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권 24화
224
“고맙구나.”
할머니의 그 한마디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이정기는 단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할머니의 무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했다.
‘주형태.’
그 또한.
‘할머니의 가족.’
이정기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최명희.
그녀가 걷기 시작했다.
저벅.
이정기 또한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사이 무수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삐삐삐삐.
수없이 들려오는 기계음.
“다들 나가보게.”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할머니의 한 마디에 고개를 숙인 채 물러서 나갔다.
삐삐삐삐.
계속해서 들려오는 기계음.
그 중심에.
“…….”
주형태가 누워있었다.
생명 유지를 위해 수없이 꽂혀 있는 기계들.
링거를 통해서는 최상급 포션이 끊임없이 들어차고 있었다.
아직 나가지 않은 의사 한 명이 있었다.
할머니의 주치의이자, 동시에 이성의 헌터.
정확히는.
‘지원 대장 오윤수.’
이성의 모든 서포트 계열 헌터들은 공격대의 소속임과 동시에 지원대에 속해 있었다.
또한, 제로 라인의 헌터.
거기다.
‘대한민국, 아니 세계에서 손꼽히는 의료 헌터.’
최명희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망은.”
주형태의 상태를 물어보는 말.
이성에, 한국에 그런 말이 있었다.
‘오윤수가 고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다.’
스윽.
고개를 가로젓는 오윤수.
“없습니다.”
“엘릭서는?”
“이미 사용해봤습니다.”
오윤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로부터 계속하여 연구되던 것이 있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
철학자들이 그것을 주로 했다고 하지만 세기의 의사들 또한 그 실험에는 언제나 관여하곤 했다.
‘영혼.’
인간의 영혼에 대한 것.
과거에는 결코 밝힐 수 없는 미스테리에 불과한 그것이었지만 헌터라는 존재가 탄생하고 몬스터가 나타난 이후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 말이다.
오윤수, 그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의료기술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의료 헌터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영역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육체에 한정되어 있었다.
“영혼이 문제라면, 강령술 계열의 헌터는?”
“소용없습니다. 만일….”
오윤수가 조심스레 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움직이는 주형태의 육체를 바라는 것이라면 관계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개입한다면….”
“본질이 흐트러지겠지.”
그것이 주형태의 솔직한 상태였다.
감히 바라선 안 될 것을 바란 대가이자, 신들의 놀음에 껴 주체가 되고자 했던 벌이 바로 그것이었다.
“알겠다. 나가 봐.”
할머니의 명령이 떨어지자 오윤수 또한 방을 나섰다.
이제 남은 것은 온전히 의식 없는 주형태와 이정기, 최명희뿐이었다.
“정기야.”
“예. 할머니.”
“내 질문들이 너를 언짢게 했느냐?”
움찔.
이정기는 갑작스러운 최명희의 말에 어찌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네 목숨을 노린 녀석이다. 너를 잡고자 이 모든 오물을 뒤집어쓴 녀석이야.”
“…….”
“헌데도 너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살려 데려왔다.”
아직도 무엇조차 느낄 수 없는 목소리.
“녀석이 깨어나길 바란다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까.”
이정기가 최명희를 안 것은 그리 오래되었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한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있었다.
‘할머니는 결코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그런 할머니가.
“그건 내 과욕이자, 네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일일까.”
질문하고 허락받고 싶어 하고 있었다.
스윽.
이정기는 눈을 감았다.
“이 녀석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조금씩.
“아느냐. 나는 첩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
“권력가이자 재력가의 피를 이었지만 첩의 자식, 그것도 딸이기에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이정기는 감은 눈을 떠 최명희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헌데 그런 나조차 아니꼽게 보는 시선들이 있더구나. 내 어미조차 그들에겐 적일 뿐이더구나.”
감정이 드러난다.
“가진 것도, 가질 수도 없건만 그 피를 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겪었었다.”
그 누구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일 것이다.
아니.
‘한 명.’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어미를 잃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구걸을 하러 돌아온 집이었지. 싸늘히 죽어있는 어미의 시신 앞에 그들이 있었다.”
무너져 간다.
“태어나선 안 됐다. 태어날 거면 강하게 태어났어야지.”
할머니가 무너져 간다.
“그것이 내게 한 말이었다. 다행히도 세상에 변화가 찾아왔다. 헌터가 등장하고, 몬스터가 나타났지. 그리고 그건 수많은 이에게 불행이자 종말이었겠지만.”
할머니에겐 달랐을 것이다.
“내겐 기회였다.”
복수.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이제 기억조차 못한다.
어미를 죽인 그들에 대한 것인지.
혹은.
‘세상.’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면서 괜한 피를 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복수인 것인지.
할머니는 강해졌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을 만들었다.”
지금의 이성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힘없는 자는 무엇도 할 수 없으니까. 가진 성조차 지키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후.
한숨.
