “아마 그게 곪아서 탈이 난 모양이야.”

    “아….”

    가비가 윤의 발목을 힐끗거렸다.

    “넌. 발목은 괜찮아?”

    윤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가비를 바라봤다. 아까 약초를 판 남성이 밀쳤을 때 발목을 살짝 접질렸다.

    티를 안 내려고 애썼는데…, 그걸 가비가 어찌 본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가비가 주위를 둘러보다 마당 한가운데 널려 있는 기다란 무명천 하나를 내렸다.

    그리곤 몸을 낮춰 앉더니 윤의 발을 제 무릎 위에 올렸다.

    눈 깜짝할 새에 윤의 발목으로 무명천이 감겼다.

    “테이핑을 하면 좋은 데 여긴 그런 게 없으니까.”

    가비가 아쉬운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댔다.

    “당분간은 많이 움직이지 마. 쓸만한 약초가 있는지, 안에 계신 저 태어의라는 분께 내가 한번 물어볼게.”

    가비가 다정한 얼굴로 윤을 향해 싱긋,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윤의 양 볼이 영문도 모른 채 붉어졌다.

    “고, 고맙습니다. 형님.”

    “형님?”

    생소한 호칭에 웃음부터 나왔다.

    그런데 뭐. 상관없으니까.

    무릎을 탁 털고 일어나는데 마침 방문이 열리며 서문이 나왔다.

    윤의 발목에 감긴 무명천을 보더니 짐짓 놀란 눈으로 이내 미소지었다.

    적당한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서문이 메고 있던 봇짐에서 초록색 약초 한 묶음을 꺼냈다.

    아까 장터에서 시비가 붙었던 해열초였다.

    “우선은 어머니께 이걸 달여 내일까지 먹이도록 하고,”

    “열이 심하면 하루에 세 번인데, 너희 어머니는 두 번이면 될 것 같아.”

    가비가 ‘맞죠?’ 하는 눈빛으로 서문을 바라봤다. 서문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꺼낸 식물은 연둣빛으로 깨끗한 면포에 싸여 있었다.

    서문이 답을 요구하듯 가비를 돌아보자, 가비가 서문 대신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건염초 같은데.”

    약초도감에 적혀 있길 염증을 치료하는 약초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그중 이건 경증에 쓰이는 것.

    “질척일 정도로 빻아서 어머니 상처 입은 손에 덮어두면 효과가 있을 거야. 그리고 이거랑 함께,”

    말을 하던 가비가 서문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복령초도 갖고 계세요?”

    “아.”

    서문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봇짐을 열어 그곳에서 얄팍한 종이봉투를 꺼냈다.

    나무색의 넓적한 잎에서는 코를 쏘는 시원한 냄새가 났다.

    “이것도 얘 줘도 돼요?”

    “물론.”

    서문의 허락을 받은 가비가 복령초를 한 움큼 윤에게 내밀었다.

    “이거랑 건염초를 함께 빻아서 네 발목에 붙이고 자. 다음날 움직이기 한결 편할 거야.”

    “감사합니다!”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태어의님!”

    근심이 가득했던 소년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비와 서문의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 * *

    윤의 집을 나온 건 정오를 훌쩍 넘겨서였다.

    하늘 중앙으로 솟구친 해를 보며, 가비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터에서의 소란으로 잊고 있었지만, 다시금 온몸으로 한기가 들었다.

    찬 바람에 굳은 손발과 건조하게 부르튼 얼굴. 그리고 더러워진 옷에서 풍기는 냄새가 가비로 하여금 다시금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빨리 숙식할 곳부터 알아봐야 하는데.

    이쪽 세계가 저쪽 세계처럼 밤새 네온사인으로 불이 번쩍할 일도 없고.

    말 그대로 해가 저물면 끝이었다. 당장 긴 밤 추위를 피할 곳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그냥 윤한테 부탁해서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할까?

    나온 집을 힐끔거리며 돌아보는데,

    “떠도는 처지라고 하였지.”

    서문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약초에 대해 지식이 상당하던데, 따로 공부를 하였느냐.”

    “아니요. 그냥…,”

    어떻게 설명할까 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지어냈다.

    “할아버지가 약초꾼이셨어요.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게 많았을 뿐이고요.”

    이러다가 사기꾼 뺨치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의심받을 만한 말을 흘렸다가 오해를 살지도 모를 일이고.

    게다가 눈앞에 서문이란 남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아까 장터에서도 서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비대라는 남자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약초 판 남성을 잡아갔기 때문이다.

    역시 경비대는 죄인을 잡아가는 곳이 틀림없었다. 그런 곳에 반소가 자신을 넘기려 했다니. 뒤늦게 소름이 돋았다.

    “그럼 현재는 의탁할 곳이 없는 것이냐.”

    “예, 뭐….”

