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권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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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내렸던 이성 저택.
지금은 그 잔해마저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공동.
그것이 영광스러운 이성 저택이 있던 자리에 있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던 이정기가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괜찮….”
이진석이 그런 이정기를 향해 황급히 입을 열었으나 이정기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눈앞의 광경, 그것이 지금 이정기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파괴력이었다.
벼락을 이용했다면 또 다른 광경이 펼쳐졌겠지만.
‘벼락을 이 정도 수준으로 운용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힘.
그리고 이것이 그 결과였다.
운석이 충돌한 듯 파여버린 구덩이, 시뿌연 먼지와 볼텍스의 잔류가 아직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처음 이정기를 걱정하던 이진석을 제외하곤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혹여 불경한 이야기를 꺼내 불안이 현실이 될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맙소사….”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성 저택을 무너트리고 지반을 바꿔버린 힘이었다.
만일 이 힘을 더 넓은 반경에 퍼트렸다면 한 지역 전체가 가루가 되어버릴 힘이었다.
헌데.
“제법이야.”
구덩이 속에 아직 형체가 남아있었다.
시꺼먼 어둠을 방어막처럼 두른 채 서 있는 인형.
파앗!
어둠이 회오리치듯 사라진 그 자리에 에레보스가 서 있었다.
갈가리 찢긴 옷, 그 속에 비치는 핏물.
하지만.
“그런 공격을 맞았는데 겨우… 저게 다라고…?”
이정기의 모든 힘을 쥐어짜 만들어낸 일격을 맞았다고 하기엔 터무니없는 광경이었다.
움직이려는 에레보스의 손이 그대로 멈추었다.
쿠쿵!
에레보스에게로 꽂혀 들어가는 중력의 힘.
이정기의 곁에 최명희가 양손을 에레보스에게 뻗은 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 또한 지친 듯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을 끄마.”
“……!”
이정기는 그런 최명희의 얼굴을 놀란 듯 쳐다보았다.
“뭘 그리 놀라는 게야!”
최명희의 호통이 사방을 울렸다.
“잊은 게냐! 네가 누구인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위이잉.
울려대는 골 때문에 할머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이정기는 마침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네가 이제 이성의 주인이다.”
“……!”
이성의 주인.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 자리를 원한 것은 아니었겠지?”
이정기는 그런 최명희를 향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스윽.
사방에 서 있는 동료들.
그 뒤로도 저택에서 살아남은 이성의 식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우웅.
또한, 에레보스가 쳐놓은 결계 밖, 사태를 인지하고 출동한 듯한 이성의 헌터들이 도열해 있었다.
“네 자리를 자각해라.”
이정기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말이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것임을.
꽈악.
할머니는 지금 혼자서 에레보스를 막는 사이 자신이 도망쳐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곧 에레보스를 상대하며 할머니가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아직도.
‘아직도 부족해.’
모두 자신의 탓이다.
더 강했더라면, 적어도 할아버지만큼만 되었더라면 누구 하나 잃을 일 없었을 것이다.
아니 할머니께서 이런 말을 하지 않으셔도 되었을 터였다.
쿠쿵!
에레보스를 향해 쏟아지는 중력, 에레보스가 그것을 밀어내며 굉음이 울려퍼졌다.
“서두르거라.”
더 이상 시간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최명희.
이정기는.
스윽.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그래야지. 자리를 차지했으면 그 자리에 걸맞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다.”
한 치의 실망도 없다는 듯 흡족하게 웃는 할머니의 모습에 이정기는 가슴이 아려왔다.
그렇기에.
“뭐하는 게야!”
에레보스를 향해 섰다.
“정기야!”
“할머니.”
이정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잃고 싶지 않은 것, 더 이상 가족의 피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너무나 진지한 이정기의 목소리에 최명희 또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최명희가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했을 때 느꼈을 감정을 안다.
그렇기에 할머니도 스스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지은 성혈들을 용서해주길 바라신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께선.”
이정기가 더 이상 목소리를 떨지 않으며 말했다.
“가족 아닙니까?”
“…….”
“이성의 주인. 이성을 위해 가족을 내버리란 말씀입니까? 그게 정말 이성의 주인입니까?”
이정기의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가 이성을 원했던 것은 아버지의 것을 하나라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솟구치던 기운이 고요해질 때.
“그리고 그건, 제가 아버지의 이상마저도 갖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성혈로 태어났지만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던 남자.
‘네 아버지가 원했다.’
올림포스가 사지인 것을 알면서도 수많은 이를 구원하기 위해 그곳에 발을 내디딘 남자.
아버지가 사라진 지 어언 이십 년이 지났건만, 세계는 아직도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영웅.’
약한 자를 보호하고 제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이정기는.
“아직 작은아버지들도 다른 이들도 남았습니다. 제가 여기서 죽어도 이성을 이끌 사람은 충분합니다.”
그제야.
“그래.”
