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권 1화
201
“제가….”
유시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모님께 상처를 입힐 리 없잖아요.”
어느새 이정기의 눈이 제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푸르게 타오르던 갈기와 같은 머리칼이 사라지고 점차 붉은색으로, 뒤이어 검은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기 너…!”
유시아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졌지만, 입가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안도감.
짙은 안도감이 유시아의 온몸을 잠식했던 까닭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제야 유시아의 눈에 이정기의 손이 보였다.
붙잡혀 있던 최명희.
‘없다!’
언제부터?
유시아의 눈이 급히 최명희를 찾았다.
“……!”
곧 유시아의 얼굴에 허탈함이 곧이곧대로 드러났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전투가 시작되었던 그곳에 최명희가 서 있었다.
비록 지친 표정을 하고 있다지만 아까 전 이정기에게 넝마와 같이 몰아 붙여졌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마치 환상을 본 것만 같은 느낌에 유시아가 의문스러운 얼굴을 가질 때.
“권능….”
옆에서 지친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쥬노의 권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던 거군요.”
약간의 경악을 지우지 못한 얼굴.
알아들을 수 없는 최명희에 대한 이야기 대신 유시아는 다시 한 번 웃으며 이정기를 보았다.
‘됐어.’
네가 괜찮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었다.
“가 봐.”
“…….”
“아직 안 끝났잖아.”
이정기와 최명희 둘 사이의 일이 먼저였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큰 상처가 없는 최명희였지만 유시아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최명희는 약해져 있었다.
아마 헤르메스가 말한 권능이라는 능력으로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만한 힘의 소모를 한 듯했다.
그에 반해 이정기는 폭주가 끝나자 오히려 더 안정된 모습이었다.
육체에서 느껴지는 힘도, 얼굴의 표정도.
“끝내야지.”
둘 사이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전투는 이미 끝난 상황.
유시아가 말하는 것은 둘 사이의 대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끄덕.
고개를 끄덕인 이정기가 순간 사라져, 최명희의 앞에 섰다.
* * *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정신을 잃듯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전투.
그리고 깨어나 보면 자신도 모르는 곳에 와 있거나 전투가 끝났던 지금까지의 상황과 달리.
“…….”
이정기는 다시 깨어난 이후부터 어렴풋한 정신이 있었다.
아니 정신만큼은 온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충동이 이정기를 폭주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뿐이었다.
‘할머니.’
최명희에 대한 일말의 분노, 그녀 또한 이성의 다른 성혈들과 같다는…. 자신이 생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분노.
또 믿었던 할머니가 자신의 목숨마저 노린다는 상황에 대한 분노.
그런 자신을 막아서는 유시아와 일행들에 대한 분노.
그 분노를 터트린 것에 불과한 행위들이었다.
그런 이정기가 분노와 충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까닭은 유시아의 덕택도 있었지만.
“……….”
할머니의 영향도 크다 할 수 있었다.
유시아가 이루어낸 신체.
사실상 지금의 유시아가 일으킬 수 없는 힘이건만 해낼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었다.
‘할머니.’
그 정답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이모에게 힘을 주었다.
그녀가 시엘 엘리자의 명령대로 얻어내었던 헤파이스토스의 넥타, 거기서 신기의 힘을 뽑아내 유시아에게 건넸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정기는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진심이 자신의 파멸이 아니며, 이성의 보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정기는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다.
말없이 서 마주 본 둘.
“너에겐 힘이 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할머니였다.
“나는 너를 죽이려 했고, 네 기대에 대해 배신했다.”
담담히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마치 비수와 같았다.
“이제 어찌할 테냐. 지금의 나는 지쳐있고, 네겐 나를 쓰러트리고도 남을 힘이 있다.”
아직도…, 아직도 시험을 하는 할머니.
이정기는 그 모습에 쓴 웃음을 지었다.
할머니의 고집 있는 모습에 속이 쓰렸지만, 그와 반대로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를 상대로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다니.
피식.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슬픈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정기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명희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되, 숨기고 있던 집착.
‘가족.’
그녀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이성이 아닌 가족이며.
“할머니의 마음이 뭔지 알았으니까요.”
그 가족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이 전투로 깨달았다.
자신에게 시험의 자격을 준 것이나, 자신을 죽일 각오로 몰아붙였던 것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이정기는 그 행위들에서 할머니가 자신을 진정한 가족으로.
‘후계자.’
자신을 이성의 진짜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시험이 아닌 확인을, 그리고 확언을 받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지금껏 이정기가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물었던 질문,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고 다닌 것에 대한 증명.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도 없었어요.”
“…….”
“그저….”
울컥 뭔가가 솟구치려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제게 부탁만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을 테니까요.”
