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권 24화
199
이미 한 번 보았다.
녀석은 전에도 내면 세계에서 스스로를 쥬피터 할아버지인 척하며 자신에게 속삭였었다.
“너구나.”
마치 거울을 보듯 완전히 똑 닮아있는 생김새.
“그래.”
녀석이라 표현하는 게 과연 옳을까 싶을 정도로 닮아있는 외형.
“나야.”
녀석은 이정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존재였다.
목소리도 몸짓도 전부 자신과 똑같은 존재.
“오랜만이네?”
하지만 그 표정만큼은 분명 자신과 달랐다.
지구에 와 언제나 메마른 표정을 하고 있던 이정기와 달리 녀석의 얼굴에는 만면에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입가의 미소는 내려갈 생각을 안 했고 눈은 휘어 초승달 같았다.
“또 언제 오나 기다렸잖아.”
자신을 향해오는 목소리.
그러나 이정기는 쉬이 답할 수 없었다.
전에도 녀석에 대한 의문은 있었다.
‘나?’
이곳은 자신의 내면 세계.
헌데 이곳에서 자유로이 행동하는 녀석은 무언가 이상하다.
내면 세계의 존재는 자신의 무의식이 투영된 존재.
그렇기에 녀석 또한 자신의 무의식.
‘정말로….’
자신 그 자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정기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전에도, 지금도 같다.
와락.
녀석과 상반되어 완전히 일그러지는 이정기의 얼굴.
“넌….”
이정기가 녀석을 내면 세계의 이질적인 존재라,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아니야.”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질감.
거울을 갖다 댄 듯 표정을 제외하곤 완전히 똑같은 생김새, 목소리, 몸짓.
그러나.
일렁.
이정기의 눈에 녀석의 얼굴은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은 모습, 그것이 이정기가 보는 녀석의 모습이었다.
환히 웃고 있는 얼굴은 그 추악함의 일부이며, 그 모습을 가리기 위해 녀석이 짓는 표정.
저런 것이.
“너무하는걸?”
나일 리 없었다.
“나는 너라니까? 네가 하는 생각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아니야.”
“내가 추악하다고? 그것만큼….”
씨익.
“너 스스로를 잘 평가하는 말은 없을 거야.”
“아니야.”
이정기가 부정해도 녀석은 이정기를 향해 다가오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게 너다.”
“그럴 리가 없어.”
“아니! 나야말로….”
녀석은 어느새 이정기의 코앞에 다가와 그 추악한 얼굴을 완전히 들이밀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느껴지는 역겨운 악취.
“진짜 너라고 할 수 있지.”
더 이상 이정기는 대꾸할 수 없었다.
“네 외로움.”
“……!”
“네 욕망, 네 고통, 네 슬픔, 네 질투….”
그 이후로도 끝없이 나열되는 단어들은 전부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지구에 와서 그런 것들을 제대로 느껴본 적 있어?”
“……!”
“아니, 그전에도 그것들을 제대로 느껴본 적 있어? 기억이나 해?”
씨익.
녀석의 웃음이 더 짙어진다.
“내가 바로 너야. 네 추악함, 네가 숨기고 싶었던 것들. 네가 꾹 눌러 담은 것들. 뭐 좋아.”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다가왔던 녀석의 얼굴이 다시 멀어졌다.
“네가 그렇게까지 날 부정한다면, 지금은 그냥 넘어가 주지. 하지만 내 힘이 없다면 너는 결코 할머니를 이길 수 없어.”
땅에 못이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 몸.
이정기의 가슴에 녀석의 손이 닿은 순간.
퐁!
이정기의 가슴에서 파문이 일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대신 이번만 힘을 빌려주지.”
씨익.
더없이 추악한 녀석의 얼굴이 점차 흐릿해져 갔다.
* * *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열린 헤르메스의 입.
“이미 예언을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 그 대상은, 한 명이 아닙니다.”
올림포스의 왕, 티탄의 왕.
예언이란 것이 그렇듯 확정적이고 명확한 것은 없었다.
그저 추론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예언이라는 것이었다.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했지만, 확신하진 못했습니다.”
헤르메스는 최명희를 보며 말했다.
“그렇기에 아직은 두고 보고 있던 겁니다. 운에 모든 것을 맡기려던 것이 아닙니다.”
“…….”
최명희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그녀 또한 헤르메스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낀 듯했다.
“독이란 것이 그렇다.”
“……?”
“독이 내 몸에 침투했음을 알고 빠르게 대처하면 뽑아낼 수 있지만, 독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시간이 흐르면….”
또 한 번 변화한 최명희의 얼굴.
“그 독이 온몸을 잠식해 죽는 것이 사람이다.”
독.
“정기는 사람이다. 독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확신이 들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닌 독이 있음을 깨닫고 뽑아내려 하며, 할 수 없다면….”
꽈악.
“이해하고 받아들여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건 마치 이정기만을 향해서 하는 소리가 아닌 듯했다.
‘그녀 또한.’
마치 최명희가 직접 느낀 바를 이야기하는 듯 했다.
“그렇기에….”
최명희의 표정을 보며 다른 이는 몰라도 유시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최명희는 마치 이것이 전부 이정기를 위한 듯 말했지만.