“그들처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되어버린 것이다.
가족.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증오했던 자들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만이.
‘가족을 지키는 것.’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들은 가족이라 생각하는 울타리를 위해 무슨 짓이든 했고 실제로 지켜내었다.
그러니 최명희가 그들의 방식을 배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딘가 틀어졌고, 최명희는 잘못된 길을 갔다.
“이것이 그 대가인가 싶구나.”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
이정기는 알 수 있었다.
‘나와 같다.’
할머니 또한 가족에 대한 그 이상하리만치의 집착이 이유 있는 것이었다고.
할머니가 잃는 슬픔을 경험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버지.’
이강 또한 잃었다.
‘그 후부터였을 겁니다.’
이진석에게 듣기로 할머니의 진짜 변화는 그때부터였다고 했다.
엄격하게 집안을 관리하던 할머니가 방관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이,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사소한 잘못 하나 용납하지 않던 할머니가 그들의 방황을 두고 보게 된 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했다.
“할머니.”
“정기야. 나는….”
최명희는 처음과 같았다.
무표정, 무미건조한 목소리.
그러나….
“더 이상 잃고 싶지 않구나.”
그 안이 무너져내렸다.
“돌려드리겠습니다.”
이정기가 목소리를 내었다.
“작은아버지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겠습니다.”
“…….”
그것이 할머니의 바람이라면 가능케 할 것이다.
다만.
“이제부턴 변하셔야 합니다.”
언제나 가르침을 받았고, 시험받았던 자신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러마.”
* * *
주형태는 확실히 죽어 마땅한 자였다.
가족이라는 작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고, 해서는 안 될 짓들을 몇 번이고 했다.
할머니의 약속이 있었다지만.
‘죽이려 했다.’
할머니가 한 것은 그저 부탁일 뿐이었고, 이제는 할머니의 말은 모두 따르는 것이 할머니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또한, 주형태가 한 짓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그런 자를 살려두었다간 갱생을 기다리는 것보다 뒤통수가 따가운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를 살려둔 것은.
‘할머니.’
할머니 때문이 맞았다.
이강,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슬픔.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 더 큰 것일지 모른다.
그런 고통을.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할 수는 없어.’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주강태.”
이정기의 부름에 긴장한 채 고개를 드는 녀석.
이 녀석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
그것이 비록 제대로 된 아버지가 아닐지라도.
‘녀석이 바라지 않는다.’
주강태는 그런 주형태를 잃고 싶지 않아 했다.
아버지를 잃은 자신.
또 아버지를 잃어야 하는 주강태.
그리고….
“이제부턴 네가 하기에 달려 있다. 만일 주형태가 일어선다 해도 네가 바라던 것과 많이 다를 수 있어. 그런데도….”
“감사합니다.”
주강태는 망설임이 없었다.
녀석이 바란다.
비록 그것이 낳은 아버지가 아닌 만들어진 아버지.
‘이 녀석은….’
주강태에게 흐르는 피는 주형태의 것이 아닌 이강의 것이었으니까.
엄밀히 따지고 보면.
‘배다른 동생인 건가.’
녀석과 자신의 관계는 친척이 아닌 형제지간이라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 만들어진 것이니 없애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꽈악.
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녀석을 제거한다는 생각은 쉬이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주강태를 거두었다.
녀석이 원하여 주형태를 살려두었다.
주강태는.
“아레스를 완벽히 다스려야 할 거야. 그 미친놈이 널 먹어치운다면….”
이정기가 말했다.
“그때는 이렇게 된 걸 후회하게 될 테니까.”
움찔.
“아레스가… 말을 전하고 싶답니다. 걱정 마시라고…, 끝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다고.”
그저 말뿐이라 생각했는데.
사아아.
녀석에게서 뿜어져 나온 넥타의 기운이 자신에게로 스며들었다.
[아레스가 충성을 맹세합니다.]
동시에 증폭되어가는 기운.
아레스가 충성을 맹세한 것이었다.
“하.”
이 미친놈은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한 번 올림포스를 배신했으니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들 자신을 배신할 수 있겠으나,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아레스는 진짜로 자신을 위해 일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주형태를 살린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정말 모르는 건가?”
“그게… 그렇습니다.”
주강태, 녀석의 몸을 어떻게 만들 수 있던 것인지.
‘주형태가 믿을 수 있는.’
또 주형태의 욕망을 알고 있는 자.
그자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라도 주형태는 아직 죽어선 안 된다.
그리고.
드르륵.
이정기의 핸드폰이 울렸다.
뒤이어.
드르륵.
주강태에게 준 새로운 핸드폰 또한 울렸다.
둘에게 동시에 온 문자.
핸드폰을 확인하는 둘, 먼저 입을 연 것은 주강태였다.
“정말… 저도 가는 겁니까?”
이성 저택에서의 소환.
할머니가 성혈들을 집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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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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