할머니의 절박함이 절실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제가 이성의 주인이 되어도…, 다른 성혈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거예요.”
가족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그 가족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이강과 유영아를 잃은 그녀가 객관적으로도, 이정기의 눈에도 차지 않는다지만 다른 핏줄들을 잃을까, 그것이 자신의 손에 의해서가 될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네 안에는 나조차 알 수 없는 것이 들어서 있다.”
최명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겠느냐?”
내면 세계에서 보았던 그것.
할머니는 그것마저 알고 있는 듯했다.
“이겨내 볼게요.”
이정기는 그렇게 말했다.
그 추악한 녀석을 생각하면 쉬이 즉답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리고.
“만일 제가 이겨내지 못한다면, 도와주세요.”
“……!”
“제 할머니잖아요?”
최명희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이모가 저를 일깨웠지만, 할머니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게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그게….”
씨익.
“가족이잖아요.”
웃고 있는 이정기.
흔들리던 최명희의 눈이 떨림을 멈추었다.
“그래.”
그 대신 최명희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너는 내 손자다. 그걸 부정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그것으로 되었다.
이정기가 그런 눈빛을 보낼 때.
쿠우우웅!
공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파동이 땅 밑에서 쏘아져 왔다.
“……!”
또 다른 티탄?
아니면 또 어떤 적이 남아있었던 걸까?
그런 것이라면 상관없을 테지만.
“무너….”
헤르메스의 목소리.
“타르타로스가 무너집니다!”
벌어진 일은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두 분의 싸움을 비처가 버티지 못한 겁니다! 안 그래도 불안정했던 곳인 데다….”
최명희 그녀가 헤파이스토스의 넥타를 취했다.
“중심을 잃어 무너지는 겁니다!”
“그럼…?”
마동철의 불안한 물음에 헤르메스는 즉답했다.
“이곳이 무너지면 차원의 틈을 떠돌게 될 겁니다!”
“차원의 틈?”
“언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 전에 죽을 수도, 아니면 죽지도 못한 채 계속해 방황할 수도….”
그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었다.
최명희와의 이야기는 뒤로 한 채 이정기가 움직였다.
“포탈을 여세요.”
헤르메스의 권능, 그것만 있다면.
“안 됩니다.”
“……!”
“아까 전 제가 권능을 사용했던 여파로 권능의 재사용이 지금 힘듭니다.”
“제가 도와도 말입니까?”
끄덕.
“그때까지….”
쿠쿠쿠쿵!
“이곳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무너져 내린다.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 그리고 이제야 할머니의 진심을, 이모님의 진심을 알게 되었는데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티탄들이 이 일을 계획한 것 같습니다. 모모스를 버리는 패로 쓰다니…,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방법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방법은….”
빛을 잃어가던 헤르메스의 눈에 다시금 빛이 들기 시작했다.
“있습니다!”
그런 헤르메스의 눈이 마동철을 바라봤다.
“타르타로스의 설계자! 녀석이 있다면!”
* * *
꿀꺽.
침을 삼키며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마동철.
쿠쿠쿠쿵!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에 마동철이 눈을 치켜떴다.
쿠르르릉!
이미 저 먼 곳의 대지는 갈라져 부서져 내려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그 누구 하나 재촉하는 이가 없었지만.
“젠장 할! 알았어! 한다! 한다고!”
마동철은 누군가 등을 떠미는 것처럼 소리쳤다.
“어차피 그 차원의 틈인가 뭔가에서 노총각으로 죽으나! 정체 모를 대장장이랑 하나가 되는 거나! 그게 그거지!”
대체 누구에게 소리치는 것인지 모를 것처럼 홀로 소리치는 마동철.
그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발을 움직였다.
우웅.
그곳에는 허공에 떠 부유하고 있는 붉은 빛의 구가 있었다.
‘넥타.’
최명희가 먼저 찾아내었던 헤파이스토스의 넥타.
그것을 이정기가 취한 후 준비한 것이었다.
이것이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
올림포스와 타르타로스의 건설자인 헤파이스토만이 붕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먹고 왔다고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대화나 준비 없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지 못했던 마동철.
“걱정 마세요. 해가 되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젠장! 그 약속 잊지 말라고! 내가 네 할아버지한테 해준 게 얼만데!”
“걱정 마세요.”
이정기의 말에 마동철의 손이 점차 붉은 구를 향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좋아. 어디 대장장이끼리 한번 뭉쳐 보자고…!”
그 손이 붉은 구에 닿은 순간.
파앙!
붉은 파장이 타르타로스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속에 있는 마동철.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군.”
그의 입에서 지금껏 듣지 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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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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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