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권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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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가는 내가 지불하지.
흐릿한 존재감 속에 빛나는 목소리.
머릿속을 왕왕 울리는 목소리는 메티스의 것과도 비슷한, 영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 또한 이정기가 익히 아는 자였다.
“헤르메스!”
마신, 이 시간대의 이건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가디언들.
그들 대부분은 소멸했으나 딱 한 명, 헤르메스만큼은 소멸이 아닌 죽음을 맞이했다고 들었다.
마신이 완성되기 전.
‘헤르메스는 과거에도 가장 먼저 할아버지를 만났어.’
미완성의 마신과 접촉했던 헤르메스였기에, 그때의 죽음은 소멸이 아닌 죽음으로만 끝이 났다고 했었다.
-뱃삯을 대신 내어주겠다는 말씀이신지요. 헤르메스.
카론이라 소개한 남자가 헤르메스의 영혼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
-왕의 격을 지닌 자의 뱃삯을 대신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계시지요.
끄덕.
고개를 끄덕인 헤르메스가 장벽을 앞에 두고 이정기의 곁으로 다가왔다.
-왕이시여. 오랜만에 뵙습니다.
“헤르메스.”
-제가 아는 그분과는 많이 다른 듯 보이는군요.
이 시간대에 존재했던 자신, 헤르메스는 그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가 웃었다.
-다시 한 번 왕을 뵈니 기분이 좋습니다.
원래의 시간대에서도 자주 마주쳤던 헤르메스.
하지만 지금의 웃음은 이정기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언제나 가면을 쓴 듯한 표정만을 보였던 헤르메스일진대, 지금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인간과 같은 모습이었다.
-제가 대가를 지불할 것이니 스틱스를 넘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대가는….”
이정기다.
두 왕의 자격을 갖추었고, 가디언의 왕이 되며 많은 지식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헤르메스가 한 말, 카론이 한 말의 의미를 안다.
왕의 격을 대신해 뱃삯을 지불한다는 것은 곧.
‘존재.’
존재 자체를 뱃삯으로 지불한다는 것.
소멸하지 않아 언젠가 부활할 수 있는 헤르메스가 소멸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염려 마십시오. 어차피 부활한다 한들 모든 것이 마신의 손에 넘어간 세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
-실낱같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저의 특기이옵니다.
농담처럼 말하는 헤르메스.
-왕이여.
그의 의지가 너무 확고하기에 이정기는 그를 설득할 생각을 멈추었다.
-하데스는 그 누구보다 왕을 적대할 것입니다.
“왜….”
-이 시간대는 그가 가장 원하고 바라오던 시간대입니다. 사실상….
헤르메스의 영혼이 떨리며 말했다.
-크로노스를 움직인 것이 하데스입니다.
“……!”
-누구보다 왕이 스틱스를 넘는 것을 막고 싶어 할 그이지만, 왕께서 법칙을 부술 수 없듯 그 또한 법칙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여 강을 넘는 것은 법칙, 왕은 무사히 스틱스를 넘을 수 있을 것이나….
염려의 얼굴.
-그의 방해가 쉽지 않을 겁니다.
헤르메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또한 이곳에 왕께서 찾는 자가 있습니다.
“주용….”
-예. 크로노스 또한 이곳에 있사오니 왕께선 바라는 바를 이루어 부디….
씨익.
-모든 것을 구하십시오.
그에 이정기가 화답하듯 말했다.
“헤르메스.”
-하명하소서.
“네 말이 맞아. 네가 알던 이 시간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기운을 끌어내 보였다.
가디언일 때의 가면을 벗은 탓인지 헤르메스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떨림, 경악, 놀라움, 그리고.
-그렇군요.
환한 웃음.
“어떤 방해도 날 막을 수 없을 거야.”
소멸을 각오한 헤르메스.
이정기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걱정을 온전히 덜어주는 것뿐이었다.
-파수견에 대해 경고하려 했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카론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의 왕께 제 경고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왕이여 부디….
화아아악!
헤르메스의 영혼에서 발하는 밝은 빛.
카론이 한 발자국 물러서 비켜섰으며 그와 동시에.
쩌저적!
보이지 않는 장벽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뜻하는 바를 이루십시오.
촤아아아아아!
강이 갈라진다.
그리고 서서히 헤르메스가 사라져간다.
“걱정하지 마. 모든 것을 돌려놓을테니까.”
자신이 이곳에 나왔을 때, 모든 것은 원상복구 될 것이다.
소멸했던 헤르메스, 너마저도.
스윽.
이정기가 벽에 생긴 균열을 통해 한 발자국 나아갔다.
-뱃삯은 지불되었으니, 건너시면 됩니다.
자신을 향해오는 카론의 목소리.
이정기는 천천히 카론을 보며 손을 내뻗었다.
강을 건너는 것은 법칙으로 막혀 있다고 하나 카론은 그런 법칙의 일부가 아닌 파수꾼에 불과하다.
그러니.
스윽.
헤르메스가 가는 길 길동무로 보내주마.
감히 자신의 앞길을 막은 죄.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하데스의 하수인인 죄.
헤르메스의 소멸을 부추긴 죄.
그러니.
“빌고 빌어.”
이정기는 카론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로브 속에 드러나지 않은 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이기길. 그래야 너도 소멸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테니까.”
콰직!
* * *
‘하데스가 이 모든 일의 주동자입니다.’
헤르메스가 남겼던 말을 기억하는 이정기.
