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권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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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비티 볼텍스.’
할아버지의 볼텍스를 본 따 만든 할머니만의 기술.
그것은 아류라고 하기엔 그 성질이 완전히 달랐으며 할머니만의 특별함마저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에 맞선 이정기는 인생에 있어 두 번째 벽을 만났다.
그 벽은.
쿠웅!
행성 그 자체나 다름없는 힘이었다.
마치 중력을 가진 행성 그 자체가 된 듯 단단하며, 그 거대한 힘으로 자신을 짓누른다.
결국.
털썩.
이정기는 양 무릎을 꿇은 채 동공이 풀려 있었다.
쩍!
완전히 갈라져 부서져 버린 사자갑주.
“…….”
최명희는 그런 이정기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대로 끝이 난 듯한 전투.
무구와 갑주가 부서진 채 무릎을 꿇고 동공이 흐릿해져 가는 이정기.
그에 동조하듯 빠르게 스러져가는 마력과 넥타의 기운.
분명 누가 보아도 끝이 났음이 분명하지만.
“…….”
최명희는 마치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 땅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서 이정기를 보고 있었다.
‘그 정도냐.’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느냐.’
최명희의 눈빛은 제대로 시야조차 잡고 있지 못하는 이정기를 도발하는 듯했다.
‘할 수 있다.’
더 해보거라.
다그치고 채찍질하는 듯했다.
“크으….”
당장이라도 고꾸라져 땅에 머리를 처박을 것 같던 이정기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읍!”
다시 한 번 신음이 터졌을 때 이정기의 시선은 돌아와 있었다.
시뻘겋게 선 핏발.
앙다문 입술.
주륵.
제 혀라도 씹어 정신을 차리려 한 것인지 이정기의 입술에선 한 줄기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
한쪽 무릎을 손으로 짚고 천천히 일어선다.
“아직입니다.”
스러져가던 마력과 넥타가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아직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정기는 똑바로 섰다.
“만용이다.”
아까 전 이정기를 채근하는 듯한 눈빛은 사라지고 최명희는 다시금 싸늘한 시선으로 이정기를 향해 말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느냐? 이제 네가 무엇으로 나를 상대할 것이냐. 네 힘을 증폭시켜주고 너를 보호해줄 무구와 갑주는 사라졌고, 네가 자랑하는 이건의 기술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는.
‘완벽한 할아버지의 카운터야.’
오직 할아버지를 상대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것을 갖춰온 최명희.
그의 약점이었던 마력이 보완되자 최명희는 이건을 상대할 완벽한 준비를 마쳤다.
이정기는 그런 할머니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고자 할아버지의 기술로 상대하려 했지만.
“인정하겠습니다…. 만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은….”
구웅!
스러지는 불꽃이 마지막 힘을 내어 스스로를 태우듯.
화륵!
이정기의 온몸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마력만이 아닌, 넥타와 뒤섞인 특별한 기운.
그 사이로.
파짓.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다를 겁니다.”
이정기의 목소리에 최명희는 싸늘했던 시선 그대로 입을 열었다.
“다르지 않다.”
마치 무엇을 할 줄 안다는 듯.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힘은 네 스스로를 깎아 먹을 뿐이다.”
최명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
쿠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이정기에게서 벼락이 내리쳤다.
* * *
최명희의 경고와 달리 아까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
파짓! 파지짓!
몰아치는 전류가 최명희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있었다.
일반인은 물론이거니와 강력한 헌터라도 한순간에 통구이로 만들 수 있는 벼락의 힘.
이정기의 벼락은 더욱더 특별했다.
파짓!
손에서 뻗어 나가는 전류는 마력과 넥타가 섞여 있는 전류.
동시에 권능의 힘이었다.
파앙!
닿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태워버릴 수 있는 힘.
파짓!
동시에 지면에 닿으면 그 지면을 잠식하여 그 위에 서 있는 생명을 향해 뻗어가는 살아있는 벼락이었다.
‘크윽!’
이렇게까지 벼락을 사용해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권능을 사용해 반동을 입었던 헤르메스처럼.
주륵.
이정기 또한 그 반동을 느끼고 있었다.
벼락의 문제 또한 근본적으로 볼텍스와 같다.
너무 강렬한 힘이기에.
“스스로를 망칠 뿐이다.”
자기 파괴의 성질을 가진다는 것.
스스로가 벼락의 힘을 완전히 이겨낼 수 없다면, 벼락은 상대는 물론 스스로마저 태워버린다.
파짓!
그럼에도 이정기는 멈추지 않았다.
코 앞이었다.
‘아버지의 유산.’
아버지의 유산이, 이성이, 이 시험 하나에 걸려 있었다.
자신이 본 할머니는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지막 시험이다.’
더욱이 최명희는 공언했던 만큼 그 약속을 지키려 노력할 것이었다.
지금의 싸움에서 이긴다면 더 많은 피를 보지 않겠지만 만일 진다면 할머니의 피만큼은 확실히 봐야 할 것이리라.
그렇기에.
파짓!
이정기는 있는 힘껏 벼락을 사용했다.
가슴에서 뻗어 나가는 벼락.
저 높은 하늘에서 그에 호응하듯.
쿠르릉!
또 다른 벼락이 최명희를 향해 내리쳤다.
