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권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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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정기와 이건은 저번에 이곳에 왔을 때 관리자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 일부러 숲의 파괴를 최소화하고 몬스터들의 학살을 자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뚝, 뚜욱.
화르륵!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며 이곳에 왔다.
선명히 드러난 파괴의 흔적들.
푸드드드.
성난 숲의 울림.
끼에에에엑!
숲의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사방팔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속에서.
“…….”
관리자는 닮아있는 두 조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 없는 관리자의 얼굴.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건가?”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지나쳐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잊은 지 오래지만, 아직 몇 번의 형벌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관리자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미소일까.
그도 아니면.
“어떻게….”
경악일까.
무엇이 되었건.
씨익.
두 조손은 서로의 변화에 만족하며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관리자의 태도와 표정은 분명 변화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성장이 가능하다니.”
“내 손자를 뭐로 보는 게냐? 녀석은 왕이다.”
이건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도 할 수 없었다면 애초에 널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구구구.
던전의 변화를 무시하며 이건은 말했다.
“이제 이야기를 해볼까?”
본론.
“헌터들이 힘을 잃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 또한 이곳 던전의 힘을 끌어다 쓰고 싶다.”
마지막.
“왕의 시험을 받아야 한다.”
관리자의 눈이 이건에게서, 이정기에게로 향했다.
“이만한 힘을 가졌을진대, 더 원한단 말이냐?”
“얻을 수 있는 것은 얻어야겠지.”
관리자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궤를 벗어났다. 왕의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지만 왕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왕의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관리자가 말했다.
“그 힘의 균형이 깨져버릴 수도 있다.”
녀석은 그저 그런 티탄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주어선 안 될 것을 준 존재.
그리하여 티탄에게 버림받고, 쥬피터에게 형벌을 받게 된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이.
‘녀석을 증명한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죄인.
그런 죄인에게 내려진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죽음보다 더한 형벌일지라도, 결국 그를 살려둠으로써 지구의 인간들은 다시금 그의 불을 받아들었다.
‘왜?’
던전에서 추방당한 후 가디언을 소집하고 이정기와 이건은 관리자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말했듯 녀석은 그저 그런 티탄이 아니었다.
‘태초의 티탄 중 하나.’
즉.
“티탄의 왕, 프로메테우스.”
이건이 그를 불렀다.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야. 정기는 스스로의 길을 찾았다. 그것이 나의 길이 아니고, 쥬피터의 길이 아닐지언정 새로운 왕의 길일 것이다.”
“새로운 길….”
“버리지 않는 것. 차곡차곡 쌓아 스스로 감내하는 것. 그것이 저 미련한 녀석이 찾아낸 길이다.”
“……!”
관리자의 눈에 이채가 번졌다.
“시간의 역행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멈출 수도 없겠지. 하지만 바꿔 생각해봐라.”
이정기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말하는 이건.
“정기가 왕의 시험을 치르고 또 다른 무언가를 쌓는다면, 그 시간의 역행이란 것도 더 잘 막지 않겠느냐?”
“…….”
확실한 변화가 있었다.
관리자의 눈에 일어나는 파문.
그것은 관리자가 고민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미 흐름이 바뀌었다. 네 놈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승기는 기울었어. 네가 알려주지 않는다 해도 찾아낼 것이야. 그러니 선택해라.”
이건의 통보와도 같은 말.
“운명은….”
관리자는 자조하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인가?”
“예언…?”
바로 그 때.
끼에에에엑!
사방에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퍼져가기 시작했다.
분명 지나오는 길 몬스터란 몬스터는 씨를 말리듯 사냥했건만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는지 한데 모여 움직이고 있었다.
전에도 겪었던 일.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관리자의 얼굴에 다시금 표정이 사라졌다.
“형벌은…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두고 보시죠.”
이정기는 관리자의 표정 한켠에 서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미 타버려 재만 남아버린 것만 같은 감정.
“보여드리겠습니다.”
희망을.
끼에에에엑!
형벌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눈을 감고 있는 관리자.
이미 수십, 수백, 수천 번은 같은 경험을 했을진대.
덜덜덜.
그는 분명 떨고 있었다.
살아있는 채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온전한 정신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는 그것에 익숙해져 공허해진다고도 하지만.
‘그런 이들은 이런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고통이란 것은 참는 것이지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쒜에엑-!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독수리들.
쿠쿠쿵!
지진처럼 달려들고 있는 늑대와 짐승들.
“이번에는 추방해도 당하지 않을 것이야.”
이건은 선언과 같은 말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또 한 번 추방할 힘이 내겐 없다.”
“그렇다면 잘 됐군.”
이건의 목소리.
“이번에는 네 형벌의 고통을 끝내주마.”
타앗!
이건이 땅을 박차고 허공을 밟았다.
날개라도 달린 듯 떠 있는 이건의 발밑으로 보이지 않는 기파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주먹을 내지를 때.
파앙!
경쾌한 소음이 울려 펴졌다.
다만.
콰드드드드드득!
그 소리의 결과가 결코 경쾌한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갈려져 분쇄되어버린 몬스터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쒜에엑!
