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권 21화
221
마침내 아레스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여유를 지운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앗!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운이 이정기를 밀어내고 세상 모든 것을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쩌저적!
녀석이 입고 있던 황금 갑주에 변화가 생기며.
스스스스.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눈빛, 분위기, 착용한 갑주까지.
“이 정도로는 안 돼.”
모든 것이 달라진 아레스가 그곳에 서 이정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인지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른 가디언, 티탄들과 아레스가 다른 점.
‘육체.’
아레스는 온전한 육체에 가까운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 말은 곧.
“신체….”
그들의 가장 큰 무기이자, 근본이나 다름없는 신체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배수로 달라진 분위기와 무게감 속에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아직 충분치 않다.”
분노로 힘을 개방한 이정기를 보며 말하는 녀석.
“그 정도로는….”
“닥쳐!”
쾅!
또 한 번의 충돌.
아까는 막지 못했던 아레스가 이번에는 검을 사선으로 든 채 이정기의 주먹을 막아내고 있었다.
카카카캉!
튀기는 불꽃 속에서 둘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네 안에 있는걸 끄집어내!”
“닥-쳐!”
이정기가 검과 부딪히고 있는 한팔을 밀어내며 그사이 생겨난 틈을 향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쾅!
옆구리에 부딪히며 터져 나오는 폭음.
그 충격에 아레스가 휘청이는 사이 이정기는 자유로워진 다른 손을 아레스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쾅!
갑주를 꿰뚫지는 못했지만.
쩌저적!
갑주에 작은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신체?
그로 인해 아레스가 두 배수에 가까운 힘의 증폭을 했음은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그걸로는 자신을 막을 수 없다.
탈색된 이정기의 백발이 더욱 짙은 백발로 변하기 시작했다.
파지지짓!
온몸에서 흐르는 전류가 그 색을 더욱 토해냈을 때.
쾅!
이정기의 주먹이 마침내 아레스의 안면에 직격했다.
황금과 적빛으로 빛나던 투구가.
쩌저적!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이래도.”
그런 아레스의 멱살을 잡은 채 이정기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부족하다 할 거냐?”
존재 자체를 용서할 수 없는 존재.
쥬피터 할아버지를 배신했던 존재.
그것으로 모자라.
“끄으윽!”
아버지의 피가 섞인 육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음을 흘리던 아레스의 입매가 더욱 크게 비틀렸다.
“부족해.”
파아아아아앗!
녀석 또한 아직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었다.
* * *
쿠쿠쿠쿠쿠.
멀찌감치 떨어져 아레스와 이정기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가서 녀석을 말 그대로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쿵!
녀석에게서 일어나는 변화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쿵! 쿵! 쿵!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지끈.
머리는 올가미에 걸린 듯 옥죄는 듯한 통증이 있었고.
파르르.
온몸이 떨려오고 있었다.
공포?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아.”
기이한 흥분감.
녀석의 변화가 무엇이든 자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저 변화가 무엇이라는 것과.
솨아아아!
그 변화가 아레스와 자신의 전장뿐만이 아닌 섬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아.”
녀석 또한 기이한 소리를 토해냈다.
열띤 흥분에 붉어진 얼굴을 가리지 못한 채,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네가 꺼낼 생각이 없다면….”
씨익.
“내가 꺼내주지.”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녀석.
그제야 이정기는 녀석의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보여준 첫 번째 권능.
‘파멸.’
그건 말 그대로 적을 분쇄하고 파멸시키는 힘, 순전히 가진 파괴력만을 생각하면 어쩌면 볼텍스나 벼락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권능….”
아레스는 두 번째 권능을 끄집어낸 것이었다.
쿵!
마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들어 녀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크윽!”
기이한 열기가 온몸을 잠식하며 제대로 된 사고와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느낌,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크아아아아악!”
멀찌감치서 들려오는 비명과 같은 울림.
순식간에 돌아간 이정기의 고개, 이정기의 눈에 보인 것은.
콰콰콰쾅!
더욱더 격렬해진 이진석과 알파의 싸움이었다.
지금 이진석의 움직임은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르다.
저돌적이긴 해도 계산을 하며, 최선의 움직임으로 최고의 효율을 내려는 것이 이진석의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진석은….
카카카카카캉!
그저 미친 듯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서걱!
제 살갗이 베어져 나가도.
푸욱!
알파의 칼날이 허벅지를 꿰뚫어도.
카카카카캉!
이진석은 무엇도 관계없다는 듯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쿵.
다시 뛰는 심장, 이 느낌.
“광기….”
이것이 아레스의 두 번째 권능인 것이었다.
사방 모든 것들을 광기에 물들게 해 전투만을 생각도록 만드는 능력.
이정기가 봉인했던.
‘버서크.’
버서크와 같은 능력이 섬 전체의 모든 생명체에 깃드는 것이었다.
