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권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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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까지의 전투의 양상은 간결히 표현하여 최명희가 이정기를 몰아붙이는 형세였다.
이정기가 무슨 수를 써도 최명희는 그것을 받아치며 마치 농락하듯 더 거센 공격으로 이정기를 압박했던 것이 아까의 싸움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큽….”
유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명희에 관해선 이정기보다도 더욱 잘 알고 있는 것이 유시아였는데, 유시아도 최명희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크윽!”
시뻘겋게 돋아난 핏발.
고통을 인내하며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
초조해 보이는 두 눈동자까지.
쾅!
전투의 양상은 아까와 정 반대가 되어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뚫을 수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된 것은.
쾅!
최명희였다.
중력과 넥타를 이용한 공격도, 이정기를 속박하려던 중력의 사슬도, 그 무엇도 이정기에게 통하지 않았다.
마력과 넥타를 이용한 공격은 모두 이정기의 손에 붙잡혀 그대로 되돌아온다.
조금씩, 최명희는 틈을 찾아내긴 했지만.
“……!”
그 속도가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었다.
붉게 물들어버린 두 눈, 시뻘겋게 타오르는 머리칼.
마력이 형상화되어 표현되는 오러 아머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
“신체….”
헤르메스가 목소리를 내었다.
“가디언의… 본 모습입니다.”
티탄이 타이탄과 비슷한 본 모습을 드러내었듯, 저것이 가디언들이 가진 본 모습이라 했다.
가디언이 가진 힘을 가장 완벽하게 끌어낼 수 있는 상태.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헤르메스는 조심스레 말했다.
“신체 형태라고 하기엔 너무… 기운이 정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티탄의 것과 비슷합니다. 힘의 폭발, 그 모든 것을 뿜어내며 태워내는 것….”
가디언의 신체, 티탄의 본모습인 거인이 뒤섞여 있는 듯한 느낌.
이정기가 주는 느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짐승.’
마치 짐승과 같은 몸놀림.
최명희의 공격을 본능적으로 피하며, 최명희를 사냥하는 것밖에는 머리에 든 게 없는 것 같은 모습.
그 움직임이 인간의 것이 아닌 짐승, 정확히는….
‘몬스터.’
마치 몬스터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정기의 움직임에 붉은 눈동자의 궤적이 실처럼 이어졌다.
붉은 실이 끝나는 지점엔.
쾅!
어김없이 최명희가 서 있었다.
여제, 이성의 황제, 이제는 시엘의 지위까지 따낸 그녀였지만.
“……!”
지금은 그저 짐승에게 맹렬히 사냥당하는 사냥감에 가까운 느낌마저 들었다.
‘이것이….’
이정기가 가진 진짜 힘.
아직 깨어나지 않았던 진짜 힘인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시험은 끝났다.
어느 누가 보아도 부정못할 결과가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최명희를 넘어선 이정기.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명희는 아직도 시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또 다른 무언가, 그것을 확인하기까지.
그리고 그 순간.
구우웅!
이정기에게서는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났다.
붉었던 머리칼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던 것.
그와 동시에.
쿠콰아아아아앙!
이정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파가 대기를 집어삼켰다.
* * *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한 마리의 사자였다.
제멋대로 헝클어져 늘어트린 머리칼의 끝에 마력과 넥타가 뭉쳐 만들어진 형상이 마치 사자 갈기와 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그 갈기는 처음에는 붉은색이었으나 이제는 백색에 가까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변한 것은 외형뿐만이 아니었다.
덜덜덜.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특별한 보스 몬스터들만이 뿜어내는 특수한 능력인 피어처럼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며 몸을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순간이지만.
‘사람이… 맞는 건가?’
이정기가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에 의심이 가게 만드는 힘이었다.
유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정기다.
그리고 자신의 조카다.
그 두 가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정해선 안 된다.
하지만.
“안 돼….”
이어진 이정기의 움직임에 유시아는 마치 신음하듯 소리쳤다.
“안 돼!”
쾅!
이정기의 몸이 순간 사라져 다시 나타났다.
이정기의 손에 잡혀 있는 최명희의 머리통.
드드드드드드드!
이정기는 그대로 최명희를 바닥에 내리꽂아 지반을 갈아내며 전진하고 있었다.
“안 돼!”
방금까지와는 달랐다.
방금까지의 이정기는 마치 안에 쌓여 두었던 무언가가 폭발하여 터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이성을 잃었어!’
지금의 이정기는 이따금 보았던 것과 비슷했다.
정신을 놓고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것과 같은 모습.
“안 돼!”
그렇기에 소리쳤다.
아까까지 유시아는 결코 이 싸움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최명희와 이정기의 일이었고, 이정기에게, 최명희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 돼-!”
유시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아야 돼요!”
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소리쳤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그런 유시아를 보며 낮게 신음하듯 말했다.
싸움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했던 것이 유시아였다.
헌데 인제 와서?
“이대로면….”
어느새 달의 활을 꺼내 화살을 장전한 유시아가 소리치며.
“정기가 여제를 죽일 거예요!”
타앙!
화살을 쏘아냈다.
쒜에에에엑!
달의 힘을 머금은 화살이 코팅까지 완비한 채 이정기의 등 뒤를 완벽하게 노려갔다.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인 화살이 이정기의 등에 꽂히려 할 때.
타앙!
유시아의 화살이 맥없이 튕겨져 나갔다.
