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권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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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언덕 위에 앉아 있는 녀석.
“이제야 날 찾아오네?”
너무도 태연한 목소리에 이정기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제는 전보다 익숙해져버린 녀석의 얼굴과 분위기였다.
그러나.
울렁.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거부감과 불쾌감은 이상하리만치 없어지지 않았다.
“조금 서운한걸. 제법 합을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날 싫어하면 실망인데.”
“어쩔 수 없는 거야. 본능적인 것 같으니까.”
이정기의 대답에 이번엔 녀석이 웃었다.
“본능이라.”
실소가 점점 차가운 미소로 변했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감정도 알겠군.”
지금껏 녀석은 자신을 볼 때마다 미소를 머금고 있었었다.
마치 상황을 즐기듯, 아니 자신을 향한 적개심이 없다는 듯.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나도 널 볼 때 같은 걸 느낀다는 걸 말이야.”
녀석 또한 마찬가지다.
지독한 불쾌감.
역겨움.
참을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
지금껏 숨기고 있던 녀석의 감정들이 녀석의 얼굴 위로 여실히 드러났다.
“널 보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아나?”
“…….”
“더러운 위선자, 대가리 속이 꽃밭인 멍청한 새끼. 우선순위조차 모르고, 행동 하나하나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녀석은 언덕 위에서 일어나 이정기를 향해 내려오며 말했다.
“힘을 잃고 왜 더 빨리 강해지지 않았지? 왜 주변 사람을 챙겼지? 할머니? 그녀가 네게 무엇을 해주었지? 네게 가장 중요한 것은….”
번뜩.
“할아버지가 아니었던가?”
녀석은 점점 자신과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너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빠르게 강해졌어야 한다. 네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할머니란 인간의 시험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 담고 강해져 할아버지를 도우러 갔어야 한다.”
자신 또한….
‘생각했던 것.’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자신의 속 깊은 곳에 있던 마음을 찔러오고 있었다.
“동료? 그따위 것이 뭐가 중요하지? 그들이 네게 도움이 되나?”
씨익.
다시금 피어난 미소.
하지만 그 미소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가라앉는 흉소였다.
“네 호의와 노력으로 무엇이 달라졌지? 버러지들 사이에서 강해진 것? 그것이….”
씨익.
“네게 도움이 됐던가?”
녀석은 자신이다.
그렇게 말했었다.
과연.
“한때 그렇게 생각했지.”
이정기가 했던 생각들이었다.
“하지만 효율적인 것이 옳은 것만은 아니야. 인간이기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거다.”
“인간….”
다시금 무표정해진 얼굴.
어느새 두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녀석과 이정기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네 문제다.”
차가운 목소리가 서늘하게 이정기를 어루만졌다.
“널 겨우 인간 따위라고 생각하는 것.”
“…….”
“우리가 겨우 인간 따위라고 생각하는 것.”
녀석은 분노에 잠식된 듯 보였다.
“우린 그보다 월등한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디언이라는 거냐?”
이정기의 질문에.
“아니.”
녀석은 또 한 번 답했다.
“그보다도 월등한 존재지.”
한 치의 망설임도, 의문도 없는 대답.
그에 이정기가 말문이 막혔을 때.
“네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안다. 버리는 것.”
씨익.
녀석은 다시 웃었다.
“그래서 날 버리러 왔겠지.”
“……!”
“오늘.”
스멀스멀 녀석의 온몸에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끝을 보자.”
그 기운이 이정기를 향해 몰아치는 것은 녀석의 말이 끝난 것과 같은 타이밍이었다.
* * *
“얼마나 준비되었지?”
이건의 말에 마동철이 다가와 말했다.
“1차 테스트만 남았소. 형님. 결계 설치는 끝났고, 그 결계를 확장하기 전 강도를 확인해봐야 하오.”
마동철은 결계를 준비중이었다.
전장으로 선택된 대한민국.
티탄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가두고, 그들과 온 힘을 맞부딪힐 전장을 만드는 일.
이정기와 이건이 관리자를 만나고, 이정기가 홀로 훈련하는 동안 마동철과 장인들은 그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니.
‘그 전부터.’
마동철은 사실 과거부터 이 일을 연구하고 준비해오고 있었다.
이건의 말에 따라.
‘그 무엇이라도 가둘 감옥이 필요하다.’
혹여 올림포스가 무너졌을 때를 대비하여 모든 것을 가둘 수 있는 감옥을 준비했다.
이정기를 만나기 전까지, 그가 이건의 비책을 가져오기 전까지 손을 잃었던 마동철.
그럼에도 그가 장인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해오던 것이 이것이었다.
허나 그 무엇이라도 가둘 수 있는 감옥을 만드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던 상황.
이성의 도움, 아니 최명희의 도움으로 계속하여 연구했지만 결코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해?”
“지금까지로서는 최고요.”
마침내 그 결과를 보았다.
마동철 홀로 해낸 일이 아니었고, 새로운 장인들의 도움도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존재.
“녀석이 잘 돕나 보군.”
헤파이스토스.
그의 도움이었다.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우는 마동철이 수십년에 가까운 세월을 쏟아부어 준비해도 실패했던 것.
하지만 천재 중의 천재가 몇 천 년을 연구한 것은 그만한 결과가 있었다.
또한.
