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권 25화
275
끼이익.
커다란 문이 열리며 습하고 쾌쾌한 향이 코끝을 찔러왔다.
불쾌하지만 익숙한 향.
‘죽음의 향기.’
어느새 완전히 개방된 문에서 죽음의 향이 스멀스멀 퍼져오고 있었다.
저벅.
이정기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이정기가 완전히 문을 넘어섰을 때.
콰앙!
문은 저절로 닫혀 굉음을 냈다.
어둠만이 사방에 가득했고, 이정기의 감각으로도 볼 수 없는 세상이 펼쳐졌다.
그 속에서.
그어어어어….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산 자인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것에 불만이라도 표하는 듯한 울음소리들.
꽈악!
발목을 잡는 완력이 느껴졌다.
스스스슥.
하나가 아닌 여럿, 계속해서 발목은 물론 사방에서 이정기를 옥죄어오는 손길들.
망자의 원념이 담긴 손길들이었다.
“망자 따위가.”
하지만 녀석들은 법칙에 드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원념으로 산 자를 증오하고 있는 것뿐.
봐주어야 할 이유 따윈 존재치 않았다.
파짓.
작은 스파크.
파지지짓!
곧이어 전류가 이정기의 온몸에 흐르며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닷!
벌레들이 감전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정기의 몸을 감싸던 손길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어어어어!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이정기를 노려왔다.
저벅.
그러나 발길을 내딛는 이정기의 몸에 닿는 손길은 더 이상 없었다.
지금까지야 법칙 때문에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이정기는 이미 온전한 왕.
거기다 지구의 왕의 자격마저 얻었기에.
파아아아앗!
마음만 먹는다면 공간 전체를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바닥을 타고 흘러나간 전류가 벽과 천장을 타며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이것이 지옥에 들어서는 세 번째 난관인 것 같았다.
‘만일 어중간한 자가 이곳에 들어왔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영혼 그 자체에 진득하게 붙어오는 망자들의 손길과 생명력 그 자체를 빨아들이는 힘은 가디언이라 해도 이겨낼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현재의 이정기는 크로노스조차 시간을 건들지 못할 정도로 완성되어 있었다.
차라리 법칙이 적용되어 있는 첫 번째, 두 번째 난관이 더욱 까다롭다.
세 번째 난관 따위.
“…….”
쉽게 끝이 났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상태.
울렁.
‘공간이 일그러진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완전히 처음 느껴보는 느낌.
저항할까 생각했지만, 저항의 필요가 없었다.
단순한 공간의 뒤틀림으로 난관을 이겨낸 자에게….
쿠웅!
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당신이.”
푸른 화염으로 일렁이는 공간.
저 멀리 보이는 왕좌, 그곳에 어둠의 장막으로 가려진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하데스인가?”
하데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과연 이야기를 들은 것과 같았다.
“가디언의 또 다른 왕.”
유일하다고 생각했던 가디언의 왕, 쥬피터를 제외하고 왕의 자격을 갖춘 또 다른 인물.
지옥의 왕, 하데스였다.
-불청객이로군.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정기는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 * *
저벅.
발자국을 내디디며 이정기는 왼손을 늘어뜨렸다.
파짓! 파지짓!
검붉은 뇌전이 벼락에 깃들어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쥬피터의 권능인 벼락.
그리고 이정기의 또 다른 권능이라 말할 수 있는 검붉은 힘.
그 두 가지가 합쳐 만들어진 힘의 위력은….
구구구구구!
하데스가 있는 이 공간 전체를 부술 듯 파괴적인 것이었다.
“길게 말하지 않을게.”
녀석이 이 모든 일의 주동자라고 한들 녀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크로노스를 내놔.”
시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크로노스.
녀석만이 필요하다.
쿠웅!
한 발걸음, 한 발걸음이 거대한 위력을 가지고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너랑 푸닥거리할 시간은 없어.”
결코, 좋은 감정은 가질 수 없기에 적의를 풀풀 풍기며 다가가고 있었다.
이미 거리가 꽤 좁혀졌건만 미동조차 없는 하데스.
“쉽게 내어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다만 하나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하데스의 옆에 있는 자였다.
동등한 왕좌에 앉아 익숙한 기운을 풍겨내고 있는 자.
“하.”
하데스에게 닿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정기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떨궈진 고개.
“도대체….”
이정기의 입에서 섬뜩하고도 끊기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까지 내 부모님을 능멸하려는 거냐.”
쿠콰콰콰콰콰!
이정기의 온몸만 감싸고 있던 검붉은 뇌전이 어느새 기둥처럼 변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이정기의 모습 또한 변화했다.
검붉게 물든 머리카락, 흑요석보다 더 빛나는 눈동자.
이정기의 분노에 감응하여 이정기가 가진 본래의 모습, 왕의 형태인 신체를 끄집어낸 것이었다.
“도대체!”
이정기가 멈춰선 이유였다.
가까이 다가가 가진 힘으로 장막 안의 모습이 보였다.
하데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자의 정체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또 한 번, 자신의 부모님이 연관되었다는 것이었다.
“왜 이 짓거리를 하는 거야!”
콰아아앙!
퍼져나가는 힘의 폭발에 마침내 장막이 걷혔다.
그 속에서 드러난 하데스의 얼굴은 또 한 번 이정기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영상을 통해 보았고, 크로노스의 시간대에서 만났던 얼굴.
‘아버지.’
그리고 그 옆.
