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권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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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놓았던 사이.
“이정기.”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금발의 여인.
분명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시엘 엘리자.’
영국의 시엘, 그리고 올림포스의 원정대 중 하나로 할아버지와 함께 올림포스에서 전쟁을 치렀던 인물.
무슨 생각을 더 하기도 전.
“큽!”
이정기의 온몸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주르륵.
갈라진 상처들에서 핏물이 흘러나왔고, 넥타는 그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쉽네. 이대로 끝낼 수 있었는데.”
웃는 얼굴의 엘리자.
타앗!
이정기는 또렷한 시야를 확인하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주륵, 주르륵.
무엇에 당했는지는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엘 엘리자의 무기가 무엇인지 자신도 알고 있었으니까.
‘레이피어.’
찌르기에 특화된 얇은 검.
가벼움을 장점으로 연속으로 공격하기에 특화된 무기였다.
자신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엘리자는 자신과 부딪혀 삽시간에 상처를 낸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뭐에 그렇게 빠져 있었던 거야?”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오랜 친우와 같은 친근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섬뜩.
그녀의 눈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
고오오.
그녀의 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은.
‘강하다.’
그녀가 얼마나 강하고 위험한 존재인지를 이정기에게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역시 아폴론이 배신했다는 뜻이겠지? 뭐 애시당초 같은 편도 아니었으니 배신은 아닌가?”
“…….”
이정기가 감각을 확인하는 동안 엘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또한 마찬가지고. 뭐 우리도 다들 예상했던 상황이니까. 애초부터 난 너를 이용하겠다는 계획조차 마음에 안 들었거든.”
무엇이.
“안 그래도 짜증을 참지 못할 수준이었는데, 잘 됐어. 바깥이라면 모를까….”
무엇이 그렇게 불만인 것일까.
“여기서는 될 것 같거든. 뭐 만족스럽진 않지만 말이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불평과 불만.
그것이 이정기의 기분조차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까지 있으니….”
그리고 그때.
“모모스!”
뒤늦게 도착한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르메스도 있었구나? 잘 됐어. 여기서….”
“조심하십시오!”
쿠쿠쿠쿠쿵!
“전부 죽여줄게.”
“그녀가 먼저 헤파이스토스를 찾아내었습니다!”
카앙!
이정기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급히 들어 올린 네메아와 충돌한 레이피어가 섬뜩한 빛을 내고 있었다.
* * *
정신을 차리고 마주했던 엘리자는 단언컨대 지구에 돌아온 이정기가 만났던 이들 중 최강자라 할 수 있는 힘을 품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루이기 남매도.
생츄어리의 뷔앙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힘.
그렇기에 순간 이정기는 모모스가 ‘왕’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여기.’
애초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디언과 티탄,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을.
‘올림포스 원정대.’
지구에서 최고라 칭송받는 시엘들, 그리고 그들이 선발한 최고의 헌터들만이 참여했던 원정.
원정대는 수년의 시간 끝에 많은 희생을 거쳐 겨우 가디언들을 쓰러트렸다.
‘그때 가디언들에게는….’
헤르메스와 아폴론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시엘들이, 인간의 원정대가 자신들을 처치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원정대가 도착한 올림포스는 이미 티탄과의 전쟁에서 무너진 상태.
가디언들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채 절반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티탄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그들, 원정대가 가디언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만일 가디언들이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고.
‘쥬피터 할아버지.’
쥬피터 할아버지가 제대로 된 무구와 준비를 갖추었다면.
‘그 또한 이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할아버지, 인간의 최강이라 불리는 이건 또한 위험했을 것이라고.
아폴론과 헤르메스는 말했다.
그러나 또한 경고했다.
‘티탄들은 다릅니다.’
티탄들의 생태는 가디언과 다르다.
애시당초 티탄이 이 올림포스의 주인이었으며, 그들의 감옥마저도 그들의 힘을 제대로 가둘 수 없다고.
만일 완벽한 환경 속에서 티탄과 싸우게 되면.
콰아아앙!
그들은 부족했던 가디언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카카카카캉!
그러니 애초부터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루이기 남매들, 이정기가 처음으로 제대로 상대했던 티탄들이 시엘 엘리자, 불평의 티탄이라는 모모스에 비해 약한 것이 아니었다.
“이게….”
올림포스라는 환경, 그중에서도 티탄들을 가두었던 타르타로스라는 감옥에서.
“우리의 진짜 힘이야.”
씨익.
그들은 제대로 된 힘,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뿐이었다.
쾅!
또 한 번의 충격과 함께 이정기가 뒤로 주륵 밀려났다.
“쿨럭!”
충격파에 내장이 진탕되어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이런 충격을 언제 받아봤던가.
그리고.
씨익.
이런 충격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힘의 소모조차 없다는 듯 서 이정기를 보고 있었다.
“어때? 생각보다 괜찮지?”
엘리자는 웃고 있었다.
