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권 23화
223
아레스의 면상 앞에 멈춰있는 이정기의 주먹.
“살려줘….”
아레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이정기의 주먹을 멈추었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자가?’
아레스가 목숨을 구걸할 리 없지 않은가.
오래 안 것도, 많이 아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에도 아레스는 목숨을 구걸할 자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헌데 왜?
“살고… 싶어.”
“……뭐 하는 짓거리야?”
“아직….”
아니.
씨익.
아레스가 웃고 있었다.
“네 끝을 보지 못했다.”
“…….”
“지금 네 녀석의 모습은 내가 보고 싶던 모습이 아니다.”
녀석의 눈에는 아직도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허나 죽음을 앞두어 피어오른 것이 아닌 새로운 열망에 대한 불꽃이었다.
“제정신이지?”
“……!”
그제야 이정기는 무언가 깨달을 수 있었다.
할머니와 겨룰 때 자신의 안에 있는 녀석에게 힘을 빌렸고, 그때의 기억은 흐릿했다.
육체의 지배권을 빼앗긴 느낌.
하지만 지금은 분명 처음에는 그런 느낌이 어느 정도 있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어.’
무언가 달랐다.
“그 정도로도 놀랍긴 하지만…, 아직 내 불꽃을 완전히 타오르게 하기엔 부족해.”
“그래서?”
“살고 싶다.”
“…….”
“네 모든 것을 보고 싶다. 네 모든 것을….”
씨익.
“겪어보고 싶다.”
뭐 이런 괴상망측한 고백이 다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그걸 왜 들어줘야 하지?”
지금 조금만 더 주먹을 내지르면 무방비한 아레스의 얼굴은 그대로 터져나갈 것이다.
올림포스의 배신자,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피가 담긴 육체.’
감히 벌여선 안 될 짓을 벌인 녀석이었다.
살려줘야 할 이유가….
“전쟁을 치를 것이지 않나.”
아레스가 목소리를 내었다.
“그 선봉에 서겠다. 군대를 훈련시킬 것 아닌가? 그 또한 돕지.”
대체 이 녀석의 진의가 무엇일까.
정말 목숨을 구걸하는 것? 그것도 다음에 다시 한 번 겨루기 위해? 내 손에 죽기 위해?
그것을 믿기엔.
아니.
“살려다오!”
그 눈빛이 너무 진심이었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어진 아레스의 목소리.
“너도 망설이고 있지 않느냐.”
그 목소리에 이정기의 눈이 가라앉았다.
“나를, 아니. 아니지….”
아레스가 목소리를 내었다.
“이 육체를 죽이는데 망설이고 있지 않느냐.”
부르르.
면상 앞에 멈춰진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것을 내리쳐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레스의 말 또한 진실임을 부정할 순 없었다.
‘주형태.’
저 속에 주형태가 있어서?
할머니께 성혈을 죽이지 않는다 약속한 것을 저버리는 것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주형태의 육체는 저기 너부러져 있었다.
주형태가 스스로 육체를 버린 순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죄책감은 자신이 느낄 필요조차 없었다.
이정기가 망설이고 있는 한 가지 이유.
‘아버지.’
이 육체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었다.
“살려다오.”
꽈악.
이정기가 아레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결국, 이정기가 내린 선택은.
쾅!
그대로 주먹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 * *
-아버지라 부르거라.
그것이 첫 기억.
-너는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언제나 그런 기억들이었다.
엄한 얼굴로, 그 눈에는 다른 것이 깃들어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부심을 가지거라.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이었다.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
스스로를 아버지라 부르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남자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비록 둘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선 어디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는 것과 한계까지 내몰리는 아버지의 시험이 있다고 한들.
‘아버지.’
자신이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언젠가….’
언젠가는 자신도 마음 편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그와 함께할 나날들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라도 했다.
언젠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리며 그 어떤 것이라도 해내려 했다.
‘친구.’
가져본 적 없다.
‘동료.’
그런 것도 없었다.
갖고 싶기는 했다.
다만.
-네게 도움되지 않는 것들이다.
아버지의 말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선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되었다.
-너야말로….
시간이 흐르며 느낀 것이 있었다.
-완벽한 혈통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보는 그 눈이, 얼굴이 어떤 뜻을 가졌는지를.
아버지는 자식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기대 또한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육체.’
오직 이 몸뚱이뿐.
