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권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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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위이이잉, 이명이 들려온다.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축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할아버지와 온 힘을 부딪혔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그리고 그 이후.
“하….”
할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지?
“가만히 있거라.”
이정기는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움찔였다.
“할아…버지….”
분명 할아버지다.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것은 할아버지.
“뭐가… 어떻게….”
할아버지는 분명 마신에 의해 잠식당해 태초의 혼돈이 되었다.
완전히 먹혀 마신이 되었던 할아버지였을진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내가 패배한 걸까?
일 초에도 수십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네가 이겼다.”
“……!”
“네가 녀석을, 네 할미와 네가 녀석을 잠재웠다.”
“할아버지!”
이정기가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무리는….”
슬쩍 바라본 할아버지의 입가가 쓰게 웃고 있었다.
“내가 했지.”
“…….”
“녀석은 나이되, 내가 아닌 존재였다. 왜 그런 줄 아느냐?”
깊게 파인 구덩이를 벗어나며 할아버지는 말했다.
“어떤 힘에 기대는 순간, 성장은 멈추는 법이다. 그런 녀석에게 내가 지겠느냐?”
“하.”
이정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이건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신에게 먹힌 이건.
그는 완전히 먹힌 것이 아닌 마신의 속에서 끊임없이 대항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할아버지 답네요.”
이건은 그 속에서도 성장해 마신을 이겨낸 것이었다.
“몰랐느냐?”
이건이 다시 씨익 웃는다.
전보다는 덜 쓴웃음이었다.
“이 할애비는 최강이다.”
“그렇다면 저는 결코 할아버지를 못 이기겠네요.”
“왜?”
이정기도 쓰게 웃었다.
“이미 다른 힘에 너무 기댔잖아요.”
“푸하.”
이건이 작게 웃었다.
“가디언의 왕이 되어 얻은 힘과 지구의 왕이 되어 얻은 힘을 말하느냐?”
“예.”
“오해가 깊구나. 아직 전지가 완전히 발동하지 않은 건가?”
“예?”
이건이 말했다.
“카오스 속에서 보았다. 넌 애초에 그 힘을 갖고 태어난 거야. 나와 달리 무언가에 기댄 것이 아닌 깨워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너도 무언가에 기대어 성장한 게 아니다. 네가 가진 모든 힘을 끌어낸 거지.”
이건이 이제는 완전히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마주친 두 눈.
“너도 최강이다.”
“……!”
이정기가 이건의 말에 피식 웃었다.
“최강은 하나뿐 아닌가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함을 가진 유일한 존재.
오직 한 명만이 최강이라 불릴 수 있는 법이다.
“아니지.”
이건이 이제야 제대로 서게 된 이정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최강’의 손자이자 ‘최강의 손자’인게다.”
떠오르는 태양이 이건과 이정기를 비추고 있었다.
<에필로그>
“흐아.”
이정기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촤아악!
이정기를 인식한 듯 커튼이 자동으로 열리며 밝은 햇살이 방 안에 내리쬈다.
이성 저택도, 이건 저택도 무너져내렸다.
지금 이정기가 있는 곳은.
‘오랜만이네.’
과거 지구로 처음 왔을 때 김대정 협회장이 제공해주었던 고층 숙소였다.
이정기가 자연스레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수많은 사람들.
오늘도 꽉 막힌 도로.
낮인데도 불구하고 밝게 빛나는 전광판들.
피식.
처음에는 저것들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올림포스에서 나고 자라 처음 보는 광경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후릅.
이제는 제법 볼만했다.
결코,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이곳이….’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고향이구나.”
태어나 자란 곳은 올림포스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가 고향이 되었다.
할아버지처럼, 어머니 아버지처럼.
앞으로 나는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띠링.
방 안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내렸다.
“회장님. 일어나셨습니까.”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정기가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둘이 있는 자리에선 편하게 부르라니까요. 이진석 헌터.”
이진석.
그가 웃는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아직 회장 취임도 못했는걸요.”
“그건….”
