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2화 (2/95)

[2화]

배부른 고양이와 개들이 마당을 점거했다. 그 모습을 은영이 거실 통창 너머로 바라봤다.

“개랑 고양이는 원래 앙숙 아니야?”

“아닐걸? 적어도 우리 집에 오는 애들은.”

원래부터 함께 키우던 것도 아니고 그저 길을 떠도는 길냥이와 길멍이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동물들은 가비를 둘러싸고 동맹이라도 맺은 것처럼, 서로 질서 정연하고 평화로웠다. 그게 은영은 별스러웠다.

은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두꺼운 책 한 권을 들었다.

제목은 ‘약초도감’

벽돌 두께의 책은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낡고 바래있었다.

“이걸 아직도 읽어?”

“응.”

가비가 냉장고 문을 열며 짤막하게 답했다.

책을 후루룩 넘겨보던 은영이 미간을 그러모았다. 책에는 온갖 약초들의 그림과 그에 대한 효능과 부작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중요한 건 이 책에 나온 약초들이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누군가가 기막힌 상상력으로 섬세하게 만들어낸 허구적인 지식 책 같다고나 할까?

“집에 가보를 이렇게 막 굴려도 되는 거야?”

“가보는 무슨.”

“할아버지가 가보라고 하셨다며.”

그렇긴 했지만 가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엔 전생이 존재한단다. 해서 오래전, 선조 중 한 분이 이 도감을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전생을 기억하는 분이었고, 자신이 살던 곳은 이곳이 아니라 다른 세계였으며, 이 약초들 역시 그곳에서 나는 식물들로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말이 돼?’

가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가비야.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란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있어.’

‘뭐래 할아버지. 그런 게 어딨어.’

콧방귀를 끼면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정말이래도’ 했다.

“할아버지 말이 사실일 수도 있잖아.”

은영이 책을 들고 다가왔다.

“아님 이걸 계속 보는 이유가 뭐야?”

“재밌어서.”

“뭐?”

“재밌어, 그냥. 진짜든 아니든.”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건네준 이 책을 심심할 때마다 펼쳐보곤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운영하는 한의원에서도 생전 본 적 없는 약초의 모습과 이름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제는 눈을 감고도 이 책의 약초들을 전부 외울 정도였다.

암기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냥 머릿속에 쏙쏙 박히듯 들어왔다.

“근데 이제는 볼 시간 없지, 뭐. 학기 시작하면 바쁠 테니까.”

“맞다. 너 알바 구한댔지?”

은영이 책을 있던 자리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냉장고를 뒤져보던 가비가 냉장고 문을 닫았다.

“마트 가야겠다. 마실 게 없어.”

“난 탄산!”

“탄산?”

“아이스크림도.”

“아이스크림만?”

“과자도 있음 좋고.”

가비가 지갑을 챙겨 들었다. 은영이 같이 가자 했지만 만류했다.

“됐어. 대신 설거지 좀.”

“오케이.”

은영이 재빨리 싱크대로 가서 고무장갑을 꼈다. 개수대에는 같이 저녁을 먹었던 빈 그릇이 놓여있었다.

덜컹-

현관문을 열자 누워있던 동물들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가비가 마당 한가운데 쭈그리고 앉자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근데 오늘은 왜 점박이가 안 왔어? 무슨 일 있어?”

가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한 달 사이. 가비네 집에 찾아오던 길냥이 중 두 마리가 사체로 발견됐다. 그리고 오늘은, 점박이가 오지 않았다.

가비가 CCTV 쪽을 바라봤다. 대문 앞까지 찍히는 위치였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길냥이들과 길멍이들이 가비네 집에 찾아온다는 걸.

