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권 17화
217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이정기의 옆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늦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앞서 나간 이정기, 그의 뒤를 바짝 좇아 이진석이 도착한 것이었다.
이진석의 눈이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진석이군.”
주형태, 그가 이진석을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이성의 충성하는 듯하더니, 역시 너 같은 버러지는 어쩔 수 없군.”
주형태의 말에 이진석이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정기 길드장 또한 이성의 성혈입니다. 그리고….”
주형태의 역린.
“회장님께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계자이기도 하지요.”
과연 이진석은 주형태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지금껏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던 주형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노망난 늙은이가 끝까지 일을 망치는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
주형태는 숨을 돌린 후 평온을 되찾았다.
“늙은이도 끝이야. 새로운 시대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고, 세상은….”
씨익.
“새로운 이들에게 지배받을 것이야.”
“미쳤군요.”
이진석의 말에도 주형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정기를 바라봤다.
“작은아버지께 예의가 없구나. 제대로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
왔다 갔다 하는 듯한 주형태의 태도.
지금 이 순간에도 일그러졌다, 평온을 되찾는 주형태의 얼굴은….
“제정신이 아니군.”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모습이었다.
불안함과 불길함이 가득해 보이는 그의 얼굴.
그의 동공은 크게 확장되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허가받지 않은 약물을 주입한 듯한 모습임이 분명했다.
“그간 준비했던 것이….”
저런 자에게 차릴 예의란 없다.
“뒤에 숨겨놓은 것인가 보지.”
이진석은 느끼고 있지 못하는 듯하지만 이정기에게는 또렷이 느껴졌다.
왜 주형태가 시간을 끌기 위해 병력을 배치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고오오.
주형태와 알파가 서 있는 뒤편, 신전과 같은 모양새.
많이 익숙한 듯 보이는 그곳에서 검은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일 초, 일 초.
짧은 시간에도 검은 기운은 부풀어 오르며 그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곧 완성된다.”
주형태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 말했다.
“완벽한 피, 완전한 피의 탄생이다. 새로운 시대의 지배자이자, 이성의 지배자가 될 녀석이지.”
주형태의 목소리와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의심조차 하지 않는 확신에 찬 얼굴.
이정기는.
“네메아.”
그런 그를 향해 불의 사자를 쏘아냈다.
* * *
더 말을 길게 끌 필요가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고, 목표를 포착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며 대화를 나누어보아야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간단하지 않은가.
‘속전속결.’
상대방의 노림수를 깨부수고, 최대한 빠르게 결과를 볼 수 있는 최적의 수였다.
이미 모아두었던 넥타와 마력이 뒤섞여.
크아아아-!
불의 사자가 포효하며 주형태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 찰나의 시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이정기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급히 움직이는 알파가 주형태의 앞을 가로막았고, 양팔을 움직여 방어 태세를 취했으며.
구웅.
동시에 마력을 폭발시켜 충격을 완화시키려는 것까지, 모든 것이 이정기의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네메아.’
과거의 그것과는 이제 완전히 다른 힘을 가진 불의 사자.
콰득!
그것이 알파의 방어를 무력화시키고 팔을 잡아 뜯었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알파의 몸, 네메아는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알파의 온몸을 통구이로 만들 듯 계속해서 덮쳐들었다.
알파를 입에 문 채 고갯짓을 하는 네메아.
탁!
네메아의 입에서 튕겨 나온 알파는.
툭, 투. 투투투투.
실 끊어진 인형처럼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주형태가 자랑하며 완성되었다고까지 말했던 공략 대원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네메아는 그것도 모자라 주형태까지 덮쳤다.
타타타타탓!
네메아가 내뿜는 고온에 공기마저 타오르며 사방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곧이어 네메아는 그대로 주형태마저 집어삼켰다.
“……..”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이정기와 이진석을 덮쳐왔다.
“설마….”
이진석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조심스레 말했다.
“이대로 끝인 겁니까?”
이정기의 뒤를 따라오기까지 독기를 품고 쫓아온 이진석의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정기의 답은.
“그럴 리가요.”
부정이었다.
“……!”
이진석이 급히 검을 들어 이정기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앙!
불꽃과 불꽃이 튀는 소음.
이진석의 칼날 앞에, 양팔을 칼로 변화시킨 알파가 불에 그슬린 채 서 있었다.
그그그극.
섬뜩하고 소름 끼치기 그지없는 소리가 알파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타버려 재가 되었던 피부가 떨어져 나가고, 선홍색의 살갗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라 확신했던 알파는 그 모든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 듯 회복하며.
카앙!
양팔을 휘둘러 이진석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힘에서 딸리는 듯 뒤로 물러서는 이진석.
그도 당할 생각은 없다는 듯, 마력을 폭발시켰다.
화륵!
네메아가 그랬듯, 이진석의 머리칼이 불꽃에 휘감겨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이진석의 몸을 타고 흘러 망토처럼, 갑주처럼 변한 것으로 모자라 마동철이 제작해준 장검을 타고 그 몸집을 부풀렸다.
