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권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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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지짓!
하데스의 온몸을 갉아먹는 검붉은 전류.
가디언의 왕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 가디언이자, 저승의 왕인 하데스.
그조차도 이정기의 힘 앞에서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사아아.
갉아 먹혀 사그라드는 하데스의 생명.
그는 그 순간에도 큰 표정 변화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작은 미소.
그에게서 잔류된 사념이 느껴졌다.
‘페르세포네.’
올림포스의 파멸을 막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위해 저승을 벗어날 수 없던 하데스.
그러나 그는 결국 그의 사랑하는 아내 페르세포네를 잃어버렸다.
그렇기에 그는 가디언들에게조차 모습을 감추고 오직 한 가지, 페르세포네를 되살리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무엇이 저승의 왕이라는 것이냐.’
죽은 이를 지배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하데스.
그럼에도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조차 되살릴 수 없는 현실에 좌절했다.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역행.’
되돌린다는 것은 시간 그 자체를 되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을 위해 결국 가디언으로서 해선 안 되는 일을 해야만 했다.
‘크로노스.’
소멸 직전까지 몰아 붙여져서 저승에 갇힌 최악의 죄인, 크로노스를 끄집어내는 것.
그의 힘을 사용해 다시 한 번 페르세포네를 만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혼뿐인 크로노스의 부활은 쉽지 않았다.
결국, 필요한 것은 육체.
‘누구냐.’
크로노스의 육체가 될 수 있는 존재.
크로노스의 그릇이 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찾아낼 수 있었다.
‘주용.’
저승의 한 폭, 미쳐버린 영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망가져버린 영혼.
후회와 아집으로 가득찬 영혼.
녀석과 크로노스의 파장이 일치했다.
티탄이나 가디언의 부활은 엄연히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인간은 다르다.
더욱이 별 볼 일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주용의 부활은 하데스에게 큰일도 아니었다.
주용을 부활시키고, 크로노스를 이식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그를 움직일 수 있는 건, 그의 아집과 욕망뿐이었다.
그렇기에 하데스는 주용을 자극했고, 그의 움직임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다.
-가디언의 왕이여. 올림포스의 왕이여. 지구의 왕이여.
사라져가는 하데스의 목소리가 이정기에게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 보고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음을 인정한다.
후회, 그러나 그 속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따뜻함.
-그렇기에 그대에게 조금의 죄라도 씻고자 준비한 것이 있다.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간다면 꼭 돌려받길 바란다.
파스스.
그것이 마지막 유언이란 것처럼 하데스는 사라졌다.
“…….”
잔류 사념을 통해 하데스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스윽.
이정기의 시선은 이제 페르세포네를 향했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녀는 작게 미소지으며 이정기를 향해 눈을 감아 보였다.
또륵.
그녀의 한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
그것은 그녀가 다시 한 번 죽음을 직감했기에 흘리는 눈물일까.
아니면 그녀 또한 사무치게 사랑하는 하데스의 죽음을 눈 에서 본 것 때문일까.
이정기는 말없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아.”
작은 신음과 함께.
파스슷.
그녀 또한 재가 되어 사라졌다.
“하아.”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하데스에게서 얻어낸 정보 속에 지금 주용, 크로노스가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데스의 비고, 저승의 비고에 그가 있다.
* * *
저승의 왕이 죽었다.
저승이란 법칙 그 자체인 곳.
왕의 죽음 따위로 무너져내리진 않지만 언제나 그 관리자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저승에 관리자가 될 수 있는 적합자는 바로 이정기였다.
‘비고로 이동한다.’
이정기의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파앗!
그의 신형이 커다란 공동 안에 나타났다.
원래라면 보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비고였지만 지금 이 커다란 공동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흐, 흐흐흐.”
광인이라는 말이 어울릴 남자의 목소리.
울음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헷갈린 신음이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흐흐흐흐!”
하데스의 잔류 사념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시간대를 되돌린 주용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갈 수 있던 마지막 시간대인 이곳에서도.
“왜냐…!”
그는 최명희를 갖지 못했다.
“왜…, 왜!”
최명희를 갖기 위해 안간힘을 썼음에도 결국 그는 진정 최명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다.
계속된 시간 역행과 시간 여행.
그리고 그것은 크로노스의 힘을 가지고 있다지만 자아와 정체성이 인간인 주용에게 이겨내기 힘든 일이었다.
그가 바라지 않는 시간, 그를 잊어간 시간, 그의 존재 자체가 죄악인 시간.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며, 그 시간들이 정신과 영혼에 쌓여간다.
‘고통.’
육체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 속에 쌓여가는 통증이 결국….
“왜!!! 흐흐흐흐….”
그를 미쳐버리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참고 마침내 완성의 시간이라 생각한 곳에 도달했던 그.
하지만 결국 이정기의 방해와 시간이라는 특수성 탓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미쳐버린 주용은 최명희를 갖고자 결국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다.
“주용.”
최명희를 죽인 것.
그리고 저승에 그녀를 가둔 채 주용은 최명희를 소유하려 했다.
“흐흐흐흐흐.”
“주용. 그렇게 할머니를 몰랐나?”