‘그녀를 위한 것이기도.’
최명희를 위해 벌이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또한, 그녀가 이정기에게 했던 말.
‘이성을 갖고 싶으냐?’
이성의 주인이 되기 위한 시험, 그 시험 또한 이유가 있음을.
우웅.
그때 작은 공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
돌아가는 시선들, 그 시선들이 향한 곳은 한 곳이었다.
“정기!”
쓰러졌던 이정기의 몸이 부유하며 떠오르고 있는 상황.
분명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한,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듯했던 이정기의 변화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
정기가 이들이 말하던 예언의 무언가,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는 이야기.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퐁.
이정기의 몸에서 파장이 일어났다.
“이제 시작이군.”
쿠쿠쿠쿠!
안 그래도 요동치던 올림포스의 대기가 미친 듯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공기 그 자체가 기다렸다는 듯 주인을 마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기가….”
유시아가 불안감을 못 숨기며 말했다.
언니가 돌아올지 모른다지만, 그것은 전과 같은 형태는 아니라고 했다.
이제.
‘남은 유일한 혈육.’
이정기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처음에는 밀어냈으나 이제야 받아들인 자신의 조카.
“티탄의 왕이라는 건가요?”
그런 조카에게서 생기는 변화가 이들이 말하던 예언의 주인공을 증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아닙니다.”
하지만 답은 동시에 들려왔다.
최명희와 헤르메스.
“하지만 정기에게 아직 이런 힘이 남아있는 것은 그 또 다른 힘이라는 것이 정기에게 있음이 증명되는 것 아닌가요?”
“예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가능성일 뿐이죠.”
가능성이라고 한들.
“왕이 지금 뿜어내는 힘이 무엇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그것이 예언처럼 티탄의 왕이 될 힘일 수도….”
아니면.
“쥬피터께서 남겨두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둘 다도 아닐 수 있고요.”
“그저.”
이번에는 최명희였다.
“직접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정기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는 이정기를 확실히 회복시키고 있었다.
어두워졌던 안색에 혈색이 돌고, 꺼져가는 촛불처럼 흐릿하던 이정기의 기운이 폭증하고 있었다.
덜덜덜.
그 여파에 온몸이 떨릴 정도.
타박.
다시금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 상대는 다시 한 번 최명희가 될 것이다.
쿵!
대기를 격하는 강렬한 충격음.
“다시 하겠느냐?”
최명희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
그곳에 이정기가 똑바로 서 있었다.
* * *
“정기야….”
초조한 얼굴로 이정기를 보는 유시아.
그러나 그녀는 곧 이정기의 상태가 전과 달라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붉게 물들어버린 눈.
스킬을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고오오.
떨리는 공기 속의 침묵이 불안감을 더했다.
꿀꺽.
몰아치던 대기의 파동도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마주 선 이정기와 최명희.
그 어떠한 말도 없이.
구웅!
최명희가 먼저 움직였다.
“……!”
최명희의 손에 모여든 기운, 그건 아까 이정기를 몰아붙였을 때와 같은 것이었다.
모아든 중력과 넥타, 회전하는 힘.
‘그래비티 볼텍스.’
이건의 기술을 따 만든 최명희의 능력이었다.
처음부터 최명희가 쓸 수 있는 최고 위력의 능력을 사용하건만, 말릴 수 있는 틈조차 없이….
쿠콰콰콰쾅!
거대한 중력의 힘이 대지를 가르고 이정기를 압살하려 했다.
조금 전에도 보았던 똑같은 광경.
충돌의 결과는 이정기의 참패였던 것이 바로 방금 전이었다.
그랬을 텐데.
“……!”
지금의 결과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파스스.
더 이어져야 할 폭발음이 한순간 사라졌다.
뿌옇게 뒤덮어야 할 흙먼지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우우웅.
이정기의 손에 맺힌 기운만이 보였다.
“……!”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명희가 사용하는 중력은 권능과도 같은 스킬이었다.
같은 능력을 지닌 헌터를 발견할 수 없고, 오직 최명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
“말도 안 돼!”
하지만 지금 이정기의 손에 몰아치고 있는 힘은 중력이었다.
“……능력을 사용한 게 아닙니다.”
헤르메스의 경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으로….”
말도 안 된다는 얼굴.
그건 권능과 같은 중력을 사용한 것보다 더 놀란 표정이었다.
“힘으로 잡아둔 겁니다.”
“힘으로?”
“따로 능력을 사용한 게 아닙니다.”
이정기를 덮쳤던 힘, 그 힘을 이정기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가둬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가둬둔 힘은.
“맙소사.”
이번에는 이정기에게서 최명희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더 큰 힘이 되어.
최강의 손자
지은이 | 규 명
발행인 | 조규영
펴낸곳 | 오에스미디어
주 소 | 경기도 하남시 조정대로 35 하우스DL타워 F915-1(9층)
대표전화 | 070-8233-6450
팩 스 | 02-6442-7919
홈페이지 | www.osmedia.kr
이 메 일 | [email protected]
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 위 책은 (주)타임비가 저작권자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이므로 발행자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 전자책과 내용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며 무단 복제/전제하거나 배포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최강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