이정기의 농담과 같은 말에 이진석이 얼굴을 굳혔다.
그날, 세계의 멸망을 건 전투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결계 덕분에 세계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고 하나 많은 이가 죽고, 많은 이가 다쳤다.
또, 아직 남아있는 티탄의 잔당들이 세계 각지에 숨어있었으며 시엘들, 아니 티탄들이 만들어놓은 세력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할머니.’
할머니의 부재였다.
이성의 후계자로 이정기를 낙점하고, 할머니는 유언을 비롯해 모든 준비를 마친 채 떠났다.
당연히 다음 회장은 이정기가 될 것이나, 아직 그 절차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있었더라면.’
아마 이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벌써 자신이 회장의 자리에 취임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요?”
“협회에서 정훈 협회장과 이야기 나누고 계십니다.”
“왜요?”
이진석이 이정기의 말에 작게 웃었다.
“그게… 세상을 구했으니, 대가를 내놓으라고….”
참 할아버지답다.
“이건 저택 재건은 물론 이성 저택과 세계를 구한 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정훈 협회장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인가요? 그게?”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진석도 웃어 보였다.
“정훈 협회장은 세계 어느 협회의 협회장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관할 내에 세계 최강의 헌터가 둘이나 있으니까요.”
이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들은 어쩌고 있나요?”
“각자 좀 쉬어야겠다며 쉬고 있습니다.”
“그럼.”
이정기가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이진석 헌터도 휴가 좀 다녀오세요.”
“그럴 순 없습니다.”
단호히 말하는 이진석.
“이제 제가 회장님을 보필해야 합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모습이었다.
“뭘 보필할건데요?”
“…….”
“제가 어디 가서 다치기라도 할까 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니면 이성의 일을 도와줄 건가요? 아직 회장 취임도 안 했고 이성은 지금도 잘 굴러가요.”
주병훈과 주안나가 각각 이성 그룹과 이성 길드의 일을 보고 있었다.
“사실은….”
피식.
이진석이 편한 웃음을 내보였다.
“할 게 없습니다. 뭐 제가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여행을 가기에도 애매하고요.”
“그렇다면.”
이정기가 이진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모한테 좀 다녀오세요. 예전에 보니까 달 사냥꾼 중에 이진석 헌터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런…!”
이진석의 말은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파앗!
이정기의 손이 닿자 곧 그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진석 헌터도 마음이 있으면서.’
굳이 쑥스러워 움직이지 않으니 자신이 도와줄 수밖에 없다.
홀로 남은 이정기.
그도 곧 눈을 감았다.
‘이제야 찾아가는구나.’
일주일,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내버려둔 것이 있다.
꼭 처리해야 할 일.
파앗!
이정기의 몸이 이내 벼락과 함께 사라졌다.
* * *
“왕을 뵙습니다.”
“왕을 뵙습니다.”
아폴론과 아테나가 가장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고, 그 뒤를 이어 다른 가디언들이 예를 취했다.
물론 마동철이나 유시아가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디언이되, 가디언이 아닌 자.
굳이 이곳에 부르지 않았으니까.
“다들 잘 지냈어요?”
이정기가 가볍게 인사하며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더 이상 걱정거리가 없으니, 편히 지낼 수 있었지요. 모두가 왕의 덕분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가디언들은 지금 대한민국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신세였다.
그러면서 아직 남아있는 티탄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돌려보내 드릴 테니까요.”
그들의 고향은 지구가 아니다.
올림포스.
새로운 땅에 정착하여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가디언들도 고향에 대한 향수는 존재했다.
하지만 올림포스는 붕괴되어 사라졌다.
“왕이 계신 곳이 저희의 집입니다. 그곳이 올림포스지요. 하지만 왕께서 배려해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올림포스를 다시 만들 수 있다.
‘가이아의 넥타.’
그리고.
‘마신이 가졌던 우라노스의 넥타.’
할아버지에게 남아있는 그 힘으로 올림포스를 재건하는 것은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
물론 이제 올림포스는 완전히 별개의 공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구와 연결되어 두 개의 세계는 이어진 세계가 될 것이다.
