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권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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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릿.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낌.
온 몸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미친 듯 빠르게 뛴다.
에레보스를 상대하며 느꼈던 공포와는 또 다른 감정.
그건.
‘경외.’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내 두 무릎을 꿇어 복종하고 싶어지는 마음.
“기억나느냐?”
그래, 이것이다.
에레보스의 공포를 쉽사리 떨쳐 낼 수 있던 까닭이자, 이정기가 지금까지 그 무엇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였다.
벽과 격.
그 모든 것은.
“예. 기억나요. 할아버지.”
이건으로부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무릎을 꿇는다거나 뒤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푸하!”
오히려 개운한 마음과 웃음이 나온다.
자신의 삶.
자신의 과거들.
그 모든 것이….
짜르르.
지금 이건으로부터 깨어나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무뎌졌었구나.’
지구에 와서도 날카롭게 갈고 닦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감각과 육체, 그 모든 것이 무뎌져 있었다.
찌르르.
온몸을 다시 한 번 울리는 감각.
뒤이어.
화악-!
시야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넥타의 레벨업.’
넥타가 한 단계 성장하면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진화와 같은 비약적인 성장을 한다.
그동안 멈춰있던 넥타의 레벨이.
[넥타 레벨.]
드디어.
[9를 달성하셨습니다.]
오른 것이었다.
티탄을 쓰러트리고 가디언의 충성을 받으면서도 달성하지 못했던 레벨업이 이건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만으로 상승했다.
“그것이다.”
이건이 그런 이정기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너는 이미 나와 쥬피터에게서 그 감각의 한계를 경험할 수 있게 훈련했었다.”
옛 저녁에 본래의 힘은 되찾았다고 생각했었건만.
“네가 활용할 수 있는 감각과 힘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란다. 정기야.”
그게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자신에게는 남아있던 잠재력이, 가지고 있던 힘과 감각이 있는 것이었다.
고오오.
이정기가 이건에게 맞추어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넥타의 레벨이 올라 갑작스레 진화한 감각을 따라가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씨익.
몸에 맞춘 듯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너와 내가 이렇게 서 있는 것은.”
“그러게요.”
“언제나….”
두 조손은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내게 흠씬 두들겨 맞고 바닥에 나뒹굴던 우리 귀여운 손자가 생각나는구나.”
“할아버지.”
파앗!
끝없이 치솟을 것 같았던 이정기의 기운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스윽.
그런 이정기를 바라보는 이건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오늘은 어떨지 모릅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컨디션이 최상이거든요.”
코팅.
이건이 가르쳐준 기술로 마력을 집약시켜, 넥타를 뚫을 수 있게 만든 특별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이정기는 그 코팅의 최종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을 실천 중이었다.
스스로가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기운을 자신의 몸에 둘러싸 강화시킨다.
막대한 마력의 소모가 있겠지만.
‘그 위력은 적어도 두 배 이상.’
아니 세 배는 족히 넘으리라.
동시에.
파앗!
이건에게서 끓어오르던 기운도 갈무리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 역시 할아버지는 진작 하실 수 있던 거군요.”
“그래, 이것의 이름은….”
이건이 만든 코팅.
그 진화형의 능력을 당연히 이건 또한 느끼고 있었다.
“암브로시아라고 한다. 물론 아직 완성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쾅!
둘의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 * *
우지끈!
빌딩만한 크기의 나무에 쩌억 금이 가며 부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주변에는 부러진 나무의 잔해들이 가득했고.
화륵!
그 뒤의 숲은 화마에 휩쓸려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쾅!
자욱한 연기 속에서 들려오는 폭음.
쾅!
폭음은 어느 한 나무에서부터,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또 다른 나무로 이어져가고 있었다.
팟!
폭음과 섬광이 일 때 나무는 또다시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불길은 더 이상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거세지고 있었다.
시끄러운 숲속에 마침내 고요가 찾아들었다.
타닷.
이제 들리는 것은 폭음 대신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뿐.
그 속에서.
“하아.”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호흡을 조절하기 힘들다.
이것이 불길이 산소를 태운 것 때문인지, 스스로의 몸이 지친 것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상태는 엉망이었다.
파르르.
발끝부터 손끝까지 온몸이 저리고 떨려온다.
씨익.
그럼에도 입가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하아.”
호흡을 정리하는 반대편.
“후.”
짧게 치고 나오는 호흡이 들려왔다.
“많이 성장했구나.”
그곳에서 웃고 있는 이.
바로 이건이었다.
백발의 흰 머리, 움직이기 편한 옷차림의 그.
하지만 그의 뒤로 일렁이는 불꽃들과….
우지끈!
뒤늦게 부서져 내리는 거대한 고목들 속에서의 그의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는….
‘무신.’
경외 받아야 마땅할 존재처럼 보이고 있었다.
폭력으로써 만물을 무릎 꿇리고, 만물의 존경을 받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이건이었다.
하지만.
스윽.
그의 뺨에 얇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법…, 매서워졌어.”
겨우 그것 하나.
하지만.
“다를 거라고 했죠?”
이정기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닿았다.
할아버지가 봐주느라 일부러 맞아주던 과거와는 달랐다.
“어느 정도에요?”
