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강의 손자-231화 (231/284)

제10권 6화

231

“나는 에레보스라고 한다.”

그저 이름을 말했을 뿐이었다.

움찔.

하지만 그 작은 일련의 행위에 온몸이 굳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항거할 수 없는 어둠이 온몸을 집어삼키는 느낌.

의식이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

들려오는 것 같은 메티스의 목소리에 잡음이 낀 듯 치직거렸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꺼…꺽….”

목에는 돌덩이라도 걸린 듯 아무런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녀석의 눈빛이 보였다.

권태로 찌들어 녀석보다 더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두 눈.

이정기는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오….”

막혔던 목구멍이 열린다.

“왕….”

녀석은 왕이다.

자신과 같은.

아니.

“티탄의… 왕.”

티탄들의 왕임이 분명했다.

이야기만 들었던, 언젠가 상대할 것이라 생각했던 존재.

하지만 상대는 생각했던 것 이상의 괴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의식이 가라앉는다.

-복종해라. 복종해라.

머릿속에 이런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실망스럽군.”

그때, 들려온 녀석의 목소리에 이정기가 정신을 차렸다.

“쥬피터의 후계자라 들었는데, 겨우 그 정도인가?”

“…….”

“괜히 무리하여 움직일 필요도 없었겠어.”

말뿐만이 아니었다.

스윽.

녀석은 정말로 자신을 등진 채 뒤돌고 있었다.

찰나에 스친 녀석의 눈빛은 마치 벌레를 보는 것과 비슷했다.

움찔.

내가 벌레라고?

‘그럴 수 있어….’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허나.

화아악-!

쥬피터 할아버지를 언급하면 안 됐다.

지금 자신이 뒤 돈 녀석을 상대로도 아무것도 못 한다면 그건 스스로가 아닌 쥬피터 할아버지를 욕보이는 것이 될 테니까.

‘정기야.’

차가운 듯 정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할아버지.

하지만 쥬피터 할아버지는.

‘내게 모든 것을 주셨어.’

그의 육체와 목숨,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자신에게 내맡겼다.

화아아악!

이정기의 온몸으로 넥타가 불을 뿜듯 솟구쳤다.

푸른 전류와 붉은 화염이 어둠을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허억!”

이정기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마침내 몸의 자유를 되찾았다.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흐릿한 시야 속 이정기는 볼 수 있었다.

“아주 꽝은 아니구나.”

다시 뒤돌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레보스를.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 따윈 없었다.

상대를 가늠하거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 따위도 없었다.

그저.

파짓.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만 했다.

피어나는 전류, 그에 섞이는 바람.

그리고.

화륵.

화염이 동시에 이정기의 양 주먹에 맺힌 것과.

타앗!

이정기가 땅을 박차고 사라진 것.

콰아아아아아아앙!

에레보스의 육체에 양 주먹을 꽂아넣은 것은 말 그대로 찰나의 시간이었다.

본능에 육체와 정신을 내맡긴 채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위험을 배제하려 움직인 것.

그리고.

“나쁘지 않은 주먹이다.”

에레보스가 한 손으로 그것을 막은 것도 찰나의 시간에 불과한 것이었다.

* * *

벽.

지금껏 이정기는 살면서 벽을 느낀 적이 많지 않았다.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

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떻게든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전투란 단순히 가진 마력과 넥타만이 아닌, 수많은 능력을 조합하고 상황판단을 해야 하며 정확히 움직여야 하는 것이니까.

실제로 벽을 느꼈던 이정기도 몇 차례 그 벽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외였다.

꽈악.

내뻗은 주먹으로 느껴지는 압력.

사아아.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모아 넣은 힘이 전부.

‘빨아들여…?’

저자의 주먹을 통해 흡수되어가고 있었다.

파앗!

이정기가 급히 몸을 움직이며 주먹을 회수해 거리를 벌렸다.

“허억…. 허억….”

안 그래도 폭발 속에 부상 입고 지친 몸이었다.

거기다 그 잠깐 동안 녀석에게 빼앗긴 마력과 넥타로 인해 순식간에 더욱 지쳐버렸다.

“쥬피터의 후계란 말이 거짓이 아니야. 벼락을 다룰 줄이야.”

벼락과 볼텍스, 네메아의 힘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면서도 녀석은 부상 하나 입지 않았다.

오히려.

할짝.

마치 맛을 음미하듯 감평을 내리고 있었다.

‘대체….’

저런 괴물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어릴 때부터 항상 그랬다.

자신보다 더 강한 몬스터, 혹은 벽을 느끼더라도 이정기의 눈에는 분명 보이는 것이 있었다.

상대를 쓰러트릴 수 있는 방법.

상대의 허점.

비집고 들어가야 할 틈 따위.

그것이 있기에 이정기는 수차례 위기를 벗어나 적을 쓰러트리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본능이다.’

두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그것이 본능의 힘이자 영역이라 했다.

‘재능이다.’

또한, 그것이 자신의 재능이라고 했다.

여지껏 누구에서나 볼 수 있던 것이었다.

하물며.

‘할아버지들.’