동네 주민들은 오히려 그걸 반기는 눈치였다. 덕분에 밤마다 떠도는 동물들이 없었고, 가비가 사료를 주는 장소도 자신의 집 앞마당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는 동물병원을 통해 녀석들의 중성화까지 신경 써주니 동네 주민들로서는 가비의 수고스러움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서 고양이를 물색하는 거라면, 우리 집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자, 고양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분간 내가 주는 거 외엔 아무것도 먹지 마. 낯선 사람 보면 무조건 피하고. 알았지?”

고양이들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비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어디가?’라고 묻는 것 같았다.

“마트 다녀올 거야. 쉬고 있어.”

알아들은 것처럼 다들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가비가 대문 밖으로 나섰다. 두꺼운 후드티에 긴 팔 티셔츠를 두 개나 껴입었는데도 바람이 제법 찼다.

점퍼라도 걸치고 나올걸.

서둘러 마트로 향했다. 은영이 말했던 탄산음료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좋아하는 과자 몇 봉지를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대로 향하던 가비가 걸음을 멈췄다. 생리대가 놓인 진열대 앞이었다. 눈으로 훑자 근처에 서 있던 담당 직원이 다가와 설명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유기농 제품이에요. 한번 써보세요. 피부 트러블로 고생하시는 분들께 진짜 좋아요.”

가비가 신상품으로 소개된 생리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올해는…, 할까?

여자라면 한 달에 한 번 겪는다는 그 마법이, 가비에겐 아직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건 은영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다.

그래도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진 꼭 할 줄 알았는데.

이젠 그 믿음이 의심이 돼버렸다.

병원도 여러 차례 가봤지만, 소용없었다. 원인도 문제도 알 수 없었다.

모르지. 할지도.

그런 바람을 담아 직원이 추천해준 생리대 하나를 넣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으, 추워!”

막바지 한파라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에 길가는 휑했다.

목 부분을 단단히 여민 가비가 빠른 걸음으로 하천을 지날 때였다.

캬아-

어디선가 고양이의 날 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비가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어둑한 하천 길이 침묵에 잠겼다.

잘못 들었나?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캿-,

이번엔 숨이 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비가 동작을 멈추고 눈을 굴렸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신경이 곤두섰다.

어디지? 분명히 이 근처 같은데.

핸드폰을 움켜쥐며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고양이가 한 번만 더 울어주길 바랐다. 그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이 전해졌는지,

캬악-

짧은 울음이 들렸다. 손에 든 봉투를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가비는 정확하게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천이 흐르는 둑 아래.

모자를 눌러쓴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남자의 손엔 고양이가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엔 커터칼이 들려 있었다.

“점박…!”

터지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았다. 고양이는 오늘 오지 않은 점박이였다. 가비가 빠르게 주변 상황부터 파악했다.

저긴 CCTV 사각지대야.

사람도 상점도 없는 하천 길. 이대로 가면 점박이는 죽을 테고 범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분명했다.

증거부터 남겨야 해.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찰칵, 찰칵-

연사가 찍히는 소리에 남자가 휙, 가비 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가 단숨에 경사길을 뛰어올랐다.

“…헉!”

남자가 가비를 둑 아래로 끌어내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데굴데굴-

흙더미로 이루어진 경사길을 굴러 둑 아래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가 가비를 올라타며 짓눌렀다.

깊게 눌러쓴 모자. 얼굴을 가린 검은 마스크. 그 위로 보이는 번득이는 안광.

정신을 차린 가비가 저도 모르게 씹어뱉었다.

“…싸패 새끼.”

세상에 다시 없을 나쁜 놈이었다. 말 못 하는 짐승들을 괴롭히고 해치는.

이미 가비는 범인을 향한 두려움보다 더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죄 없는 동물들을 죽이면 루저 같은 네 인생이 나아진다고 생각해?”

“…그어줄까?”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놈이 커터칼을 들었다.

“그보다 내가 먼저 사진을 보낼 것 같은데 어쩌지?”

