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1화 (1/95)

[1화]

눈앞으로 잿빛 하늘이 펼쳐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가비는 몇 번이나 제 눈을 의심했다.

여긴…, 어디지?

의식을 찾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분명 물에 빠졌었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추락한 것이 가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여긴…,

꿈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손 아래로 느껴지는 차갑고 진득한 감각이 너무도 선명했다.

사위는 빛이 바랜 듯 어둑했고 바닥은 진창이었다. 마치 늪을 떠올리게 하는.

꾸에에엑-

뒤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흠칫한 가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

놀란 입을 벌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본능이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꾸에에엑-!

시퍼런 눈.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

머리 가운데 뿔이 달린 거대한 짐승 한 마리가 가비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뭐야, 저게!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뜀박질부터 해야 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은 생각보다 빨랐고, 가비와의 간격을 점차 좁히고 있었다.

안 돼…!

잡힐 것만 같았다. 아니, 밟힐 것만 같았다. 사납고 육중한 발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것만 같았다.

가비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달리기라면 자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육상선수를 권유받을 만큼, 가비의 신체 조건은 빠르고 탄력적이었다. 하지만 발이 푹푹 꺼지는 진창에서는 실력이 발휘되지 못했다.

무자비한 체력 소모에 속도는 금세 떨어졌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허억, 헉!”

방향을 트는 순간, 다리가 휘청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악-!”

끝났다 생각한 순간,

꾸엑!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진창을 내달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다닥-

후웅-

무언가가 가비 위로 날아올랐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가비가 가는 눈을 떴다.

…새?

아니.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는 새가 아니었다.

…사람!

공중으로 뛰어오른 그림자가 무언가를 휘둘렀다.

쌔액-

묵직한 쇠붙이가 허공을 가르더니,

꾸악-!

짐승의 몸을 두 동강 냈다.

푸학-

끈적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피!

가비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보고도 믿기 힘든 참상이었다.

저벅-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가비 앞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가비가 떨리는 눈을 들었다. 신장이 190cm는 될 법한 남자였다. 남자의 손엔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검이 들려 있었다.

정확하게는 반월도(半月刀).

그 끝이 가비의 턱 끝을 가리켰다. 남자의 회색 눈이 가비를 내려다봤다.

“넌…, 뭐야.”

고조 없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삐딱한 시선과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하얀 얼굴에 점점이 튀어있는 붉은 핏방울까지.

분명 사람이었지만 사람 같지 않은 몰골이었다. 눈빛과 말투에서 사람다운 온기가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가비는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칼끝에 묻어 있던 핏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내린 순간,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가비야.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단다.’

* * *

고등학교 졸업식 날.

가비를 축하해 줄 가족은 없었다.

일곱 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아버지마저 졸업식을 일 년 앞둔 시점, 조용히 가비 곁을 떠났다.

쓸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침울하거나 우울하진 않았다.

‘인생은 즐겁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 말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말버릇이었던 만큼, 가비 역시 쉽게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누릴 수 있는 시간에 집중하곤 했다.

그게 가족들이 바라는 가비의 모습일 테니까.

“가비야. 은가비!”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은영이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가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가비의 품에도 은영과 꼭 같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은영의 부모님이 가비 것도 함께 챙겨준 것이었다.

“야야, 저기 진호 선배.”

진호 선배란 말에 가비가 홱,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눈에 띄는 한 사람.

반듯한 외모와 상냥한 눈빛을 가진 진호는 작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명문대를 들어간 대학생이었다.

오늘은 가비와 은영과 한 반이었던 동생 선호의 졸업식 때문에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기회다. 전화번호 물어봐.”

가비가 ‘그럴까?’ 하는 눈빛으로 은영을 돌아봤다. 사실 졸업하는 여학생 대부분이 진호를 좋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진호는 많은 이의 첫사랑이었고 가비도 다르지 않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외모부터 성격까지 뭐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걸.

가비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은영을 돌아봤다.

“나 괜찮아?”

바람에 살랑이는 가비의 숏커트 머리를 은영이 부드럽게 정돈해주었다.

“당연히 괜찮지. 가자!”

은영이 가비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실 ‘괜찮다’는 은영의 말을 다 믿진 않았다.

여자치고 큰 키에 마른 체형을 가진 가비는 미소년을 떠오르게 하는 외모였다.

그 때문에 남학생들보다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고.

이런 자신을 누구보다 예쁘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건 절친인 은영뿐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선배, 안녕하세요.”

가비가 은영과 함께 진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돌아본 진호가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이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선호랑 너희 찾고 있었는데.”

“저희를요? 왜요?”

은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졸업식도 끝났는데 맛있는 거 사주려고.”

그 말에 은영이 또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선배 요새 과외 알바 한다면서요? 인기 되게 좋다던데.”

“그건 누구한테 들었어?”