지저귀는 새들도, 풀벌레와 짐승들도.
째째재잭! 크르르르르.
울부짖으며 사냥감을 찾고, 그것이 없다면 제 몸을 사방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저 멀리.
“…….”
전투가 끝났던 이들도 다시금 눈을 붉게 물들인 채 무기를 집어 들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것이다!”
아레스의 목소리.
“이것이 내가 기다려 왔던 것이다.”
저 또한 광기에 물들은 채 소리치는 아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투야말로 살아있음의 증명이다! 내 살갗이 베어질 때 느껴지는 통증! 적의 살갗을 벨 때 느껴지는 쾌감.”
하아.
“죽음의 기로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만이….”
녀석 또한 알파와 비슷했다.
양 손에 들려진 두 개의 칼자루.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뒤틀린 녀석의 목소리에 이정기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렇겐…, 안 돼.”
녀석이 원하는 대로 안에 있는 그것을 끄집어낼 생각은 없었다.
“편해지고 싶지 않나? 너도 이 기분에 몸을 맡기고 싶은 생각은 없나?”
“닥…쳐.”
“모든 것이 네 발아래 깔릴 것이다. 오연한 시선으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네 두 주먹 아래 벌벌 떨 것이다.”
“닥…치라고!”
“그것이 네 본 모습이며, 너의 증명이다.”
아레스의 목소리에 천천히 이정기의 눈빛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젠장.’
그 능력이 문제였다.
몬스터의 힘을 똑같이 사용할 수 있었던 이정기의 능력.
그것은 몬스터의 기원이 가디언과 티탄에게서 비롯된 것이기에, 열화된 그들의 능력을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아레스는 지금 그런 이정기의 능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도 버서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정기였기에, 그 봉인된 능력을 자극하며 계속해서 이정기의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려는 것이었다.
“보여주거라. 네 본 모습을, 새로운 왕의 모습을.”
쿵.
또 한 번 심장이 뛰었을 때.
“그래.”
마침내 이정기가 대답했다.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여줄게.”
이정기의 눈이 완연한 핏빛으로 물들 때였다.
스스스스스.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 * *
이제는 더 이상 당황할 것이 없었다.
녀석도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더 이상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 할아버지들의 모습이나 누군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씨익.
그저 웃으며 자신을 쳐다 본다.
하지만 그 웃음이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추악함.’
녀석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기분 나쁜 불쾌감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전보다는 덜 해.’
전에 녀석을 볼 때는 당장 토악질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는데, 이제는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또 왔네?”
자신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녀석.
“또 내 힘이 필요한 건가?”
녀석의 목소리에 이정기는 으르렁대듯 말했다.
“모르지 않을 텐데.”
전에는 인정하지 않았고, 지금도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 녀석은 자신의 안에 있었고.
“다 알고 있잖아.”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똑같이 하고 있음을.
씨익.
“그래서 묻는 거야. 내 힘이 필요하냐고.”
“…….”
“전에는 내가 그냥 빌려줬잖아? 이제는 다르지. 네가 원해서 빌려달라는 거 아니야?”
녀석의 목소리에 이정기는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아니. 필요 없어.”
“그렇다면 왜 날 찾아왔지?”
“도대체 아레스가 널 왜 그렇게까지 원하는지 알고 싶어.”
전에도 그랬다.
‘할머니.’
할머니와 겨룰 때도 분명 녀석은 힘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말이 안 돼.”
“뭐가 말이지?”
“넌 나라고 했어. 네게서 느껴지는 것이 추악함일 뿐이라도, 네가 가진 힘은 결국 나에게서 비롯된 거야.”
동일한 힘.
녀석이 자신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똑같은 힘일진대, 녀석이 나서면 달라지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걸 안다면.
‘녀석이 없어도….’
그 힘을 낼 수 있을 테니까.
“네 말이 맞다. 우린 똑같지.”
“…….”
“하지만.”
씨익.
또 저 웃음.
“큰 것이 하나 다르지.”
“……그게 뭐지.”
“제한.”
움찔.
“너는 스스로를 가두고, 부정적인 것들을 네 안에 담아두었다. 무언가를 죽여야 할 때는 망설임이 생길 것이고, 워낙 강한 힘에 다른 것이 상처 입을까 걱정하지.”
“…….”
“나는 그런 존재다.”
무슨….
“네 제한을, 네 한계를 해제하는 역할.”
쉽게 답할 수 없는 것.
“네가 본디 가지고 있는 힘을 조금 더 내비쳐주는 것, 그게 내가 가진 역할의 전부다.”
녀석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런 거라면.”
이정기의 마음이 조금은 변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나와도 좋아.”
“그래. 녀석은 결코….”
둘의 입이 동시에 열리는 순간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존재니까.”
“용서 못 하니까.”
쩌저저정!
세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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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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