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권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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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현대다.
이씨 왕조의 조선은 끝난 지 백여 년이 넘게 흘렀고, 입헌 군주제가 아직도 시행되고 있는 영국도 아니었다.
하지만.
‘승계.’
왕가라 칭하지는 않을지언정, 왕가와 다를 바 없이 취급되는 단체.
그것이 바로.
“이성의 승계 다툼일세.”
이성이었다.
법체계에 속해있으며, 따로 정해진 신분 따윈 없다.
그러나 그것은 눈가리개일 뿐.
이성은 대한민국에서 왕가와 같은 절대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성혈이라 부르며 특수한 신분처럼 취급받는 것이 현실이었다.
김윤태가 그런 망나니짓을 했음에도 백두의 후계로서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나, 주형태와 같은 성혈들이 과거 무슨 잘못을 저질렀어도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감옥이 아닌 사회였다.
‘이성은 대한민국의 왕가다.’
헌터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진실이자 현실.
그리고 지금.
“……!”
이성의 승계 싸움이 본격화되었다고 현성호가 말한 것이었다.
김창섭의 두 눈은 크게 떠졌으며, 저도 모르게 김윤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
잔잔하게 가라앉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김윤태의 모습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현성호의 말은 사실이라고.
김윤태 또한 서열은 낮다 하나 이성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가진 자, 그런 김윤태가 이성의 승계에도 조용히 입을 닫고 있다.
김윤태는 인정한 것이다.
“맙소사.”
저기 서 있는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이정기.
“정말….”
이정기가 이성의 주인의 자리에 자격이 있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이성의 후계이자 후대의 이성의 주인은 당연히 주형태나 주인배 둘 중 하나인 것이었다.
그 둘과 이정기가 겨루겠다고?
그리고 아직 그들조차 선언하지 않은 승계 다툼을 이정기가 먼저 선언하겠다는 것인가?
“…….”
지금껏 금기처럼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왔던 일이었다.
본디 이성의 후계자 자리는 공공했다.
‘이강.’
하지만 그가 사라지고 이성은 후계를 잃은 채 지지부진한 시간을 보내왔다.
그 사이 이성은 얼마나 많은 홍역을 앓았던가.
주인배와 주형태의 보이지 않는 싸움, 이성의 헌터들은 누구를 제대로 따라야 할지 모른 채 갈팡질팡하며 파벌을 나뉘어왔다.
파벌 싸움은 점점 더 과격해졌고 그 과정에서 이성의 전력 또한 손실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이성의 헌터들이 기다리고 기다린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승계.’
제대로 된 이성의 주인이 정해지는 것.
하지만.
“그에게 자격이 있다 생각하시는 거요?”
이정기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현성호가 이정기를 선택했다.
김창섭도 안다.
오히려 주형태나 주인배보다.
“큭.”
이정기에게 정통성이 있음을.
이성의 주인으로 내정되어 있던 이강의 아들.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한 혈통.’
왕조가 존재하던 시절, 왕족의 피에는 특별함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따위 것은 없다는 것을 세상 모두가 안다.
그러나 이성은 다르다.
‘특별하다.’
그 혈통은 진심으로 특별하다.
헌터의 힘, 재능, 잠재력.
주 씨의 성을 가진 성혈들과 달리 이정기의 성은 이 씨.
“이, 건.”
최강이자 최악, 하지만 누구도 부정 못 할 진실.
‘최고.’
최고의 피, 이건과 최명희의 피를 타고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강이며, 어머니는 유영아다.
“현 선배 말이 맞습니다.”
현성호의 말이 맞는다.
이정기에게 자격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김창섭은 소리쳤다.
“아직 스물 중반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입니다. 지구에 귀환한 지도 채 수년이 되질 않았습니다.”
“…….”
“몇 년이 더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선언은 일러도 너무 이른 것이었습니다.”
김창섭의 말에 현성호는 오히려 웃었다.
“그럴까.”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도 그러했다.
그러나 현성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정기는 완성됐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지금도 미완성이라면 완성된 이정기는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김창섭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무기를 회수하고 천천히 물러서며 소리쳤다.
“회장님께서 허하신 일입니까?”
가장 중요한 자, 최명희의 선택.
“일단은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김창섭은 경고하듯 말했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누군가 져야 할 겁니다.”
* * *
현성호는 아마조네에서 이정기의 편으로 갈아탔다.
하지만 주안나와 이정기가 협약을 맺음에 따라 조금 바뀐 것이 있었다.
“현성호 공대장님과 호걸의 공격대원들이 이성으로 복귀했습니다.”