“너 따위 인간 놈들이나, 너희보다 조금 나은 가디언 같은 새끼들이나. 운 좋게 전쟁을 이겨 놓고 아주 우릴 개무시한단 말이지.”
저들의 목적이 뭐였었지.
‘맞아.’
기억났다.
“벌레 같은 새끼들. 우리가 가축으로도 사용하지 않던 것들이 말이야.”
지구를 저들의 고향처럼 만든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지구에 있는 티탄들이 지금 엘리자와 같은 힘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더 할 것이다.
녀석들의 목적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닐 것이다.
‘왕.’
녀석들의 왕이 돌아오고, 지구가 녀석들의 고향 땅과 같이 된다면.
누가 그랬던가.
‘지옥.’
말 그대로의 지옥이 될 것이라고.
“이제야 알겠어? 이게 우리야.”
그래.
“이제야 알겠다.”
이정기가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그간 부족했던 목적에 대한 생각.
티탄이 적이라고, 쥬피터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할아버지 또한 티탄을 상대하고 있으니까.
저들의 목적이 지구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니까.
씨익.
“웃어…?”
하지만 전부 와닿지 않는 것들.
그렇기에 그저 이건 할아버지처럼 되고자 목적을 바로 잡았던 것 아니었는가.
그랬었다.
목적은 없고, 억지로 목적을 찾아야만 했다.
이정기에겐 오히려 복잡할 것 없이 할아버지들과 훈련하며 살아가던 올림포스의 삶이 더욱 생기 넘쳤으니까.
하지만 찾았다.
아마조네에서 들었다.
‘너는 전사인가?’
그래.
“나는 전사야.”
“다시 또 미친 건가?”
“너희가 상대하기 시시한 피라미가 아니라면….”
씨익.
다시금 이정기는 입가를 말아 올렸다.
“너희를 상대할 만하다는 거야.”
이건 할아버지가 목표였지만, 할아버지와 비등해져도 이정기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올림포스에서 이정기가 배운 것이 무엇인가.
생존이었다.
그렇다면 올림포스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죽이는 법.’
이정기는 싸움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전투를, 전쟁을 배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덧없이 느껴지던 요즘.
씨익.
이제야 그 상대를 찾은 것이었다.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헤르메스의 목소리.
“모모스가 이미 헤파이스토스의 넥타를 찾았습니다! 그 말은…!”
서걱!
급히 고개를 틀었다지만, 볼에서 섬찟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쳐 지나간 무언가.
주륵.
흘러내리는 피.
“신들의 무구를 차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모스의 레이피어가 태양과 같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 * *
개방된 감각 속에서 이정기는 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파아아앙!
그 파장이 겨우 물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콰앙!
바닥을 박차는 것만으로 지반이 부숴지고, 공기의 파장이 칼날처럼 스쳐갔다.
섬광과 같은 움직임, 동시에 바위와 같은 파괴력을 수반한 움직임이었다.
“이런….”
유시아의 목소리.
“이런 싸움이… 있을 줄이야.”
넥타를 각성하고, 아르테미스의 힘을 이끌어내기 위해 훈련했던 유시아.
시엘이 최고라 생각했던 세상이 그때 한 번 깨부숴졌다.
지금껏 알던 세상은 그저 알껍질 안의 세상이었다고, 이제야 제대로 된 세상을 보게 되었다고 설레면서도 떨리며 두려웠던 것이 그녀였다.
하지만.
파르르.
지금 이것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콰아앙!
빛과 빛이 만나 어느 것이 더 밝은가를 겨루는 것과 같은 싸움.
유시아는 둘의 움직임을 쫓는 데만 모든 힘을 소모해야만 했다.
“…….”
마동철은 아예 그들의 움직임을 쫓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인간들 중에서는 최고라 자부했던 그의 실력과 눈이었지만.
“맙소사….”
이제 더 이상 이 싸움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저 휘말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숨죽일 뿐.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는 건가요?”
헤르메스를 향한 유시아의 물음.
“물론입니다.”
의외라면 헤르메스의 대답이 쉬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저 티탄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저희입니다.”
자부심과 자긍심, 그리고 초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왕의 힘이 성장하고, 올림포스의 신전이 우뚝 서는 날.”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한 목소리.
“저희 또한 어디서나 저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왕이라면… 설마 정기가 저것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지금도 유시아는 이정기가 괴물처럼 느껴졌다.
속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조카라고, 유영아의 아들이라고, 달 사냥꾼들을 향해 보였던 모습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콰아앙!
빛들의 싸움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안광의 이정기는 괴물이었다.
“더….”
헤르메스의 목소리.
“더 강해지실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저분이야말로….”
아까와 비교해도 더 짙은 그리움과 초조함, 그리고 기대감이 서려 있는 목소리.
“혼돈의 끝을 보실 분이시니까요.”
콰아아아아앙!
폭발과 함께 섬광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또 한 번,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시작입니다.”
“뭐가…?”
“왕의 성장도.”
이어진 목소리.
“이 싸움도.”
쿠우우웅!
지반이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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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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