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권 18화
218
“네가 새로운 왕인가?”
이정기를 향해 물어오는 녀석의 얼굴에는 후련함과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숨겨둔 아들.’
주형태가 숨겨두었다는 아들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존재는 다른 것이었다.
주형태.
그리고.
“아레스.”
가디언들을 배신하여 봉인당하였다고 알려진 가디언, 아레스였다.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아직 완전히 지워지진 않은 건가?”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와 말투는 아레스가 아닌 주형태의 것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걸어오는 그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곧 완전히 지워질 테니까.”
이정기는 오래 생각지 않아도 주형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피식.
웃음이 났다.
“……?”
그런 이정기를 바라보는 주형태.
“설마.”
그런 주형태를 향해 이정기가 말했다.
“아레스의 영혼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
“그 힘만을 지니고 영혼은 지울 수 있다고? 그 힘이 온전히 당신 것이 될 수 있다고?”
그가 생각하는 것이 뻔했다.
‘지워낸다.’
그건 육체에 담긴 힘을 제외한 정신들을 지운다는 뜻 같았다.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주형태는 그런 이정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올림포스에서 나고 자랐다고 무언가 달라진 것 같나? 아니면 그 핏줄이 특별하기에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이나?”
웃기는 일이었다.
이정기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헌데 주형태가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열등감.’
그에게 핏줄에 대한 열등감이 얼마나 짙은지를 알 수 있었다.
이정기의 눈이 바로 옆을 향했다.
털썩.
이제는 완전히 무너져 스러져가는 육체.
주형태의 것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가 그 육체가 볼품없이 망가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육체는 영혼을 잃은 대가로 스러져 먼지가 되어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우웅.
주형태의 오른손에 쥐어진 황금빛 창이 빛을 토해냈다.
“새로운 혈통이 이성을 지배할 것이다.”
다시금 쳐다본 주형태는 온 힘을 끌어내듯 황금빛 광채에 휩싸여 있었다.
“새로운 혈통이….”
그 속에서 빛나는 두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욕망과 탐욕,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로 물들어 있는 눈.
쒜에엑!
황금빛 창이 이정기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 * *
쒜엑! 쒜엑!
강민혁의 활과 같은 파괴력과 속도였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하지만 집중하여 한 발 한 발을 쏘아내야 하는 강민혁과 달리.
쒜에에엑!
그보다 더한 파괴력과 속도를 가지고 있는 창은 쉴 새 없이 이정기를 향해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주형태.’
그가 가장 잘 다루는 무기가 창이라 들었다.
창 하나로 공략한 던전이 셀 수 없고, 대한민국 아니 세계를 통틀어도 주형태만큼 창을 잘 다루는 자는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과연.’
파슷.
그 위명에 걸맞은 실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정기의 뺨에 난 작은 상처.
주륵.
그곳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 상처는 바로 회복되어 핏기조차 보이지 않아야 하건만.
쒜에엑!
주형태가 든 창은 특별한 듯 이정기의 재생마저 막고 있었다.
“그 정도더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창격 속에서 주형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그 정도였느냐 말이다?”
비웃음이 분명한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이씨 성을 가진 네 실력이 겨우 그 정도냐?”
“…….”
“내가 그토록 바라던 피가 가진 힘이 겨우 그 정도냐?”
그는 흥분한 듯 보였다.
“겨우, 겨우 이거라니.”
이정기는 빠르게 주형태의 공격을 피해가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쏟아지는 창격에 이정기의 몸에도 잔 상처가 나고 있었다.
“내가, 바라고 바라던 것이 겨우….”
쒜에엑!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일격.
이정기는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해냈다.
“겨우 이거일 리 없지 않느냐.”
한 손으로 창을 내찌르던 주형태가 양손으로 창을 들었다.
“보여봐라. 내가 인정한 최고의 혈통이 가진 힘을!”
우우웅!
창끝에 모여드는 기운, 그 기운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그랬다.
‘파멸.’
그 끝에 닿는 것이 무엇이든 부수어내고 파괴할 수 있을 듯한 힘.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소름이 끼쳐오는 힘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설명할 수 있었다.
‘권능.’
아레스라는 가디언이 가진 권능이 바로 그 정체였다.
“네 아버지는 이렇지 않았다.”
가진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닐 터였다.
“무언가…, 더…, 더….”
설명조차 하지 못하는 그의 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인간도 이렇지 않았다.”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
이건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에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
“내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느낌. 주 씨의 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말이다!”
마침내 모여졌던 파멸의 기운을 담아 주형태의 창이 이정기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분명 일직선으로 뻗어지고 있는 창이었건만.
‘피할 수 없다.’
이정기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창끝이 향하는 방향은 일직선이지만, 그 힘이 미치는 방향은 창 앞에 놓여진 모든 것이었다.
만일 이것을 피해낸다면.
캉!
뒤편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이진석도.
뒤에 남겨두고 왔던 다른 모든 이들도.
‘파멸.’
저 기운에 집어 삼켜져 먼지가 되리라.
이정기는 처음으로 양손을 교차했다.
피하기만 했던 지금과 달리 제대로 된 방어태세, 그것을 이어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권능.’