그 말에 놈이 가비의 손을 바라봤다. 시선이 비낀 찰나, 가비가 커터칼을 쥐고 있는 놈의 손을 쳐내며 무릎으로 급소를 올려쳤다.

“욱!”

옆으로 쓰러지는 놈의 얼굴에서 마스크를 벗겨낸 것과 동시에 떨어진 커터칼은 발로 차서 멀리 보내버렸다.

“…으으,”

놈이 급소를 움켜잡고 바닥을 굴렀다.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가비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얼굴 들어.”

웅크린 채 엎드려 있던 놈이 천천히 몸을 폈다. 플래시가 터지며 다시 한번 연사가 찍혔다.

찰칵, 찰칵, 찰칵-

자리에서 일어난 놈이 느리게 허리를 세웠다.

“……!”

놀란 가비가 두 눈을 부릅떴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마스크가 벗겨진 놈의 낯짝이 보였다.

“…선, 배.”

진호였다. 아까 졸업식장에서 보았던. 가비에게 먹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었던. 밥을 먹으며 전화번호를 물어봤던 그 진호였다.

“선배가 어떻게…,”

충격으로 숨이 헐떡이며 말이 나오질 않았다. 후들거리는 손에 힘을 주자, 남은 연사로 진호의 얼굴이 찍혔다.

마침내 찰칵이는 소리가 멈추고 스산한 적막이 찾아왔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진호가 여상한 얼굴로 가비를 응시했다.

“그거 이리 주지 그래?”

진호가 한발 다가왔고, 가비가 한발 물러났다.

바닥에는 놀란 점박이가 쌕쌕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가비야. 좋은 말로 할 때, 폰 내놔.”

진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얼굴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진호가 분명했지만, 진호 같지 않았다.

“왜, 그랬어? 대체 왜…,”

목이 메었다. 학창시절 소중히 간직해 온 짝사랑이 산산이 조각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한 건 울분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고통받았을 동물들에 대한.

“상관없잖아.”

진호가 대답했다.

“어차피 사람도 아니고 짐승인데.”

가비의 심장이 철렁,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가비야.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종종 들었던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겉이 아니라 속을 봐야 하는 거야. 그걸 가릴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하고.’

할아버지…. 난 아직 그런 눈이 없나 봐.

핸드폰을 움켜쥔 가비의 손이 부들거렸다.

선배가…, 누구보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핸드폰을 들었다. 대화창을 연 순간, 진호가 달려들었다.

간발의 차로 피하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수십 장의 사진이 빠르게 은영과의 대화창으로 넘어갔다. 커터칼을 들고 있는 진호와 붙잡혀 있던 점박이의 사진도 함께였다.

“…윽!”

커다란 손이 가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진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사진, 보냈어?”

“어. 보냈어.”

“이 미친년이!”

“…컥!”

우악스럽게 목이 졸린 그때,

키야앙-!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허공으로 튀어나왔다. 고양이었다.

한 마리, 두 마리.

둑 아래로 모여든 고양이들이 털을 곤두세우며 진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르르르-!

뒤이어 개들까지 합세해 진호를 공격했다. 모두 가비가 사료를 챙겨주던 동물들이었다.

“으아악!”

다리를 물린 진호가 비명을 지르며 가비를 떠밀었다.

“어…, 어어!”

풍덩-!

가비가 그대로 하천물에 빠졌다. 수심이 깊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발이 닿지 않아!

마치 바닥이 없는 것만 같았다. 허우적대던 가비의 몸이 물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사, 살려…!”

끌려 들어가기 직전, 진호를 할퀴고 공격하던 동물들이 가비 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가비의 모습을 그저 평온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이럴 걸 예상이라도 한 듯이.

물에 잠긴 시야 끝으로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진호가 보였다.

도망가….

진호를 공격한 동물들이 해를 입을까 봐 걱정됐다.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도와줄 거야.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이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꼬르륵-

생각을 끝으로, 가비의 몸은 완전히 물에 잠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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