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강의 손자-236화 (236/284)

제10권 11화

236

에레보스와의 싸움, 그리고 바로 이어진 이건과의 싸움.

그때의 부상이 절대로 만만치 않을 텐데.

“그래. 급히 날 찾았다고.”

최명희의 안색은 여느 때와 다를 것 하나 없었다.

평온하다기보다는 단단한 얼굴.

씨익.

그 모습에 이정기는 웃을 수 있었다.

‘할머니.’

이제야 진심으로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이정기가 아무 말이 없자 최명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부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이었지만 인배, 그 녀석이 예상외로 깊숙한 곳까지 관여했어.”

오랜 시간 이성을 손아귀에서 놓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주인배 또한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야금야금 중요한 것들을 감춰두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주인배는 죄책감에 협조할 테지만.

“그 과정에 시간이 필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갈가리 찢어지고 숨겨진 것들을 다시 원복시키는 데는 당연하게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이성에 독이 잠자고 있을 줄이야.”

탄복하는 최명희.

마침내.

“주용입니까?”

이정기의 입이 열렸다.

스윽.

최명희가 정리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이정기를 바라봤다.

“작은아버지들이 이성에 숨겨놓은 독, 작은아버지들이 무력화된 지금 그것을 원복시키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성은.”

이정기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머니의 제국이니까요.”

후계자라 생각하여 편을 들었던 가신들이 후계자들의 실각을 보고 무얼 느낄까.

제 앞날을 위해 당장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원래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지금의 이성이 그랬다.

주인배와 주형태가 아무리 이성을 차지하기 위해 암수를 써 두었다고 한들 완전히 후계자에서 탈락한 둘이 망쳐놓은 것을 되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이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는 뜻은 또 따른 누군가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아낸 게냐?”

“알고 계셨습니까?”

최명희가 의자를 천천히 돌려 창밖을 봤다.

“의심은 했었지.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그분은 분명 이런 일을 벌일 동기가….”

최명희의 눈이 자그맣게 빛났다.

“죽었으니까.”

“……!”

무슨.

“주용은 죽었다. 이혼 후 그에게 계속해서 사람을 붙여뒀었지. 네 말대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를뿐더러, 이성의 지배구조를 꿰뚫고 약점을 쥘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으니까.”

“설마….”

할머니가?

“날 그렇게 보는 게냐?”

“아, 아닙니다.”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최명희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렸다.

“스스로 끊어냈지. 미친 게야. 웃으며 죽었더구나.”

이정기의 머리가 복잡했다.

‘주용이 죽었다고?’

그렇다면 주형태와 주인배는 대체 누구에게 속은 것일까.

“감히 그 모습을 사칭하는 자.”

최명희가 말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인배나 형태나 너에 비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겨우 모습만 배낀 가짜에게 속았을 리는 없다. 분명 믿을만한 무언가가 있었겠지.”

“…….”

“또한, 분명 인배는 지배 구조를 흔들어놓았다. 그건….”

“주용, 그분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군요.”

“그래. 네 할애비도 못 할 짓이지.”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최명희가 말하는 것은 분명했다.

“주용이 살아있다.”

그리고.

“어딘가 살아서 복수를 꿈꾸는 게야.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죽은 것 자체가 위장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을 리는 없어.’

정말 죽고 되살아난 것.

그것밖에는 없다.

“그분…, 에 대해 조금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최명희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 * *

주용과 최명희, 둘의 만남은 사실 최명희가 이건을 만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정략혼.

주용과 최명희 모두 거대 재벌의 핏줄이며 동시에.

‘서자.’

적자가 아닌 첩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각자의 그룹을 위한 정략혼의 도구로써 이용되는 것뿐.

“그것이 그자와 나의 첫 만남이다.”

그리고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지독하게도 복수를 꿈꾸는 자였지.”

복수.

서자라는 이유로 무시 받고 홀대받던 삶.

그들의 삶보다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는 어미의 삶.

그에 대한 배상과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공통점.

거절할 도리도 없었지만 둘은 그렇게 약속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자고, 그것으로 어떻게든 복수를 이루어내자고.

하지만.

“게이트가 나타났지.”

변화가 생겼다.

게이트의 등장.

‘각성.’

최명희의 각성.

더 이상 최명희는 아무것도 못 하는 한낱 서자가 아니었다.

스스로 집안에서 벗어나 진창을 굴렀다.

‘힘.’

노력하여 힘을 갖는다는 것.

성취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수 없게 만들었던 지난 삶과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마약.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와 비슷하리라 생각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A급 헌터가 되어있더구나.”

미친 듯 사냥을 하고 또 사냥을 한 최명희는 결국 A급 헌터가 되었다.

“그제야 내가 필요해졌다. 이성에 헌터라곤 나와 둘 뿐이었으니까.”

버림받았으나 필요해진 자식.

그러자 부르는 집안.

결과야 뻔한 것.

“돌아가지 않았다.”