또다시 달려드는 몬스터들.
우웅.
그때 뒤에서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건이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없는 찰나.
파앗.
허공에서 볼텍스의 힘으로 방향을 뒤바꾼 이건.
그의 곁으로.
콰콰콰콰쾅!
이건의 경쾌함과는 다른 폭발적인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이 쏘아냈던 것과 똑같은 볼텍스.
그리고 그 결과도.
콰드드드드득!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시꺼먼 도화지 위에 흰색의 먹으로 줄을 그은 듯 볼텍스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이 없었다.
하나하나가 극히 위험한 몬스터로 치부되는 녀석들이었지만.
콰쾅! 쾅!
이건과 이정기의 앞에선 오크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럴 것을 굳이 추방해 가지고.”
이건이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을 때.
“끝이 아니다.”
관리자는 전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끝이… 나지 않겠지.”
쒜에엑-!
지워졌던 흰 자국이 다시 검게 물들고 있었다.
“…….”
“…….”
지워도 지워도 다시 나타나는 몬스터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형벌은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
“너희는 이곳을 던전이라 불렀고, 너희가 아는 던전이란 무엇이지?”
관리자의 질문에 떠오르는 무언가.
‘무한.’
끝없이 몬스터들이 생성되어 또다시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곳.
몬스터를 처치하고 던전을 정리해도 시간이 흐르면 몬스터들은 재생성되어 던전을 지킨다.
그렇다.
“형벌은 내가 죽음의 고통을 전부 느끼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끝낼 수 없는 싸움.
허나.
“그런 것은 없다.”
이건은 단호히 말했다.
“끝나지 않는 것은 없다. 신이라 불리던 가디언도, 티탄도 그 끝이 있다. 신들의 세계라 불리우던 올림포스에도 그 끝은 있다.”
끝이 없다면.
“애시당초 그것들의 끝 또한 없었어야 하는 것이다.”
“……!”
“끝은….”
이건의 목소리.
“있습니다.”
이정기가 바통을 받아 말했다.
어느새 하늘과 땅 그 모든 공간을 채운 몬스터들.
“쓰러트리고, 쓰러트리고 또 쓰러트린다.”
이건.
“그러다 보면….”
그는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웃고 있었다.
“끝이 오는 법이야.”
휘이이잉!
이건의 전신에 휘몰아치는 와류.
그것이 점차 탁한 기운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 *
빠직! 빠지지직!
검붉은 전류.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던 그것이 한 사내의 손으로 다시 돌아와 자취를 감추었다.
주륵, 뚝.
사내의 온몸에는 핏물이 범벅되어 흘러내리고 있었고.
훼엥.
그의 몸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또 다른 사내 또한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악귀라 하면 악귀일 것이고, 숭고한 희생을 한 영웅이라면 영웅일 것이다.
그들의 꼴은 그러했다.
끝이 없는 싸움이라 생각했던 것.
“동이….”
어제의 낮부터 지속되어 왔던 싸움은.
“터오는군.”
마침내 새로운 해를 보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지구의 시간은 24시간을 기준으로 흐른다지만, 이곳의 시간은 아직 얼마의 시간을 기준으로 새로운 해가 뜨는지 모른다.
그런 시간이었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이렇게 싸워본 건 얼마 만인가.”
한 명의 강자를 상대로 하는 싸움이 아닌 무한정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버티는 싸움.
적들은 일격에 쓰러진다 해도 그 수가 무한이라면 가히 난이도를 책정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스윽.
지친 얼굴로 이정기와 이건이 관리자를 바라보았다.
덜덜덜.
그 또한 엉망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는 처음과 같이 떨고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꾸욱.
그의 표정은 바뀌어 있었다.
절망 속의 공허.
그럼에도 두려움을 내버리지 못해 떨고 있던 그의 얼굴.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에는.
“어떤가.”
새로운 것이 가득 차 있었다.
“말했지 않았나. 끝은 있다고.”
희망, 그리고 환희.
“아아….”
그는 울 듯 신음하고 있었다.
“아아아아-!”
관리자의 절규와 같은 목소리가 핏물로 적셔진 대지와 청명한 하늘에 퍼져나갔다.
“얼마 만인가…!”
그는 어느새 무릎 꿇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고통받지 않는 하루, 공포에 공허한 하루를 보내지 않은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가.”
셀 수 없는 세월, 매일 똑같은 하루.
그것이 공포와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라면.
“아아아….”
그의 지금 모습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었다.
꾸욱.
그가 피로 적셔져 진흙이 되어버린 땅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다음 날은 또다시 온다.”
이건과 이정기는 확실히 형벌의 끝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 하루뿐.
내일이 되어 오후가 지나면 또다시 세상은 검은색으로 덧칠되어 관리자에게 고통을 선사할 것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루의 평온. 그것으로 너희는 내게 충분한 대가를 주었다.”
일어선 관리자가 손을 내뻗었다.
우웅.
“가라. 왕의 시험으로 향하는 길일지니.”
열려진 포탈이 아가리를 벌린 채 이건과 이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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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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