불 도깨비.
그것이 지금 이진석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캉!
밀려갔던 이진석이 알파의 양팔을 쳐내고 섰다.
그 뒤로.
퍼어엉!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주형태를 집어삼켰던 네메아가 터져나가는 폭발음이었다.
그 속에 서 있는 주형태.
그는 네메아에 집어 삼켜졌다는 사실조차 없다는 듯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래.’
이렇게 쉽게 끝날 리 없는 것이다.
이정기 또한 알고 있었다.
주형태에게서도 느껴지는 검은 기운, 그리고 알파에게서도 느껴지던 검은 기운.
이들 또한 다른 공략 대원처럼 티탄의 힘을 가졌고.
“완성시켰다.”
“보이는군.”
티탄이 되었다.
새로운 티탄.
그것도.
‘육체와 힘이 합일되어 있는.’
어쩌면 올림포스에서 탈출한 티탄들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바로 이들인 셈이었다.
캉! 캉! 캉!
이진석이 알파를 이끌고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수없이 부딪히는 충격음이 점차 멀어질 때.
“이게 시대를 이끌어갈 힘이다.”
주형태가 모습을 변형시키며 말을 이었다.
더 이상….
“…….”
그에게서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듯했다.
뒤틀리며 변화하는 그의 모습에는 인간이 남아있을지언정.
“새로운 힘에 굴복하거라. 네 아버지, 아니 나의 형 이강 또한 이 힘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내면에 더 이상 인간성은 없는 듯했다.
“이게 진정한 힘이며, 새로운 힘이다. 너는 그저 과거의 잔재일 뿐이니.”
그가 힘을 폭발시키려던 그 순간.
“볼텍스.”
이정기의 양손이 어느새 주형태 쪽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거대한 힘.
자연 그 자체, 아니 자연재해 그 이상의 힘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최명희와의 전투 이후 더욱 강건해진 육체와 정신, 그 마력과 넥타가 뒤섞여 뿜어져 나온 볼텍스는.
콰콰콰콰콰!
주형태를 그대로 갈아버렸다는 말이 어울릴 파괴력을 뽐내주었다.
곧이어.
털썩.
볼텍스가 지나간 자리에 주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메아가 그를 집어삼켰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온몸에 난 상처가 그의 고통을 이야기해주었고, 그의 얼굴 또한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아니…, 왜….”
믿을 수 없다는 그의 표정.
그가 자랑하는 힘이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결코 믿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사실인 것을.
터벅.
주형태를 향해 이정기가 발을 내디뎠었다.
“재생이….”
티탄의 괴물 같은 재생력.
그 재생력이 효용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볼텍스의 힘이 재생을 막는 게 아닙니다.”
이정기가 그를 향해 말했다.
“재생하더라도 다시 부숴내는 것뿐이죠.”
그게 진짜 볼텍스다.
올림포스에서 타이탄들을 일격에 갈아버릴 위용을 보일 수 있는 힘은 그런 것이다.
쓰러져 죽어가는 주형태, 그 앞에 선 이정기.
싸움의 결착은 그렇게 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타앗!
이정기가 급히 거리를 벌렸다.
방금 이정기가 있던 자리, 아니 바로 그 앞.
“커억-!”
주형태의 등에 황금빛 창이 꽂혀져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형태의 등에 꽂힌 황금빛 창은 분명 자신을 노린 것 같았는데, 마치 살아있는 듯 움직여 주형태를 덮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
이정기는 그 이상함을 느끼며 앞을 보았다.
‘이제야 알겠어.’
주형태가 뭘 그렇게 기다렸는지.
“확실히 괴물 같은 힘이야.”
처음 보는 얼굴.
그러나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숨겨둔 아들.’
주형태가 숨겨둔 아들이자 그토록 기다렸던 것이라고.
또한.
“내 육체를 내 눈으로 보는 게 썩 기분이 이상하군.”
주형태라고.
* * *
주형태와 비슷한 외모, 그럼에도 무언가 더 친근함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황금빛 갑주를 입고.
촤악!
손을 내뻗자, 주형태의 등에 꽂혔던 창이 제 손으로 돌아갔다.
앳된 외모는 이정기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저자가 바로 주형태가 숨겨둔 아들이자.
‘나를 상대할 대비책.’
주형태의 말을 빌리자면 완성품이자 완벽한 혈통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그 깊숙한 곳의 진실은.
“주형태.”
저자가 바로 주형태 그 자체라는 것이었다.
“스읍. 하.”
숨을 몰아쉬며 그는 만족한 얼굴을 했다.
“이것이…, 새로운 세상이군.”
그의 눈에 차오르는 빛.
그 빛이 일순 변하며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새로운 왕인가?”
주형태, 그리고 동시에 그는.
“아레스.”
아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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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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