“선배 좋아하는 애들은 선배 소식 다 꿰고 있어요. 선호가 입 싼 것도 있고.”

“하하.”

진호가 소리 내어 웃으며 가비를 바라봤다.

“같이 밥 먹으러 갈 거지?”

마치 ‘네가 꼭 가야만 해’라는 말투와 눈빛이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노을이 진 무렵. 가비는 은영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길게 난 하천을 따라 걸으며 은영은 내내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진호 선배가 너한테 맘 있는 거 맞아. 그치?”

“글쎄?”

밥을 먹으며 번호를 교환하긴 했지만, 아직 그것만으로 마음을 확답할 순 없었다.

“내가 보기엔 진호 선배가 너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니까? 오늘도 너 보러 온 거야. 분명해!”

누가 누굴 좋아한다더라, 하는 은영의 촉이 틀린 적은 없었지만, 막상 본인의 일이 되니 왠지 신중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몰라. 연락해 봐야 알지.”

“아- 좋겠다, 계집애. 이제 너한테 남은 건 꿈같은 대학 생활이야. 완전 부럽!”

정말 다행스럽게도 가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원하던 학교에 바라던 한의학과를 가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한의사였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도 한의사였고.

언젠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한의원을 운영하는 걸 상상했지만 말 그대로 그건 상상에서 그치고 말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는 혼자 운영하던 한의원을 2년 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 돈을 가비의 대학등록금과 생활비로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어쩌면 본인이 곧 갈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너랑 진호 선배 사귀면 집도 가까워서 맨날 볼 수 있겠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걸어서 십 분 거리였고 은영의 집은 그보다 조금 더 멀었다.

그 덕에 가비는 매일 은영과 선호와 함께 등하교하곤 했다.

가끔 운이 좋을 날 대학생이 된 진호도 볼 수 있었고.

“나중에 나도 남친 생기면 우리 같이 데이트하자. 커플템도 사고.”

설레발을 치는 은영을 보며 가비가 웃었다. 수수하고 소탈한 가비와 달리 은영은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성격이었다.

“와-!”

마당으로 들어선 은영이 탄성을 내질렀다. 가비의 집 앞마당에는 갖가지 나무들이 있었다.

그 나무들이 늦겨울 봄을 맞은 것처럼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수줍게 열린 꽃봉오리를 보며 은영이 멍한 눈을 깜빡였다.

“매년 보는 거지만 진짜 신기하다.”

아직 길가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채 녹지 않고 남아있었다.

하지만 가비의 집 마당은 봄 냄새가 물씬 풍겼다. 마치 이곳만 계절을 비껴간 것 같았다.

“나 이거 방송국에 제보할까 봐. 어떻게 생각해? 내 생각엔 너희 집이 전국에서 제일 먼저 꽃이 필 것 같은데.”

가비가 ‘글쎄?’ 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워낙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일이라 놀랍지가 않았다.

물론 보기 드문 일은 맞겠지만,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담 밖에서 구경하곤 했지만, 가비에게 이런 현상들은 딱히 특별한 게 아니었다.

“자고 갈 거지?”

가비의 물음에 은영이 ‘당연하지’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은영은 가비가 외로울까 봐 종종 함께 자곤 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가비가 불을 켰다.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했던 집이 금세 밝아졌다.

거실의 통창을 열어 얼마 전에 설치해둔 CCTV를 올려다봤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도둑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한 달 전부터 극성을 부리는 고양이 학대범을 잡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뭐 찍힌 거 없어?”

모니터를 확인하는 가비 곁으로 은영이 다가왔다.

“응. 별거 없네.”

가비가 아쉬운 얼굴로 화면을 껐다. 그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사료 포대를 들고 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열어둔 거실 통창 너머로, 니야- 니야아-하는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다섯 마리, 열 마리, 점점 늘어나는 고양이들을 보며 은영이 입을 떡 벌렸다.

자주 보는 광경인데도 이 또한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야, 너 전생에 고양이 엄마였냐?”

“왜. 개냥이 엄마라고 하지.”

“아, 맞다. 개도 있었지.”

이번엔 개 사료를 들고 온 가비가 여러 밥그릇에 그것을 나눠 담기 시작했다.

은영과 함께 사료가 담긴 그릇을 마당으로 가지고 나갔다. 여기저기 놓아주자 고양이들이 순서를 지켜 차례대로 먹기 시작했다.

대문을 열고 나가자 떠돌이 개 몇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왔어?”

가비가 습관처럼 녀석들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빠진 녀석은 없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마침내 마당 안으로 사료 그릇을 놓아주자, 녀석들이 얌전히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비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사실 이건 가비가 원해서 시작된 일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부터 길을 떠돌던 고양이와 개들이 가비의 집을 찾기 시작했다.

희한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진짜 제보해야 해….”

은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은영이 보기에 가비를 둘러싼 환경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말이 좋아 신기지, 괴이한 일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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