저승에 가둬둔 채 자신만을 보게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최명희가 그를 사랑하리라 생각한 것일까?
하데스의 잔류 사념에서 읽어낸 결과는 최악 그 자체였다.
‘너 따위에게 내 모든 것을 맡길 바에.’
저승에 도착한 최명희, 그녀의 선택은 그녀 다웠다.
‘소멸하겠다.’
스스로 존재를 소멸시킨 것.
죽음과 소멸은 이 신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서 개념이 다르다.
부활조차 할 수 없고, 그 존재 자체가 지워진다.
막연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기엔 죽음을 겪으며 소멸의 개념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가디언도, 티탄조차도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것이 바로 소멸.
최명희는 망설임 없이 소멸했고, 주용은 홀로 남아버렸다.
“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거냐….”
홀로 말하는 주용.
“왜! 너는 날 봐주지 않는 거냐!”
또다시 실패한 주용은 시간대를 되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데스가 그것을 막았고, 하데스가 아니어도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을 터였다.
‘크로노스.’
올림포스 최악의 티탄.
녀석이 더 이상 주용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테니까.
애초부터 당연한 일이었다.
“흐흐…. 가디언의 새로운 왕이구나.”
크로노스는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주용이 크로노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로노스를 지배해서가 아니다.
‘크로노스가 일부러 힘을 빌려준거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선 주용.
“이제 거의 다 끝났거늘.”
육신을 갖기 위해 주용을 완전히 망가트리는 것.
“감히 인간이 시간을 지배하려는 것 자체가 건방진 일이다.”
미쳐버린 주용이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가는 웃고 있었다.
‘침식.’
하데스가 소멸한 지금, 주용이 완전히 미쳐버린 지금.
“크로노스.”
“그렇다. 가디언의 왕.”
크로노스가 주용의 정신을 지우고 그 육신과 영혼을 빼앗고 있는 것이었다.
“주용, 아직 듣고 있겠지.”
“날 무시하는 거냐?”
“네가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건, 네 탓이다. 할머니가 널 봐주지 않았다고? 할머니는 한때나마 네게 동질감을 느끼고 널 아꼈다.”
그러나 그 관계는 결코 오래갈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해 손을 잡았던 그들, 그리고 그들의 훗날은 완전히 달랐으니까.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며 나아가는 최명희.
복수에 안주하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주용.
주용은 언제나.
“네 질투심 때문이야.”
할머니를 질투하고 불안해했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계속해서 나아가는 최명희.
모든 것이 타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대비되는 그 모습 속에서 최명희는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놓지 않으려 했다.
그렇기에.
‘망가져 버렸다.’
할머니는.
“네가 다시 일어서길 바란 것이야.”
그가 자신을 떠나 다시 삶의 의지를 찾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넌 그 모든 것을 포기한 주제에 다시 무언가를 욕심낸 거야.”
스스로 생을 마친 것.
그런 녀석이 잘못된 시간대 속에서 모두를 괴롭게 한 것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 녀석의 정신은 죽었다.”
크로노스의 목소리.
“이제 널 죽이고, 내가 원하는 시간대를 구축하겠다.”
쿠우우웅!
공간과 시간이 움직이며 크로노스의 손에 커다란 낫이 나타났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주용이 다루던 시간의 힘과 격이 다른 시간의 힘, 크로노스는 완성되어 이 자리에 강림했다고.
파짓! 파지짓!
이정기는 그런 크로노스를 보며 검붉은 전류를 다시 내뿜었다.
파지짓!
온몸이 변하며 다시 한 번 신체가 강림했다.
이정기는.
타앗!
망설임없이 크로노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 * *
‘이름.’
‘주용이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첫 만남부터 강렬했다.
서자인 자신, 그녀 또한 서녀에 불과한 존재.
자신들은 가문에 이용만 당한 채 버려질 운명이 분명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담담히 받아들이고자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갈 생각은 없다.’
‘당신도 선택권이 없을 텐데요?’
‘포기하긴 아직 이르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무언가 다른 것을 느꼈다.
‘포기한 자와 더 이상 할 얘기는 없으니 일어나겠다. 가문에 무어라 말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
그녀는 그 말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하. 하하.’
홀로 남은 주용은 미친놈처럼 웃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
그렇기에 패배자끼리 대화나 하자고 나온 자리였건만, 그녀의 눈에는 불길이 치솟아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년, 수십 년 동안 가문에서 천대받으며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삶.
그 삶 속에 포기를 주입하고, 결국 포기시키는 것이 이들의 운명이었다.
그녀 또한 똑같은 것을 느꼈을진대, 자신은 포기했고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처음.
‘갖고 싶다.’
주용은 감추고 눌러두었던 본심을 꺼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했건만 꺼트렸던 욕망의 불씨를 일깨웠다.
다시 움직였고, 다시 목숨을 걸었다.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이제 제법 눈빛이 좋아졌어.’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웃어주었다.
지금껏 했던 모든 고생이 눈처럼 녹는 듯한 기분.
그녀와 손을 잡고 목표를 이루었을 때, 이제야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건.’
그녀에겐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있었다.
자신과 함께하고 있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곳을 보고 있었다.
“이건….”
최명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털썩.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크로노스가 죽어가며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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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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