최명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거라.”
둘의 대화가 끝났을 때.
쿠쿠쿠쿠쿠쿵!
에레보스를 향해가던 중력이 한층 더 강해졌다.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듯,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오래 잡아두진 못할 것이다. 할 수 있겠지?”
들려오는 최명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해내야죠.”
이정기가 나섰다.
이미 힘의 갈무리는 끝났다.
남은 것은 폭발.
그리고 그 역할은.
‘부탁한다.’
자신의 안에 잠자고 있던 그 녀석이 해주어야 할 것이다.
우르르르르!
이정기의 힘과 공명하며 마른하늘에 우레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직 자신이 이 힘을 완전히 다룰 수 없지만, 녀석과 함께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그렇게.
쾅!
벼락이 이정기를 향해 내리쳤다.
세상이 점멸하듯 환한 빛이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빛이 사라졌을 때.
“그래. 이거지.”
뇌신이 강림해 에레보스를 향해 뛰고 있었다.
* * *
벼락을 머금고 새하얗게 탈색된 머리, 그 속에서 빛나는 핏빛 눈.
이정기는 뇌신이 되었다.
주먹을 내뻗을 때마다 자연스레 벼락의 힘이 움직이고,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벼락이 맴돌았다.
촤아악!
대지에 굵게 새겨진 벼락의 줄기들이 땅마저 새까맣게 태워 그 흔적을 남겨두었다.
마치 모든 일을 끝냈다는 듯 서 있는 이정기.
그에게서.
파앗.
벼락의 힘이 사라져갔다.
탈색되었던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붉었던 눈이 평소와 같은 흑빛을 띠었다.
그 앞에.
“대단하군.”
몸이 반쯤은 사라진 에레보스가 서 있었다.
상체 위로 절반쯤 찢겨진 모습.
얼굴의 삼분지 일도 찢겨져 나간 모습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그곳에 흐르는 것이 핏줄기나 육편이 아닌 어둠이라는 것.
털썩.
저 멀리 최명희가 먼저 과도한 힘을 사용한 대가로 무너져내렸다.
털썩.
뒤이어 이정기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죽음이 명백해 보였던 에레보스는.
사아아.
잃었던 육체를 회복하고 있었다.
“…….”
탁해진 동공으로 이정기가 그런 에레보스를 봤다.
지금껏 벽은 몇 번이고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정기가 느낀 것은 벽이 아니었다.
‘격….’
격의 차이.
벽을 부술 수도, 넘을 수도 없다.
저건 벽이 아니다.
하늘과 땅, 결코 맞닿을 수 없는 것.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버러지.’
티탄들이 마치 습관처럼 인간을 부를 때 내뱉은 말처럼.
자신은 벌레였던 것이다.
개미 하나와 인간이 맞붙어 결코 개미가 이길 수 없듯, 티탄들에게 있어 인간은 개미일 뿐이고.
“좋은 눈이야.”
에레보스에게 있어서 자신 또한 그런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긴장 따윈 하지 않아.’
에레보스에게 긴장감조차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올림포스에서 몬스터들이 자신을 보며 느꼈을 눈빛.
‘김대정….’
협회장이 왜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우려스럽게 바라봤는지.
‘정훈.’
자신의 편이 되어준 그 또한 그런 인식을 가졌는지.
다른 이들이 자신을 왜 겁내 하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격.’
그것은 공포였다.
형언할 수 없는 미지, 헤아릴 수 없는 심연.
그런 것.
이정기는 천천히 눈이 감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디언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구나.”
에레보스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끝이다.
에레보스의 손은 검은 칼날이 되어 자신의 목을 내리칠 것이다.
보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광경.
번뜩!
그럼에도 이정기는 눈을 치켜떴다.
포기할 수 없는 것.
지켜야 하는 것.
이런 공포와 격의 차이라면.
‘이미 느껴보았다.’
그것도 수십, 수백, 수천 번!
“할아버지!”
이건!
그야말로 자신이 격을 느끼는 완전한 존재였으니까.
이정기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에레보스의 칼날.
“그래.”
순식간에 내쳐졌어야 할 칼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거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
“나는 네게….”
자장가처럼 들려오면서도 자신을 혼내는 호통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딱 하나 형언할 수 있는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포기를 가르친 적이 없다.”
“할아버지!”
거짓이 아니다.
환영도 아니다.
눈앞에 서 있는 저 등은 분명 이건의 것이었다.
“넌….”
에레보스의 흔들리는 눈빛.
긴장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을 것 같던 녀석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쾅!
녀석의 뱃가죽을 뚫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의 등이 어느새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똑똑히 보거라. 정기야.”
할아버지의 주먹이 에레보스의 복부에 꽂혀있다는 것.
“이 할애비가 얼마나 강한지, 네가 누구의 손자인지 보여주마.”
뒤이어.
쾅!
할아버지의 다른 주먹이 에레보스의 면상을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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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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