    순간 서문의 말에서 가비는 한 줄기 빛을 보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가비가 마른 침을 삼키며 서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허면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함께 가지 않겠느냐.”

    막상 기대했던 말을 듣자 믿기지가 않았다. 가비가 놀란 눈으로 서문을 바라봤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마.”

    서문이 삿갓을 벗으며 말했다.

    “나는 태황궁의 태어의 서문이다. 의궁(醫宮)에서 일할 어의들을 뽑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 어떠하냐. 너도 이번에 있는 어의 시험을 준비해 보는 것이.”

    어의고 시험이고, 그런 말은 금세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흘러나갔다.

    세상 어떤 일도 먹고 자는 것보다 우선되지 않으니까.

    “숙식은…, 제공됩니까?”

    “물론. 어의 시험을 준비하는 의학도에게는 모든 걸 제공한다. 또 시험에 합격한다면 평생 의궁에서 살 수 있지. 녹봉이야 넉넉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말을 듣자마자 가비는 서문을 따랐다. 당장 숙식 제공이 된다는데 마다할 리 없었다.

    * * *

    태황국의 이름을 딴 태황궁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뒤로 한껏 고개를 꺾어야만 볼 수 있는 성문 벽과 성문.

    그곳의 문지기들은 서문이 호패를 내밀지 않아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와아-”

    가비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말 그대로 휘황찬란이었다.

    금테를 두른 기왓장과 옥을 깎아서 만든 기둥. 처마 끝에 달린 자색 보석과 아름다운 풍경. 거기에서 퍼지는 맑은소리.

    눈과 귀가 호강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성문을 넘어 한참을 걷자 날씨와 상관없이 우뚝 솟은 푸른 나무들이 길을 이루며 서 있었다.

    마침내 보인 드넓은 뜰. 그곳엔 처음 보는 꽃들이 행렬을 이루며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마치 수백억을 들인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정교하고 수려했다.

    “정면에 보이는 궁이 천자님께서 기거하시는 양궁(陽宮)이다.”

    천자…?

    가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천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바로 자신을 수도까지 태워다준 수레 주인에게서.

    아마도 ‘천자’라는 호칭은 이 땅에서 ‘왕’을 의미하는 듯했다.

    태황국이란 나라에서, 이토록 화려한 태황궁이 자기 것이라면 적어도 그 정도의 신분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좌측 너머로 보이는 궁이 네가 지내게 될 의궁이고.”

    가비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당분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날을 보내야 할지도 모를 곳이었다.

    의궁 역시 규모가 컸지만, 당연 천자가 있는 양궁보다는 작고 검소해 보였다.

    “또 우측으로 보이는 궁이 천태비님이 계시는 천태비궁이다.”

    천태비? 천태비라면…,

    “천태비궁이 양궁과 꽤 가까운 거리에 있네요? 천자님께서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리시기가 아주 편하겠어요.”

    어림잡아 던진 질문에 서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네 말처럼 아침저녁으로 꼬박 문안 인사를 드리고 계신다.”

    맞네. 천자 엄마를 천태비라고 부르는 거.

    “그럼 양궁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저 궁은 뭐예요?”

    다른 궁과 사뭇 다른 느낌의 건물이었다. 마치 백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건물 전체가 햇빛을 받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 저것은 훗날 천자님의 반려가 되실 천자비님을 위한 궁이다.”

    음. 그럼 천자는 아직 솔로란 얘기네.

    대충 상황을 파악한 가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소개받은 궁 말고도 태황궁에는 수십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중 해가 들지 않는 곳에 양궁과 맞먹는 크기의 건물이 보였다.

    “그럼 저긴 어디예요?”

    태황궁에 처음 온 사람은 선뜻 발견하지도 못하는 곳을 가비가 묻자, 서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곳은 음궁(陰宮)이다.”

    “음궁이요?”

    “야왕님께서 기거하시는 곳이지.”

    …야왕.

    밤을 뜻하는 것인지. 궁의 위치부터 이름까지 침침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양궁과 음궁. 완전히 상반된 호칭이었다.

    “자, 그럼 의궁으로 먼저 가자. 그곳에서 깨끗하게 씻은 다음 천자님을 뵐 것이니.”

    “천자님을요?”

    가비가 놀란 눈을 하자, 서문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직접 발탁해서 데려온 자는 신분 확인을 따로 하지 않지만, 적어도 천자님은 뵈어야 한다.”

    그것이 예의이고 도리인 듯 서문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어쩌다 숙식 제공 때문에 궁에 들어오긴 했는데, 천자를 봐야 한다니. 영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서문은 그것이 하늘처럼 높은 분을 만나려니 어려워하는 것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저 인사만 드리면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된 거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경비대가 있다는 궁에도 들어왔는데 천자라고 못 만날까.

    표정을 갈무리한 가비가 얼른 서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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