이건과 쥬피터에게서도 보였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나 지금.

“……말도…, 안 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꺼먼 어둠, 자신을 심연 속으로 가라앉힐 짙은 어둠만이 저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더욱 그렇다.

덜덜덜.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몸.

이정기는 마음을 다잡았다.

“끝이냐?”

파짓!

다시 한 번 내비치는 전류.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더 볼 필요는 없겠지.”

이번에는 녀석도 가만히 있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벼락의 힘을 모으는 그 찰나의 순간, 이미 녀석의 손끝에 짙은 어둠이 뭉쳐 있었다.

아레스나 모로스가 썼던 파멸의 힘도 아니다.

‘순수한 어둠.’

그 자체.

그것이 뻗어 나와 이정기의 온몸을 옥죄어왔다.

고통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무런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복종해라. 복종해라.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증폭되어 들렸고.

“…….”

의식이 물에 잠긴 듯 무겁기만 했다.

그 속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렸다.

-꿇어라.

이 목소리는 녀석 그 자체였다.

항거할 수 없는 어둠.

항거할 수 없는 명령.

그렇기에.

스윽.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복종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

이정기의 무릎이 접히며 서서히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저항을 하는구나.”

이번에는 녀석의 목소리에 감정이 있었다.

조금의 호기심과 호승심.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정기의 무릎이 마침내 땅에 닿으려는 찰나.

파앙!

공기를 꿰뚫는 파공성이 울렸다.

다시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녀석의 손끝에서 뻗어 나오던 어둠이 가위에 잘린 듯 툭 끊어져 있는 것.

그리고.

“이성을 갖겠다 하지 않았으냐?”

익숙하고 고마운 등.

“이성의 주인이 되겠다는 녀석이 어디 무릎을 꿇는 것이냐!”

익숙한 호통.

“일어서라.”

최명희.

할머니가 그곳에 서 있었다.

“쥬노인가.”

에레보스의 물음에 최명희는 답하지 않았다.

“떨거지들이 더 있군.”

스윽, 스윽.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움직임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주안나, 김윤태, 이진석, 강민혁, 안인회 등….

‘전부….’

저택이 무너지는 폭발에도 살아남아 자신을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편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마도 폭발 속에 전투가 중지된 듯, 아군만큼 적군 또한 살아남아 상대의 진영에 합류하고 있었다.

“버러지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출중하여….”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티탄들.

오만하고 방자하며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것들이 보이는 태도는 잠깐이지만 분명히 신선한 것이었다.

더욱 신선한 것은 그들을 대하는 에레보스의 태도.

“괜찮다.”

티탄들의 대체적인 성격상 결코 용서할 리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아닌 듯.

퍼엉!

무릎 꿇은 티탄들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용서라 생각한 것이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티탄의 육편이 그대로 허공에 멈추어 어둠에 빨려 들어갔다.

“죽어서도 싸우면 되는 것이지.”

어느새 녀석은 다시 혼자였다.

* * *

“괜찮으냐?”

할머니의 물음에 이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완전히 섰다.

“후.”

숨을 골라 쉬며 생각을 마쳤다.

할머니가 만들어준 틈.

그사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에레보스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

처음으로 이정기가 제대로 느낀 감정.

‘공포.’

두려움이 몸을 옥죄고 의지를 꺾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추한 꼴을 보일 리는 없을 겁니다.”

“할미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는게 무엇이 그리 잘못이라고. 다만 지금은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온전히 느껴지는 할머니의 긴장.

할머니 또한 이런 감정과 얼굴을 보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인 듯했다.

“최선을 다하거라.”

“예.”

그것이 두 조손 지 간이 나눈 대화의 끝이었다.

타앗! 타앗!

서로 반대편을 향해 뛰며 거리를 벌린 그들.

“닿지 마세요! 녀석은 힘을 빼앗습니다!”

이정기가 소리치고 최명희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쿵!

서 있는 에레보스의 몸이 순식간에 땅으로 처박혔다.

쿵!

그것도 모자라 녀석의 몸이 땅을 뚫고 무릎까지 박혀 들어갔다.

할머니의 중력이 녀석을 내리친 것이었다.

그 기회를 놓칠 이정기가 아니었다.

‘섞여진 기운.’

네메아의 힘, 벼락의 힘, 볼텍스의 힘, 그것들을 전부 뒤섞은 것을 녀석은 막아냈고 흡수했다.

세 가지 힘의 합은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켜 덧셈이 아닌 곱이 되겠지만.

‘상성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어.’

이번에는 다른 방식.

휘이이잉-!

온전히 볼텍스 하나에 집중할 것이다.

그것도.

‘양손이 아닌 한 손.’

휘감는다.

빠득, 빠드득.

마동철이 대체품으로 주었던 건틀렛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 번에 거대한 힘을 담은 건틀렛이 그 힘을 감당치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정답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 거대한 힘.

그 힘을 손에 쥔 채.

콰아아앙!

이정기는 땅에 박힌 에레보스를 향해 쏘아냈다.

최강의 손자

지은이 | 규 명

발행인 | 조규영

펴낸곳 | 오에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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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 일 | [email protected]

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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