“무엇이? 내 전력의 얼마나 썼냐, 이 말이냐?”
“예.”
호흡을 정리한 둘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말했다.
“사십.”
“……!”
이건의 말에 이정기가 눈을 치켜떴다.
전력의 사십 퍼센트.
누군가에게 턱없이 느껴질지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좋네요.”
이정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만한 수치였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는 에레보스를 상대할 수 없을 거다.”
이건은 이정기에게 자만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에레보스가 본 신을 완벽히 되찾았다면, 나도 힘들었을 것이야. 네가 만났을 때의 녀석은 티탄들의 몸을 빼앗아 기워 만들어진 것과 같은 누더기였을 뿐이다.”
자만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라.
“칭찬 감사합니다.”
이정기는 그것이 이건의 칭찬임을 알고 있었다.
씨익.
다시 웃는 둘.
누군가 이 두 조손의 꼴을 보면 미친 것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 분명했다.
손자와 할아버지.
그 둘이 실제로 목숨을 걸고 혈투를 하며 서로의 목숨을 노린다.
순도 백 퍼센트의 살기를 띤 채 상대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었다.
상처입히고, 엉망으로 만들며.
씨익.
웃고 있는 둘의 모습은 누가 봐서도 정상은 아니라고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건과 이정기였다.
또한, 그것이.
“아직 끝이 아니겠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올림포스.
지옥과 같은 땅.
할아버지는 일찍이 올림포스의 최상위 포식자인 타이탄을 쓰러트렸지만, 할아버지 또한 무적은 아니었다.
수없이 몰려드는 타이탄 떼 속에서 할아버지가 위기를 겪었던 적도 수차례나 되었다.
하물며 자신은 어땠던가.
배우고 또 배워도 올림포스는 어린 자신에게 위험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그 하나뿐.
그걸 위해 서로는 서로를 위해 온몸을 바치며 살아왔다.
이정기가 살기 위해 이정기가 강해져야 했다.
이건이 살기 위해 이정기가 강해져야 했다.
그렇기에 할아버지는 남들이 상상조차 못 할 방식으로 자신을 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싸움은 남아있다.’
지금은 두 조손이 회포를 푸는 방식이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것이라도, 그날이 끝나면 남들과 같으리라.
‘정기야.’
‘할아버지.’
둘은 그렇게 눈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싸움.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달라진 것은 없다.
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그걸 위해.
쾅!
둘은 또다시 부딪혔다.
* * *
타앗!
이정기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파앗!
한 주먹에 네메아의 기운을 담아냈다.
화륵!
타오르는 사자의 형상이 마침내 그 모습을 완성할 때.
쾅!
그 주먹이 망설임 없이 뻗어져 나가 폭발을 일으켰다.
우지끈!
거대한 고목이 부러지는 소리.
하지만.
-그어어어어어!
지금은 그 고목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쿵!
숲 안에 가득했던 고목들.
지금 그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냥이다.’
이건과 이정기는 다시 맞부딪힌 것이 아니었다.
둘의 회포를 풀기 위한 곳으로 이만한 곳이 없다지만, 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분명히 존재했다.
‘관리자를 찾는 것.’
그리고 그 길을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이곳은 던전이었다.
당연하게도.
-그어어어어어!
몬스터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쾅!
고목에 주먹을 박아넣은 이정기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타이탄이랑 비슷해….”
이곳은 아폴론의 말마따나 올림포스와 몹시 흡사한 곳이었다.
공기도, 마력 밀도도.
하지만 그 환경이 다르고.
-그어어어어어!
몬스터들 또한 달랐다.
올림포스는 말 그대로 게이트에 존재하는 모든 상위 몬스터들의 집합소라 말할 수 있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지옥과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고 강해진 곳.
그리고 그 끝에 타이탄이 있다면.
휘이이이잉!
이곳은 모든 몬스터가 타이탄이나 다를 바 없는 위용을 펼쳐내고 있었다.
나무 고목의 줄기를 피한 곳에.
꽈악!
자신을 낚아채는 강철의 발톱이 느껴졌다.
독수리와 같은 형상.
그러나 그 크기는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이 거대했고, 발톱에서 느껴지는 힘 또한 세상 그 무엇이든 부숴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했다.
그러나.
파악!
이정기의 주먹이 닿자 녀석의 발톱이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후.”
호흡을 조절한 이정기가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킨 채.
파지짓.
네메아의 기운이 맺힌 주먹의 반대 주먹을 내뻗었다.
우르르르르!
천둥이 치고.
쾅!
번개가 내리찍는다.
그리고.
쾅!
타이탄과 비슷한 크기의 독수리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메우지 못한 채 바닥에 추락했다.
“……!”
이정기가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적은 아니었다.
“얼마나 쓰러트렸느냐?”
“일곱 정도 해치웠어요. 할아버지는요?”
이정기의 말에.
파앗.
이건이 볼텍스를 내뿜어 일직선상의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분쇄해버렸다.
그러자 곧 드러나는 광경은.
“할아버지야말로 성장하셨네요.”
수십의 되어 보이는 시체들이었다.
“예끼 욘석아.”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잠시 미소 지을 때.
쿵! 쿵!
“움직이려나 봅니다.”
무언가 커다란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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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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