“이미 만들어본 경력이 있는 자이니까요.”
헤파이스토스는 이미 이건이 원하는 것을 이룬 전적이 있었다.
‘타르타로스.’
티탄들을 가두었던 감옥.
그것을 다시 재현하는 일에 불과할 수 있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동철이라는 또 한 명의 천재, 그리고 수많은 장인이 도왔고, 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좋군.”
이건의 답.
그때.
쿠쿵!
저택 지하에서 커다란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마동철이 눈을 치켜떴다.
“뭔 일이요?”
이건 저택의 지하 설계.
그 또한 마동철이 참여한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던전을 봉인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둔 장소.
그곳이 지금….
쿠쿠쿵!
무너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시작되었나 보군.”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이건의 대답.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으며 말했다.
“결계. 작동시켜.”
“……! 지금?”
“첫 테스트다.”
쿠쿠쿵!
“이대로 내버려 두면 지하가 파괴되고 준비해온 것이 망가질 거다.”
“그런….”
“이제껏 봐왔으면 충분히 알거 아냐? 자꾸 멍청한 소리 할래?”
이건의 답에 마동철이 입을 다물었다.
“첫 테스트이자, 성능을 제대로 확인해야 할 테스트일 거다. 티탄들 몇 놈 가둔 것보다….”
쿵!
거세지는 진동.
“더 큰 충격을 막아내야 할 테니까.”
어느새 이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후우.”
숨을 내쉰 마동철, 그의 눈이 넥타로 인해 붉게 물들어갔다.
“……키아.”
알 수 없는 중얼거림, 그 끝에.
“발동.”
심상치 않은 기운이 저택 전체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 * *
이정기가 지금껏 배우고 쌓아온 기술들.
새롭게 얻어낸 기술들.
전투법.
힘의 활용법.
그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불길이 치솟고, 폭풍이 몰아쳤으며 독물이 범람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쾅!
서로가 같다는 것이었다.
녀석과 제대로 맞서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진 사소한 신경전을 벌이거나 녀석이 곧잘 자신에게 협력해왔었다.
그러나 직접 상대하게 된 녀석은.
“이제야 뭔가 잘못된 것을 알겠나?”
씨익.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녀석도 할 수 있다.
화륵!
붉은 네메아와 청색의 네메아가 맞부딪혀 서로를 물어뜯었고.
휘이이잉…. 쾅!
방출된 볼텍스가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듯 똑같은 싸움.
똑같은 기술.
그러나.
화르르륵!
붉은 네메아는 결국 청색의 네메아에게 집어먹혀 소멸해버렸다.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하나?”
녀석은 자신이다.
그렇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녀석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망설임은 독이다.”
“망설임은 독이다.”
두 주먹을 마주한 채 서로가 말했다.
“인간의 망설임은, 온정은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
“망설이지 마라. 네 앞에 선 것은 오롯한 적일 뿐이니.”
콰아앙!
터져나오는 폭발 속, 녀석이 웃고 있었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다.”
쾅!
마침내 녀석의 주먹이 이정기의 가슴팍에 닿았다.
처음은 그저 둔탁한 무언가에 얻어맞은 충격이었지만.
쿵.
속에서부터 무언가 울리고 있었다.
곧이어.
콰아아아앙!
이정기의 뒤편으로 지형이 부숴져나갔다.
이정기의 내부를 진탕시키고, 그 충격파가 이어져 나온 것.
“커억!”
한 줌이라 표현할 수 없을 핏물을 이정기가 토해냈다.
“여지껏 네가 뭘했지?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네가 뭘 했냔 말이다.”
녀석은 여유로이 이정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내게 기댔지.”
“……!”
“내 힘으로 너는 일어섰다. 내 힘으로 너는 위기를 극복했다.”
어느새 녀석은 자신의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일까? 보지 않았나? 너와 내가 같음을. 너와 내가 동등함을. 그럼에도 너는 내게 기댔고, 그것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어떻게?”
씨익.
또다시 웃는다.
“너는 내 망설임이다. 지금껏 네가 주체라고 생각했겠지?”
높이 치켜들어 올려진 주먹.
“아니. 그저 두고 본 것뿐이다. 할아버지가 원했으니까. 나 스스로도 그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궁금했으니까. 널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그 주먹이….
“넌 실패작이야.”
천천히 이정기를 향해 내려떨어지고 있었다.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히 보이는 느릿한 주먹이었지만 이정기는 피할 수 없었다.
그저.
‘넌 실패작이야.’
녀석의 말을 곱씹으며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단어.
‘완패.’
그것을 기억하며.
쾅!
이정기의 정신은 거기서 끊어졌다.
* * *
“후.”
눈을 뜬 이정기가 호흡을 고르며 사방을 둘러봤다.
그리고 천천히.
꽈악.
주먹을 쥐었다 펴며 스스로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얼마나 지났지?’
내면세계 속의 시간은 바깥과 다르다.
언제는 빠르고, 언제는 느리고.
지금은 어떤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후.”
다시 숨을 내쉰 이정기가 몸을 일으키다,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와 계셨습니까?”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울리자,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부터.”
이건.
그가 서 이정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셨습니까? 잘 해결됐습니다.”
이정기의 말에.
“결국 네가 이긴 모양이구나.”
싸늘한 표정의 이건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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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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