지금 펼쳐지는 건 아레스의 권능, 권능에 맞설 수 있는 힘은 권능밖에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벼락을 사용하는 것이 옳았지만.
휘잉.
이정기가 선택한 것은 볼텍스였다.
‘이 씨 성.’
주형태가 가진 이씨 성에 대한 집착.
그것을 조금이나마 주형태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그의 도발에 넘어간 것이거나 그에게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쿠콰콰콰콰쾅!
그저….
“제가 당신께 베푸는 마지막 자비입니다.”
자비.
검은 기운이 몰아쳐 이정기와 모든 것을 부술 듯 헤집어 오고 있었다.
전투 마차에 올라탄 전신이 도래한 듯 모든 것을 찢어발기며 이정기를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는 기운.
파앗!
이정기는 교차했던 양손을 풀어 두 손을 내뻗었다.
쿠웅!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쿠콰콰콰콰쾅!
폭풍의 사자가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파멸의 전신과 폭풍의 사자가 부딪히는 순간.
우웅.
세상에 침묵이 도래했다.
* * *
파멸의 전신과 폭풍의 사자, 서로는 서로와 부딪히며 그 힘을 상쇄했다.
두 힘이 충돌해 서로를 집어삼켜 폭발했다면 그 결과는 분명 이 섬의 침몰이었을 터였다.
허나 두 개의 기운은 서로를 잡아먹고 상쇄시켰고.
“쿨럭!”
이정기는 그 여파로 한 움큼의 핏물을 토해냈다.
상쇄하지 못한 기운을 이정기가 스스로 받아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주형태는.
“…….”
감히 설명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넝마나 다름없는 모습.
황금의 갑주가 찢어발겨 졌고, 들고 있던 창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처참한 것은 주형태의 뒤편이었다.
힘을 흡수하지 않고 흘려냈기에 폭풍의 사자가 만들어낸 여파가 주형태의 뒤로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극.
사자의 손톱에 찢어발겨 진 듯한 대지의 모습.
그 속에서.
“컥!”
이정기보다 더 한 양의 피를 주형태는 토해냈다.
“그래….”
허나 그의 얼굴에는 짙은 환희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 이것이야.”
숨겨두었던 보물을 찾아낸 것과 같은 환희에 물든 얼굴.
“이것이 이 씨의 핏줄이 가진 힘이다!”
그는 그토록 고대하던 것을 찾아내었다는 듯 환호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힘이다. 완벽한 혈통의 힘이야.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야 내가 그토록 쫓아온 힘이라 할 수 있지!”
“미쳤군.”
“미쳤다? 너는 모른다. 애송이에 불과한 너는 몰라!”
핏발을 세우며 주형태가 이정기를 향해 소리쳤다.
“그 힘을 가지고 태어난 너는 모른다! 그 힘이 얼마나 선망해오던 것인지! 얼마나….”
꽈악.
떨어졌던 창이 주형태의 손에 닿아 빛을 내기 시작했다.
“사람을 절망으로 이끄는 것인지.”
주형태의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권능이 아닌 힘이기에 재생을 완전히 막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게 무슨 느낌인지 아느냐? 되려 해도 결코 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죽도록 버리고 싶은 성을 지닌 기분이, 그 성을 가지고 태어난 네가 알 수 있을까?”
더 이상 무슨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올려다보아야 한다. 평생을 올려다보기만 해야 한다. 그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네가 그 기분을 알까! 매일 같이 빌었다. 잠에서 깨면 내가 주 씨가 아닌 이 씨이기를. 강이 형이 내 친형이기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
그만큼 괴로운 것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단언컨대.
“틀렸어.”
주형태의 생각은 틀려먹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해봐야 스스로를 절망 속에 밀어 넣는 것뿐이야.”
“네가….”
“그러지 말았어야지.”
“네가…!”
“그걸 부러워해 스스로를 절망 속에 밀어 넣을 것이라면 차라리 그만큼 더 노력해야지.”
“네가 무얼….”
“그래서!”
이정기가 부릅뜬 눈으로 말했다.
지금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허나.
“네 스스로를 남들이 부러워하게 만들었어야지! 아니 모두가 그럴 거야! 이성의 성혈로 태어난 널! 네가 바라던 이씨 성을 지닌 것만큼이나 부러워하고 갖고 싶었을 거야! 그들이 꿈을 꾸지 않았을까? 그들이! 그들 또한 너처럼 되고 싶어 매일을 울부짖었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노력했어.”
“네가 무얼 안다고!”
“나도 알아!”
더 이상 그에게 공대는 필요 없었다.
이정기가 확신한 감정.
‘아버지라면 이랬을 거야.’
이강이라면 지금의 주형태를 향해 이렇게 말했으리라.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이십여 년의 세월을 보낸 아버지! 어머니! 가족이라는 울타리! 그게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것이고! 꿈꿔 오던 것이니까!”
“겨우….”
그 순간이었다.
이정기는 두 손을 늘어트렸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주형태를 향한 마지막 자비의 이유.
“시끄러운 인간이야.”
주형태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 광기 하나만큼은 재미있군. 인간이란 것들은…, 그래.”
아레스.
그가 환히 웃으며 이정기를 향해 말했다.
“그렇기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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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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