그 속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새로운 숙제였다.
“그럼.”
이정기가 마침내 가장 앞에 섰고, 가디언들이 그 뒤에 섰다.
“다녀오십시오.”
이정기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가디언들.
이정기는 앞으로 나아가 로브를 뒤집어쓴 이에게 말했다.
“빌고 빌었나 봐. 이렇게 돌아왔으니 말이야.”
-두 왕을 뵙습니다. 저는 스틱스를 안내하는 뱃사공, 카론이라 합니다. 왕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틱스의 안내자 카론.
그가 이정기의 앞에 서 있었다.
“못 알아듣는다면 됐어. 뱃삯을 지불해야 하나?”
-두 왕의 뱃삯은…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카론이 비켜서고, 시간 여행 속 보았던 것처럼 스틱스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법칙에 의한 문이 열리면 굳이 걸어갈 필요가 없다.
파앗!
이정기는 어느새 다음 구역, 지옥문 앞에 서 있었다.
일렁.
흑염이 모여들어 형체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곧 흑염은 세 머리를 가진 거대한 늑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파수견, 케로베로스.
-크르르.
이정기를 향해 낮게 울어대던 녀석이.
-헥헥헥.
갑작스레 배를 까뒤집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기억하는구나?”
카론은 법칙에 포함되지 않지만, 스틱스와 지옥문은 법칙에 포함된다.
그리고 카론이 말했던 것처럼 뱃삯은 이미 지불되었다.
‘전의 시간대에서.’
법칙이기에 무너지지 않고 시간대를 무시하는 효과.
“이렇게 보니 귀엽네.”
이정기는 케로베로스의 배를 잠깐 긁어주곤.
구웅!
그 커다란 지옥문을 열어젖혔다.
화륵!
벽을 타고 피어오르는 푸른 염화들.
이정기는 그것들 사이를 걸어 마침내 왕좌에 도착했다.
하데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한쪽 무릎을 꿇어 보였다.
-처음 뵙습니다. 올림포스의 새로운 지배자시여.
과거와는 다른 반응.
“이미 알고 있겠지?”
-예. 지금의 시간대에선 처음 뵙는 것이지만, 아마 구면이겠지요.
아버지와 똑 닮은 그가 낮고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감히 왕을 능멸하고, 법칙을 어지럽힌 죄….
“필요 없어.”
-……!
이정기가 하데스의 앞에 섰다.
그러면서 하데스가 앉아있던 왕좌의 옆을 바라봤다.
텅 빈 채 놓인 의자.
“거래를 하자.”
-……!
사실 거래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자신은 왕이니, 그에게 명령을 내리면 된다.
하지만 지금 이정기는 하데스를 향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법칙.’
그것에게 말한 것이었다.
“네가 바라는 두 가지가 뭔지 알아. 이 죽음의 대지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씨익.
“네 왕비를 되찾는 것.”
-……!
“하지만 하나만 가질 수 있어.”
이정기가 말했다.
“넌 그 죄를 물어 결코 이 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영겁,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
“하지만 왕비를 돌려주지.”
-그런…!
이정기가 손을 내뻗었다.
크로노스의 힘으로 여행했던 시간대, 이정기는 페르세포네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존재.’
그녀의 존재를 몸에 담았다.
파짓, 파지짓!
왕비의 자리에 피어오르는 전류.
그것이 서서히 형체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너는, 아니 법칙은 그 대가로 할머니를 포함해 아버지, 어머니를 되살려야겠어. 가능한가?”
하데스가 떨리는 몸을 애써 짓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페르세포네의 존재, 저의 속박, 그리고 쥬노와 두 인간의 부활.
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웃고 있었다.
-법칙은 거래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데스의 뒤편으로,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윤하민에게 깃들었던 어머니의 영혼이 지옥의 왕의 부름을 받아 이곳에 당도했다.
그리고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또 다른 인영.
“아버지.”
이정기가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들을 환영했다.
[최강의 손자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