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권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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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어어어엉!
시공이 말 그대로 갈려나가고 있는 전장.
우웅.
그 속에 겁도 없이 발을 내딛는 이가 있었으니.
“저 개잡종을 막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최명희였다.
혼돈과 혼돈이 폭발하는 전장 속에 발을 내디딘 대가로 갑주와 살갗이 타들어 가고 있는 최명희.
그녀는 온 힘을 이끌어내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면서도.
저벅.
전장 속에 발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뒤편에서 소리치는 목소리들이 어렴풋이 들렸다.
멈추라는 것이거나,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겠지.
하지만 최명희는 계속해서 발을 내디뎠다.
찌지직.
살갗이 찢어지고, 타들어 간다.
최명희가 고통을 참아가며 발을 내디뎠다.
“너와….”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지독한 통증을 내리고 있을 텐데,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의 운명인가보다.”
마침내 드러난 그 웃음은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죄 많은 인생이었다. 빼앗긴 채 태어나 빼앗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머릿속에 스쳐지나 가는 지난 세월.
“빼앗았을 때는 지키고자 모든 것을 내걸었다.”
이성을 빼앗고 자신의 성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공허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목적을 잃고 방황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주용의 선택이 이해되었다.
자신이나 주용이나 서자로 태어나 가문에 복수를 하고자 했던 자신들의 삶은 장작이었다.
모든 것을 불태워,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나아가는 삶.
마침내 그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는.
“재만 남았었지.”
더 이상 타오를 것이 없었다.
허무와 공허.
그 속에서 허우적대다 자신이 쌓아놓은 업보에 짓눌려 죽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명희는 달랐다.
“네 덕이다.”
이건.
그 덕분이었다.
‘살아라.’
목적을 잃고 방황하던 최명희에게 이건은 말했다.
‘언제고 네 성을 무너트릴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최강이자 최고인 이건.
그는 자신의 곁을 떠나며 말했다.
네가 겨우 쌓아올린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트릴 수 있는 힘을 자신이 가졌다고.
‘그때 또 한 번 빼앗길 거냐?’
겨우 되찾은 것을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
‘그러니….’
그날 이건은 자신을 떠나며 말했다.
‘모든 것을 바쳐 이성이라는 성을 탄탄히 해. 이 망할 여편네야.’
자신에게 삶의 목적을 주었다.
처음에는 오히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던 것이 이건이었다.
처음으로 인간의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것이 이건이었다.
그런 그가 떠나자 겨우 붙들고 있던 마지막 재마저 스러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개잡종.’
분노가 치솟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개자식.
힘으로라도 붙잡아 놓겠다는 생각.
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벅.
살 이유를 찾았다.
‘이건.’
그의 뒤를 쫓기 위해.
‘이건.’
그가 자신에게 준 은혜를 갚기 위해.
그가 자신을 떠난 것도 모두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개잡종아.”
그가 미웠다.
함께하고 싶었고, 그 어느 날까지 함께 있고 싶었다.
“개잡종아-!”
떠나지 말지.
차라리 흔들리는 자신을 옆에서라도 붙들어주지.
‘널 위해서야.’
안다.
그가 자신을 떠난 이유가 그저 자신에게 목표를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언제고 얘기했던 것.
‘내 자식들은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삶을 살게 하지 않을 거야.’
최명희가 바라온 이상.
‘이 세계도 마찬가지야.’
최명희가 그려온 미래.
‘난 거기 있으면 안 돼.’
이건은 그 그림 속 방해물이 될 뿐이라고.
최강이지만, 세계가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이건이 어느 한 세력에 속해있다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기에.
“이건….”
이건은 최명희의 곁을 떠났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붙들 게다.”
최명희의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듯 타오르고 있었다.
“할머니-!”
그제야 최명희를 발견한 이정기가 최명희를 보며 소리쳤다.
“정기야.”
최명희가 웃으며 발을 내디디고 말했다.
“네 할애비를 구해주거라.”
“할머니-!”
파스슷!
최명희의 온몸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압력에 최명희가 더 이상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길 포기한 것이었다.
“안 돼-!”
늦었다.
이미 가루가 되어 흩어진 최명희.
그녀의 넥타와 마력이 짓눌리는 공간 속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흔들.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 * *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네 할미가 내 유일한 약점이야.’
언제나 최고 최강, 할아버지에게 약점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누구나 그 등을 좇아오길 포기한 사람.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
그것이 이건이었다.
하지만 이정기는 그 등을 좇기로 마음먹었다.
이정기뿐만이 아니었다, 또 한 사람.
‘지독한 여자다.’
최명희.
자신의 할머니였다.
그 오랜 세월, 할아버지가 올림포스에 갇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할머니는 언제나 할아버지의 등을 보고 쫓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무서운 여자다.’
그리고 성장이 멈춰버린 다른 이들과 달리 할머니는 언제나 성장해 따라오고 있었다.
늦지만 천천히, 그 등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여자다.’
할아버지가 말했었다.
‘그 여편네가 내 약점이라는 건 그저 내 마음 때문만은 아니다. 말 그대로다.’
이정기가 감았던 눈을 떴다.
“할머니-!”
최명희는 스스로의 모든 것을 희생해 이건과 겨루고 있는 이정기에게 깃들고 있었다.