그 안에 담긴 것은 전혀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언젠가.’
언젠가 아버지는 자신을 돌아봐 주리라.
그때까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지.
-죽여라.
해서는 안 될 일일지라도.
덜덜덜.
겁에 질렸으면서도 나는 해야만 했다.
버림받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끄으윽. 끅. 끄윽.’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써주마.
아버지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육체는 이제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이 육체 깊숙이, 심연 속에 잠들어 다른 이들이 내 육체를 움직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단 한 번도 아버지는 자신을 자신으로 봐주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육체를 지닌 존재로, 원한다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존재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대로.
‘끝이구나.’
자신이 더 이상 표면으로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척!
앞에 가로막혀진 장벽들은 자신이 나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나서기에 육체를 차지한 것들의 힘이 너무 컸다.
이대로.
‘죽는 거구나.’
어쩌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일 수도.
포기하자.
가족이란 것에 기댔던 것이 얼마나 바보 같았던 일인지를 깨닫고 포기하자.
살아온 세월이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그 또한 포기하자.
그게….
‘내 운명이라면.’
그렇게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이름.”
선명한 목소리.
“……?”
그 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이름이 뭐야.”
육체의 눈을 통해 바라만 봤던 자가.
“당신은….”
“이름이 뭐냐고.”
그곳에 서 있었다.
모르지 않았다.
“저는….”
“네 소망은 알았다. 네 기억도 봤어.”
“………!”
“기회를 준다면 잡을 거냐? 포기하지 않을 거냐고.”
이정기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기회가…, 있다고?’
더 이상 자신에게 남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건만 또 다른 기회가 있다고?
“뭘…, 해야 하는 겁니까?”
“…….”
“만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나도 안다.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
그러나.
“아버지께 해가 되는 일이라면 하지 않겠습니다.”
한 번도 자신을 자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은 아버지였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육체만을 바라봤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래도 아버지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에 느꼈던 기쁨도 없었을 것이다.’
그건 부정 못 할 것이었다.
“바보 같군.”
“……만일 그런 것이라면….”
“주형태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니다.”
“……!”
“오히려.”
이정기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씁쓸한 미소.
“네가 그를 구하는 일이 될 거다.”
“……!”
그렇다면.
선택은 간단했다.
“하겠습니다.”
나는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말했다.
어떤 의미로 지어준 지 모르겠지만, 그저 물건에 이름을 짓든 지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주강태라고 합니다.”
그것이 내 이름이었다.
“그래.”
* * *
“공략 대원 전원 생포.”
작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가담한 길드원들 또한 최소한의 피해만을 입힌 채 생포했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더욱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주형태 길드장의 중상….”
아직 하나 더.
“주강태의 확보라.”
탁.
들려진 보고서를 덮은 것은 최명희였다.
그런 최명희의 앞에 서 있는 것은….
“고생했구나.”
이정기였다.
주형태와의 싸움은 끝이 났다.
주형태가 준비한 수는 모두 파훼되었다.
공략 대원들은 이정기의 파티원들에게 전부 패해 사로잡혔고, 그들에게 가담했던 길드원들이나 공략 대원들의 직속 부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아레스.’
이정기는 녀석을 살려주기로 했다.
다만.
‘주강태.’
육체의 지배권은 아레스가 갖지 않는다.
녀석의 안에 있는 원래의 주인 주강태가 갖는 것으로 아레스를 잠시 동안 살려두었다.
그의 영혼과 넥타를 어찌해야 할지는 이제부터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그 결과.
‘주형태.’
그의 숨이 붙어 있었다.
영혼을 잠시 주강태의 몸으로 이동시켰던 주형태.
애초부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가디언이나 티탄들도 육체를 옮기는데 막대한 부작용을 감당해야 한다.
하물며 그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형태가 그런 것을 완벽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주형태가 한 것은 잠시간의 이동이었을 뿐.
어차피 아레스가 그를 밀어내고 곧 시간이 지나면 주형태의 영혼은 본래의 육체, 바닥에 너부러져 죽어가던 그 육체에 들어가게 되어있는 것이었다.
역시나 주형태는 죽어가는 육체에 들어갔고, 이정기는 숨만 붙인 채 주형태를 데려왔다.
그렇다고 한들.
“고맙구나.”
최명희는 복잡한 감정을 그대로 담은 채 이정기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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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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