벼락은 최명희를 쉬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을 묶는 데는 성공했지만.
구웅!
최명희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벽.’
또다시 느끼는 벽.
할아버지는 인간 그 자체의 강함 탓에 무엇으로도 해를 입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면.
‘중력.’
할머니는 중력의 힘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벼락의 줄기마저 꺾어내고 있었다.
“큽!”
느껴지는 반동과 느껴지는 벽에 이정기는 신음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머니를 이길 수 있는 것일까.
제대로 다룰 수 있지만 파훼되어버린 할아버지의 기술.
이제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쥬피터의 권능.
떠오르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쓸모없는 짓이야. 아니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짓이다.”
두 가지를 섞는 것.
“전까지는 네 갑주가 그 반동을 견디는 데 도움을 주었다지만 지금은 없다.”
할머니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휘이이잉! 파짓!
이정기의 한 손에 와류가 또 다른 한 손에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전에도 사용했던 힘.
이정기가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이었다.
하지만.
콰직! 콰직!
할머니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이정기에게서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
‘크으으으윽!’
반동을 억제해주던 사자갑주가 부재한 상황에서 두 개의 힘이 뒤섞이는 반동이 이정기의 몸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었다.
‘좀 더!’
하지만 이정기가 떠오르는 방법이라곤 이것밖에 없다.
할머니를 상대하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는 없다.
설령 몸이 부서질지라도.
‘이제 상관없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이유도 필요 없었다.
이성도, 아버지의 유산도, 할아버지의 자존심도.
그 모든 생각이.
파짓!
전류로 인해 다 타버렸다.
오직 한 가지.
‘증명.’
내 한계를 시험하고 싶다는 생각.
그 한계를 보이고 싶다는 생각뿐.
“안…. 타…. 까…. 구….”
흐릿하게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
이정기는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듯 양손을 내뻗으려 했다.
‘언제부터?’
하지만 그제야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흐릿해져 있는 시야, 그 속에서 할머니는 진실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기우뚱.
이정기의 몸이 그대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양손에 가득했던 힘은 이정기의 마음대로 방출할 수 없었다.
외려.
쿠우웅!
그대로 이정기의 속으로 파고들어 이정기의 몸을 안에서부터 헤집기 시작했다.
이정기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실패했구나.
사자갑주의 힘없이 두 개의 힘을 동시에 제어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리고.
쿠우우우웅!
그 반동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 * *
“왕이시여!”
헤르메스의 목소리.
“정기야!”
유시아의 목소리.
“이런 젠장 할!”
마동철의 욕지거리.
보고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입술을 짓씹고 있던 그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이정기의 양손에 맺힌 두 개의 힘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던 그들이었다.
이정기의 불안정은 최명희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닌 그들에게도 보이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믿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끝까지 믿어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쿵!
이정기의 신형이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계속해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보고 있었기에 최명희가 무엇도 하지 않았음을 안다.
결국, 이정기는 두 개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스스로를 파괴시킨 것이었다.
“안 돼!”
유시아가 보기만 하겠다던 각오를 저버린 채 이정기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뒤이어 헤르메스와 마동철도 유시아의 뒤를 따르려던 순간이었다.
꽈악.
그들의 신형이 보이지 않는 손에 옥죄이듯 그대로 멈춰섰다.
“왜!”
유시아가 붉어진 눈으로 최명희를 향해 소리쳤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최명희를 이해하던 유시아였다.
최명희가 하는 이 행위가 단순한 시험이 아니며, 이정기에게 주는 시련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기를 그 누구보다.
‘당신이 원한다고.’
그렇게 생각했기에 보고만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아니다.
“더 하셔야 만족하겠습니까!”
이정기는 이미 쓰러졌다.
그리고 그 속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싸움을 지속하거나 이정기를 내버려 두는 것은 그대로 이정기를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죽여야겠습니까!”
유시아는 더 이상 감정을 참지 못했다.
“제 아비의 목숨을 앗아간 것처럼! 제 조카의 목숨마저 앗아가야겠습니까!”
최명희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녀를 용서했다.
그러나 유시아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최명희의 중력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제게 용서를 구하셨죠! 저는 용서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제게 용서를 바라신다면 뒤늦게나마 그 대가를 주세요! 속박을 푸세요! 정기를….”
유시아의 눈에서 굵은 물줄기가 쏟아졌다.
“정기를 구해야겠습니다!”
“…….”
그러나 그때, 유시아는 또 한 번 최명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얼굴과 표정.
그토록 오랫동안 살피고 관찰했지만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표정.
‘불안.’
최명희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엇을?’
대체 무엇을 말인가.
“아직… 이다.”
힘겨운 듯 메마른 목소리가 최명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대체 무엇이!”
“지켜보거라! 아직, 아직이니.”
오히려 자신만큼이나 절박한 듯한 최명희의 목소리에 유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헤르메스라고 했던가.”
불안으로 떨리던 최명희의 눈이 헤르메스를 향해 바뀌어 있었다.
이 또한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냉혈의 여제에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분노와 원망과 같은 감정.
“만일 정기가 잘못되면 너희는 전부 내게 죽는다.”
그 목소리에.
“……!”
헤르메스의 눈 또한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구웅!
이정기에게서 다시 한 번 커다란 파동이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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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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