이정기의 머리칼.
단순한 머리칼이 아닌.
‘마력장.’
회전하는 마력장이 마치 갑주처럼 이정기의 몸을 보호한 것이었다.
스윽.
최명희를 바닥에 긁어대던 이정기의 고개가 유시아를 향했다.
유시아는 망설임 없이 다음 화살을 장전했다.
“절대 그렇게 되선 안 돼요.”
이 시험이 어떤 의미가 있든, 그 둘의 뜻이 어떻든 이대로는 안 된다.
최명희가 이정기를 죽음까지 내몰았다면 나섰겠지만, 그전까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정기는 다르다.
지금의 이정기가 맨정신이라면 절대 나서지 않았겠지만.
“정기가 만일 정신을 놓은 채로 여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면….”
최명희만큼, 이정기에게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만난 조카, 아직 함께 보낸 시간도 적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리고 여려.’
이정기는 그 나이만큼도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크나큰 상처가 될 일.
“정기의 가슴은… 찢어질 거예요.”
지금이야 최명희에 대한 분노가 있다고 하지만 언제라도 이정기는 후회에 잠겨 살게 될 것이다.
‘후회.’
그 누구보다 그것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자신 아닌가.
이정기가 그러한 후회의 삶을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은 오직 자신만으로 충분하다.
타앙!
또다시 쏘아진 화살.
“도와주세요.”
유시아의 목소리에.
“알겠다.”
마동철이 움직였다.
그리고 뒤이어.
“알겠습니다.”
헤르메스 또한 함께 움직였다.
이해가 쉽게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유시아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그것.
‘진심.’
그 진심을 느낀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처음 듣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진다.
-나도 도울게.
유시아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그 주인이 누구인지 쉬이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힘의 원 주인.
‘아르테미스.’
화아아악!
유시아의 발밑에 둥근 만월이 나타났다.
“신체!”
* * *
결코,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강철의 갑주.
그 재질은 지금껏 누구도 발견한 적 없는 재질의 물건임이 분명했다.
거기다 한층 더 크기를 키운 황금으로 빛나는 활은 초승달 그 자체를 가져다 놓은 듯했다.
활시위가 놓이고.
웅.
그 소리마저 전과 달랐다.
공기를 터트리며 갈라버리던 것과 같은 이전과 달리 지금의 화살은.
쾅!
그저 작은 울림과 함께 이미 표적에 도착해 있었다.
“그만둬!”
화살을 쏘아낸 유시아가 소리쳤다.
“정기야!”
수많은 달의 화살이 이정기의 온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이정기를 관통한 것은 없었다.
“후회할 거야! 너까지 후회할 짓을 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이정기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전류.
그것이 모든 화살을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정기야! 제발…!”
그만두라고, 소리치며 유시아는 또 한 번 화살을 쏘았다.
헤르메스도, 마동철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카아아앙!
지금의 이정기는 막아내려야 막아낼 수 없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자신들은 계란이, 이정기는 바위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깰래야 깰 수 없는 벽.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손에 최명희가 잡혀 있는 한.
쾅!
유시아는 멈출 수 없었다.
가족을 잃는 슬픔을, 그것도 제 손으로 그러한 짓을 벌이게 놔둘 수는.
쾅!
이모가 되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전부.
유시아 또한.
“큭!”
아직 허락되지 않은 힘을 사용한 탓에 그 반동으로 망가져 가고 있었다.
헤르메스조차 꺼내지 못하는 신체였다.
아직 그에 이르지 못한 유시아가 꺼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콰직!
반동으로 부서지는 갑주는 단순한 갑주가 아닌 유시아의 몸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쾅!
부서질 듯한 고통을 이겨내며 유시아는 계속 화살을 쏘아냈다.
“정신….”
쾅!
“차려!”
설사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기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큭!”
모든 것을 바쳐 이겨내리라.
유시아가 다시 한 번 화살을 재었을 때.
우우웅.
이정기의 몸에 커다란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껏 공격을 막아내고만 있던 이정기가 마침내 반격을 시작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들러붙어 있던 수많은 화살들이.
꿀렁.
하나로 응집해 이정기의 손에 머물렀다.
소름이 끼칠듯한 힘의 응집에 유시아는 몸이 떨렸지만….
피…잉.
떨림을 억누르고 화살을 쏘아내었다.
웅.
작은 울림.
이제 또다시 폭발음이 들려야 하건만.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침묵만이 모두를 감싸고 있었다.
‘끝.’
유시아는 자신의 끝이 여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던 이유가.
고오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정기의 손에 화살이 잡혀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정기야. 나 하나로 끝내렴.”
그것이 유시아의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너를 노렸던 자신의 죗값, 이제야 속죄할 테니 네 할머니를 상처입히지는 말라는 마지막 충고.
그렇게 생각한 유시아가 눈을 감으며 천천히 제 죽음을 기다렸다.
꿰뚫릴 고통 따윈 걱정되지 않는다.
그저.
‘너무 힘들어하지 마렴.’
후에 정신을 차린 이정기가 지금의 일을 후회하며 울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 생각뿐이었다.
또다시 침묵.
혹여 이것이 죽은 다음의 세계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유시아가 천천히 눈을 뜰 때였다.
“제가….”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모님께 상처를 입힐 리 없잖아요.”
어느새 제 눈을 되찾은 이정기가 그곳에 서 유시아를 보고 있었다.
최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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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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