이정기는 쾌속하게 스틱스를 나아가고 있었다.
이정기가 움직이면.
쏴아아.
스틱스는 갈라졌던 상처를 다시 매꾸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타앗!
그 사이를 더욱 빠르게 나아가는 이정기.
헤르메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엔 또 다른 법칙이 있다.’
그리고 그 법칙이 자신의 앞길을 막을 것이다.
꽈악.
그렇다고 망설일 것은 아니다.
뚫고 나아가 원하는 것을 쟁취할 것이다.
타앗!
어느새 스틱스의 끝자락을 넘어선 이정기.
그의 눈앞에.
쿠웅!
커다란 문이 나타나 있었다.
기이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문.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저 문이 바로 하데스에게로 향하는 문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정기가 문에 다가가려는 순간.
‘법칙.’
헤르메스가 말했던 또 다른 법칙이 생각남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
등 뒤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몰아쳐 이정기를 덮쳐왔다.
화르르륵!
이정기가 있던 장소가 새까맣게 타올라 흑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불길은….”
화염이 스쳐 지나갔던 팔이 아려온다.
“나도 위험하겠는데.”
지금 자신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불길에 당한 상처는 더디게 회복되며 계속해서 넥타와 마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이제 하나밖에 없다.
‘법칙.’
세계의, 차원의 근간을 이루는 것.
왕조차 벗어날 수 없는, 본질 그 자체의 것.
인간은 나이가 들면 죽는다는 법칙, 인간은 어미의 배에서부터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법칙.
그러한 진리들.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것.
이 불길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불길을 뿜어낸 것.
-크르르르.
저것 또한 법칙이다.
“파수꾼….”
이정기가 뒤 돌아 나타난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말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닌.
‘내가 문에 접근하여 생성된 것.’
즉 법칙에 의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헤르메스의 존재를 뱃삯으로 치렀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은 생자, 죽은 이가 아니었다.
죽은 이가 아닐 때 허락받지 않은 자가 문을 넘어선다면 나타나는 파수꾼.
아니.
“파수견인가.”
세 머리를 지닌 지옥견.
-크르르륵!
녀석이 이정기를 덮쳐오며 몸을 흑염으로 감쌌다.
피하기 위해 사방을 살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다.’
녀석은 존재 자체가 죽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듯, 결코 피할 수 없는 것.
콰득!
그것이 파수견.
“케로베로스…!”
이정기의 왼팔이 녀석의 아가리에 물려있었다.
다행이라면 벼락이 이빨의 침식을 막았다는 점.
또 다른 아가리가 이정기의 목덜미를 물어올 때.
콰앙!
이정기는 망설임 없이 녀석의 머리통을 쳐냈다.
“…….”
다시 벌려진 거리.
‘녀석을 죽인다면.’
또 법칙이 무너질 것이다.
처음 스틱스 강 앞에 법칙을 만났을 땐 이정기는 그저 본능적으로 법칙을 부수면 안 된다는 것만을 깨달았을 뿐 실제로 법칙을 부쉈을 때 일어날 파장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틱스를 넘으며 왕의 지식이 깨어났다.
‘만일 법칙을 부순다면.’
시간대가 무너진다.
법칙은 시간대를 구성하고 있는 커다란 요소 중 하나.
저것이 무너지면 지금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보다는.
‘돌아가야 할 시간대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죽일 순 없겠어.”
-크르르르르.
녀석을 부수면 안 된다.
대치하고 있는 상황.
녀석이 중간의 아가리를 벌린 채 흑염을 모으고 있었다.
죽여서는 안 되고, 저 문으로는 나아가야 한다.
따돌린다는 선택지도 불가능했다.
자신이 문에 닿는 순간, 녀석은 문과 합일되어 자신의 목을 노릴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아아.
이정기가 기운을 끌어올렸다.
결론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났다.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리지.”
우웅.
세상이 진공으로 변한 듯 먹먹해지는 귀.
모든 힘과 공기가 녀석의 아가리에 맴도는 흑염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었다.
녀석이 그것을 발사할 때.
파앗!
이정기는 몸을 움직여 녀석의 등 뒤를 점했다.
이정기를 노려오던 흑염 또한 이정기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방향을 꺾어.
화르르륵!
이정기의 온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큭!”
처음 예상했던 대로 이 흑염은 죽음 그 자체였다.
왕의 자격, 초월한 존재라 한들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공격.
그러나.
‘그 마땅한 진리도.’
세상에는 이겨내는 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꽈아악!
죽이지 않는다.
생포하여 포박한다.
이정기의 건틀렛, 벼락이 길게 늘여지며 쇠사슬과 같은 형태를 취했다.
순식간에 늘어난 벼락은 케로베로스의 세 머리통을 휘감았고.
파지지지짓!
벼락의 전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흑염과 벼락.
법칙과 권능.
그 승자는.
“크하…!”
이정기였다.
새까맣게 그을린 몸.
파앗!
넥타로 그을음을 떨어내고 천천히 화상을 회복하는 이정기가 다시금 문 앞에 섰다.
-크르…. 크르르….
그 뒤로 낮게 신음하고 있는 케로베로스.
마침내 녀석의 커다란 동체가 무너져 내렸을 때.
촤르르.
녀석의 몸을 죄던 쇠사슬이 이정기의 왼팔로 돌아왔다.
죽은 것이 아니다.
잠시 기절한 것뿐이다.
그렇게 이정기는.
끼이이익-!
문을 열었다.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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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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