더 이상 할머니는 그들에게 속박당할 생각이 없었다.

힘을 가졌다.

이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얕보았던 게지.”

“설마….”

이정기가 이성에 들어와 느낀 것이 있었다.

재력, 권력, 그것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은 일반인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생물이나 다름없었다.

도덕 관념은 없고, 그들의 자존심은 그들의 영혼이다.

목줄을 풀어헤치고 도망간 짐승을 내버려 둘 이들이 아니다.

“어머니를 인질로 협박하더구나.”

“그런….”

“어찌했겠느냐?”

할머니라면.

‘할머니라면….’

쉽게 떠오르지 않는 답.

최명희가 슬쩍 미소 지었다.

“과거의 나는 지금과 다르다.”

“그렇다면 구하러 가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러나 늦었다.”

“……!”

“숨만 붙어 있는 인질이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에겐 있을지도.

그러나 지금과 다를지언정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도망쳤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세계를 돌았지.”

이다음의 이야기는 대략 안다.

‘미친 여자였다.’

할아버지, 그에게 들었으니까.

“네 할애비를 만났고, 타올랐다. 허무와 분노로 가득 찬 나와 광기만 가득했던 네 할애비를 보고 남들은 찰떡이라 하더구나.”

하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몇 년이 채 되지 않아 이강을 낳은 둘은 결별했다.

그 후.

“주용이 찾아왔다.”

주용.

“무엇을 해도 좋다더군. 다른 남자를 만나도 좋고, 쓰임 패로 버려도 좋다 했다. 다만….”

“복수.”

“복수를 해달라더군.”

주용의 삶 또한 최명희와 다를 바 없던 것이었다.

도구나 다를 바 없는 삶.

할머니와 다를지언정 어미의 죽음으로 주용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처받고 무너져내린 인간.

“그의 손을 잡았다.”

“왜….”

“나와 같았으니까.”

동정.

“그것만은 아니다. 나 또한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할아버지의 빈 자리는 생각보다 할머니에게 컸던 것 같았다.

그렇게 주용과 할머니는 결합했다.

이미 그때의 할머니는….

‘S급.’

최고의 헌터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할아버지와 지내온 짧은 시간.

할머니에게 있어 진화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이었으니까.

한국에 총 셋도 되지 않던 S급.

수많은 게이트를 처지하며 쌓아온 부.

세계를 돌며 교류한 인맥.

“그제야 눈에 보이더군.”

씨익.

“이성은 그저 작은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일 뿐이라고.”

복수는 짧고 간단했다.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그다음은 주용의 복수.

“그렇다면 왜 문제가 생긴 겁니까?”

누군가에게는 아닐지라도 둘에게는 해피엔딩일 수 있는 결말.

각자의 목적이 이루어졌고, 그대로 끝이 났을 것이다.

부부의 관점으로 보기엔 최악일지 모르지만, 권력자들간에는 그런 관계도 쉽게 존재하는 것을 안다.

그저 보이는 것에 치중하며, 그렇게 살아갔다면 나름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도대체 왜 할머니는 주용을.

‘아니.’

주용이 할머니를 떠난 것 같았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마저 끊어내다니.

그 이유는….

“그가 날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너무도 단순한 것이었다.

* * *

시꺼먼 어둠.

그 속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여긴 몇 번을 와도 익숙하지가 않다니까.”

그 속에서 장난스러운 주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디언들의 신전은 다 이러나? 그나저나….”

주용의 눈이 섬뜩한 빛을 낼 때.

“언제까지 숨어있을 생각이야?”

푸른 불꽃이 작게 일렁거리며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를 지키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

“왔나.”

건조하고 메마른 목소리가 그 로브 속에서 들려왔다.

“저쪽 일은 전부 실패했다는군.”

“…….”

“아레스는 실패한 것으로 모자라 몸까지 빼앗겼다.”

주용은 마치 항의를 하는 듯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패작이니. 그렇겠지.”

로브 속, 하데스는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본디의 것이 아닌 영혼이 깃든 육체이다. 또한, 너희의 소망대로 너희의 피를 섞어 만든 육체이지. 그러니 그 위력을 전부 발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뭐 질책하는 건 아니야.”

“…….”

“다만.”

주용의 가라앉은 눈이 마치 경고를 하는 듯했다.

“더 이상의 실패는 없어야 한다는 거지. 이 정보 표본이면 정보 수집은 끝난 것 아닌가?”

로브 속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음은 완벽할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육체와 영혼의 파장이 맞을 테니까.”

모든 것은 지금을 위한 전초.

확실한 하나의 성공을 위한 준비에 불과한 것들.

진짜는….

‘이제부터다.’

주용이 천천히 다가가 하데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사랑에 미친 자들끼리 한 번 해보자고.”

“약속은….”

뒤돌아 사라지는 주용을 향한 하데스의 목소리.

“지켜라. 크로노스.”

최강의 손자

지은이 | 규 명

발행인 | 조규영

펴낸곳 | 오에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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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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