가디언의 충성 맹세로 연결되어 있는 둘.
가디언의 왕이자, 지구의 왕이기도 한 이정기.
가디언이자, 인간인 최명희의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었다.
서서히 할머니가 스며든다.
-그녀에겐.
쩌어어어어어어엉!
-나를 약화시키는 파장이 존재하거든.
쩌엉!
변화.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던 이정기와 이건의 주먹 사이에 마침내 첫 변화가 생겨났다.
파르르.
이정기와 맞서고 있는 이건의 주먹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짜였어.’
할아버지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쩌어어어엉!
진짜로 할머니에겐 할아버지의 마력 파장을 갉아먹는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흔들!
이정기의 주먹이 더더욱 이건을 밀어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소리치며 이정기는 더욱더 발을 내디뎠다.
‘할머니.’
그녀가 자신과 함께한다.
모든 것을 바쳐 스러진 할머니는 지금 할아버지를 막길 바라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마력을 갉아먹는 할머니의 파장은 할머니가 타고 난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그가 준 것이었다.
자신의 약점, 자신의 심장을 할머니에게 내맡긴 것이었다.
언제고 할아버지가 그릇된 길로 가게 되었을 때, 할머니가 자신을 막아주길 바라며 할머니 몰래 안배해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할아버지가 자신을 막아주길 바랐다.
할머니는 그 의지에 이끌려 스스로를 희생했다.
남은 것은.
“그마아아아안!”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쩌어엉!
이정기가 또 다른 주먹에 혼돈의 볼텍스를 담아 이건의 머리통을 노렸다.
쩌어어어엉!
이건의 또 다른 주먹이 맞부딪히며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었다.
쿠쿠쿠쿠쿠.
할아버지가 밀려나고 있었다.
파지지짓!
이정기의 몸을 감싼 검붉은 전류가 더더욱 타오르고 있었다.
솟구치며 내리 떨어지는 벼락들.
그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회전하는 혼돈의 폭풍.
콰아아아아아앙!
믿을 수 없는 폭발이 그곳에서 일어났다.
* * *
“허억, 허억….”
“괜찮나….”
“다들….”
아폴론들과 가디언들이 심장을 움켜쥔 채 앞을 바라봤다.
쿠우웅!
어디까지 닿아있는지 모를 빛기둥.
검고 푸르고, 붉은빛이 한데 뒤섞여 생겨난 그 기둥은 마치 하늘 위로 치솟는 것 같기도.
쿠우웅!
아니면 세상에 내리는 심판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혀오고 존재가 흔들린다.
그리고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끝….”
끝이 도래했음을.
저 기둥 속, 더 이상 충격파나 충돌음은 들리지 않는다.
쿠우웅!
저 속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즉.
“싸움이 끝났다….”
어떤 것으로든 결착이 났다는 말이었다.
아폴론이 먼저 일어섰다.
아테나가 뒤이어 일어섰다.
다른 가디언들이 따라 일어섰다.
타닷.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인기척.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이진석이라는 인간이었다.
또 다른 인간들도 함께였다.
저 쪽의 싸움도 끝이 난 것이겠지.
아니, 티탄의 왕들이 자신들의 왕에게 박살 나면서부터 그쪽의 싸움은 끝이 난 것일 터였다.
“대체 저 기둥은….”
“결과다.”
아폴론이 말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결과.”
“결과…?”
“존속이든 멸망이든….”
아폴론이 경건한 눈으로 기둥을 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결과이자, 운명.”
이진석은 아폴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끝.’
정말로 끝이 도래했음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진석은 혹여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물었다.
그러나 아폴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다.”
그 누구도.
“더 이상 결과에 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저 기둥이 사라지고 나타날 존재는 더 이상 막아설 자가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가 한데 모여 덤벼든다 해도 막을 수 없는 존재.
그 손짓 하나로 모든 것이 운명지어질 존재.
그것이….
‘신이라는 것이겠지.’
자신들이 자칭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누구일까.
그런 의문은 가질 필요조차 없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우우웅.
마침내 저 커다란 빛기둥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늘 높은 곳, 어딘가로 향하는 것인지.
기둥 속에 있을 존재에게 스며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제 저곳에서 탄생한 신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화아아악!
기둥이 소멸하며 내는 빛이 모두의 눈을 잠시동안 멀게 했다.
파앗!
그리고 빛과 함께 사라진 기둥.
그곳에서 볼 수 있던 것은.
“멸망인가….”
쓰러진 이정기와 서 있는 이건이었다.
화르르륵!
아폴론의 온몸이 화염으로 감싸였다.
타앙!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황금과 불꽃의 갑주로 완벽한 무장을 한 상태였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다른 가디언들도 아폴론의 뜻을 직감한 것인지 신체와 신기를 무장한 채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우리가 뒤바꿀 수 있는 결과는 아니다.”
아폴론이 커다란 태양활을 들고 말했다.
“하지만 끝까지 우리를 위해 싸운 왕께 걸맞은 수하가 되어야지.”
멸망이란 결과.
그 속에서 끝까지 버티는 것.
아폴론은 그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뒤이어진 광경에 아폴론은 태양활을 늘어트렸다.
“이건….”
이건의 이름이 아니다.
“기적인가.”
서 있던 이건이 쓰러진 이정기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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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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