하데스의 옆자리에 앉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어머니.’
이것들은 도대체 왜 우리 가족을 못 괴롭혀서 안달인가 싶었다.
계속해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 것인지.
“네가 노린게….”
이정기의 신형이 사라졌다.
“부모님의 모습을 빌려 내 분노에서 벗어나려던 것이면 틀렸어.”
파앗!
이정기의 신형이 나타난 곳은 하데스의 눈앞.
이정기의 왼 주먹이 망설임 없이 이강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하데스의 얼굴을 노렸다.
이건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주먹이 아니었다.
또한, 직격당하는 순간, 그 존재를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이 서려있는 주먹이었다.
더 이상은 망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아버지의 모습이건, 어머니의 모습이건 결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돌아갈 터.
-그런게 아닙니다. 왕이여.
그때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따뜻하고도 온화한 목소리.
파앗!
이정기의 세상이 푸르른 꽃으로 물들었다.
“처음 만나 뵙는군요. 새로운 가디언의 왕이여.”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는 그녀.
분명한 유영아의 모습을 하고 있던 하데스의 왕비가 분명했다.
왕의 지식으로 알게 된 그녀의 정체는.
“페르세포네.”
“영광입니다.”
이정기는 일부러 그녀가 자신의 정신에 침투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온화하고 따뜻한 목소리, 그 속에 서린 진심이 아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하데스를 소멸시켰을 것이다.
“부디 잠시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 * *
사실 그녀와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빨리 이 모든 사태를 끝내고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녀와 대화하고 있는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점.’
이제 이정기는 크로노스의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을 다룰 수 있었다.
가속을 다룰 수 있게 된 것.
그리하여.
‘사고의 가속.’
사고를 극한으로 가속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이 순간 흐르는 시간은 바깥에선 흐르지 않을 터였다.
이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또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곳에서 하데스를 처리한다고 끝이 아니야.’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크로노스의 힘을 가진 주용도, 그를 움직인 크로노스도.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갔을 때 사고가 발생한다면….’
더 이상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하데스가 가진 생각을 알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페르세포네의 요청을 수락한 것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다만 결코 그녀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데스의 곁에 있다는 점, 다른 가디언들이 이 시간대에서 마신과 겨루며 지키고자 하고 있을 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
믿을 수 없지만.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어.’
왕의 지식과 능력으로 보면 페르세포네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디.”
페르세포네는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
“왕께서 하시는 가장 큰 오해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뻗었다.
“제 몸을 살피시겠어요?”
함정?
하지만 그녀에겐 일말의 적의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저희는 왕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누군가의 육체를 빼앗은 것이 아니랍니다.”
“……!”
“이것이….”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희의 본래의 모습이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또 한 번 이정기는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왕의 권능이 말한다.
‘진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그는… 하데스는 단순히 저를 되살리기 위해 크로노스를 조종했을 뿐이옵니다.”
페르세포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과정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오나, 저희에게 왕의 가족을 시해하거나 왕을 해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알아주시길 바랐습니다.”
이정기는 결국 그녀가 내뻗은 손을 잡았다.
유영아, 어머니의 것과 분명히 같은 손의 감촉이었으나.
‘아니야.’
페르세포네의 말은 진실이었다.
“육체를 빼앗지 않았다….”
왕의 지식이 머릿속에 이어졌다.
하데스.
그는 올림포스에 속해 있지만 그와 별개인 다른 차원.
‘저승의 왕.’
지하 세계에 속해 있는 자였다.
그렇기에 올림포스의 파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육체를 잃지도 않았다.
다만 페르세포네는.
‘가디언 중 소멸한 자들이 있습니다.’
올림포스의 파멸 속에 소멸되어버렸다.
크로노스는 그런 페르세포네를 되살리기 위해 크로노스를 조종, 이 시간대에서 올림포스가 파멸하기 전 그녀를 구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사랑.’
그것 때문.
“용서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왕께 고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가 왕께서 사악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말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저희의 육신이 왕의 부모님과 닮은 것은, 올림포스와 지구 조금은 다르지만 같은 것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라노스, 그리고 가이아?”
“맞지만 다릅니다.”
페르세포네는 이제 할 이야기를 모두 마쳤다는 듯 환히 웃으며 말했다.
“혼돈. 그러니 이제 혼돈을 잠재우고 진정한 왕이 되옵소서.”
그녀의 말이 끝나고 정신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정기가 바라서 그런 것이 아닌 할 이야기를 마친 페르세포네가 떠나는 것이었다.
쩌정!
완전히 깨어진 정신세계.
이정기의 주먹은 아까와 같이 하데스의 얼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하데스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자신의 아버지, 이강과 똑같은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짧은 단꿈을 꾼 것으로 만족한다는 듯 한 모습이었다.
“다시 만나 행복했다. 페르세포네.”
하데스의 목소리가 끝났을 때.
콰지지지지직!
검붉은 전류가 하데스의 몸 전체를 갉아 먹었다.
최강의 손자
지은이 | 규 명
발행인 | 조규영
펴낸곳 | 오에스미디어
주 소 | 경기도 하남시 조정대로 35 하우스DL타워 F915-1(9층)
대표전화 | 070-8233-6450
팩 스 | 02-6442-7919
홈페이지 | www.osmedia.kr
이 메 일 | [email protected]
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 위 책은 (주)타임비가 저작권자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이므로 발행자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 전자책과 내용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며 무단 복제/전제하거나 배포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최강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