귀환한 현성호는 백두가 아닌 이성으로 돌아갔다.
물론 던전 입구에서 생겼던 일련의 소란으로 그의 입지가 흔들릴 것은 자명하나.
‘귀와 눈이 되어주지.’
그는 지금부터 벌어질 일들에서 이성을 감시하는 눈과 귀과 되어주겠다고 했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힘든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이 사냥이니까.’
조금은 알 것 같은 현성호의 성격과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강민혁이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돌아온 이성의 공대원들의 수가 극히 적은 것이나….”
말을 이은 것은 이진석.
“안인회 공대장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의혹 때문입니다.”
이성과 백두의 충돌.
김윤태가 세워둔 벽으로 인해 기자들과 협회는 던전에서 나온 백두와 이성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추측할 뿐.
백두의 공대원들은 거의 전원에 가깝게 돌아왔고, 이성은 현성호와 호걸만이 돌아왔다.
그 말뜻이 무엇일까.
‘백두의 승리.’
백두가 이성과의 총력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취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이성.’
이성의 공대원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던전 속에 묻혔다 생각하는 것이었다.
주안나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다.
안하무인 격 태도와 그 태도로 인해 벌어진 일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주안나도 대한민국의 자랑이긴 했다.
강한 헌터, 세계에 꿇리지 않을 헌터.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안인회였다.
이성의 기둥.
그건 단순히 실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월.’
오랜 헌터 생활을 통해 그가 쌓아올린 업적.
그가 구해낸 사람들.
그가 이뤄낸 모든 것들.
그런 안인회가.
‘너무 허망하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수면 아래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던 길드전이나 헌터들의 알력다툼이 이정기로 인해 수면 위로 끄집어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
이진석의 목소리.
“누군가 개입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성의 일은 어지간해선 자극적으로 보도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성이 패배했다면 이 대한민국에서 그 사실을 크게 떠들만한 간 큰 자들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연일 이성과 백두.
아니 스러진 주안나와 안인회, 그리고 이정기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진실을 모르는 자들.
이정기에게 진실을, 백두의 헌터들과 이성의 헌터들에게 사실이 어떤지를 요구하고 있으나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신경 써야 하는 겁니까?”
이정기의 대답.
강민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기는 그 누구보다 노련한 듯 하지만, 아직 지구 특히나 대한민국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가 바라는 것이 이성의 정점이라면.
“필요합니다.”
신경 써야 한다.
이성의 정점은 대한민국 전체를 장악해야 하니까.
“제가 맡겠습니다.”
강민혁이었다.
“이런 쪽에 일은 제법 해보았습니다. 전문가들도 꽤 알고 있고요.”
주병훈의 밑에서 오랫동안 뒤처리를 했던 강민혁이었다.
그가 주로 했던 것은 주병훈의 심기를 거스르는 이들이 다시는 주병훈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 수많은 이해관계가 있었다.
이정기의 얼굴을 살피는 강민혁.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정기의 얼굴에 강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정확히 안다.
그간 느껴온 이정기.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는 겉보기뿐인 충성과 협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제대로 믿을 수 있는, 이해관계가 제대로 성립할 수 있는 관계.
현대의 시대에선 그것이 돈이었으나, 이정기는 그보다 더 깊은 것을 바란다는 것도.
“이성이란 이름에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이성.
“이성의 정점이 되고자 한다면 당연히 끌어들여야 할 이들입니다. 전이라면 움직이지 않았을 자들이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현성호가 말하지 않았던가.
“승계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돌고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은 작건 크건 배팅을 시작해야 할 겁니다.”
이성의 황제가 누가 되느냐.
그것이 그들에게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줄 테니까.
“책임지고 데려오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씨익.
이정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띠링.
그때, 이진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길드장님.”
이정기를 부르는 이진석.
“손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
* * *
지금 이정기를 만나기 위해 연락을 취하고 있는 이들은 가히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작게는 기자들부터, 크게는 어느 길드의 길드장들까지.
하지만 그들 중 이정기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거나 답신을 받는 이들은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직접 만난 이는 오직 하나.
“…….”
이 자가 유일했다.
어색한 침묵.
그 속에서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정말.”
무거운 목소리.
“다 죽이신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담담함은.
‘마치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한 목소리.’
남자.
“어떨 것 같습니다.”
협회의 정훈을 향해 이정기가 말했다.
과거 협회의 정보부장으로 이정기를 여러 면에서 도와줬던 그는, 지금.
“협회장님.”
협회의 협회장이 되어 이정기와 독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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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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