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권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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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보고 있는 두 남녀, 이정기와 윤하민의 육체를 뒤집어쓴 유영아가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씨익.
둘은 웃고 있었다.
“아들.”
천천히 움직이는 유영아.
마치 바람에 부유하듯 미끄러져 나간 그녀는 어느새 이정기의 앞에 서서 손을 내뻗고 있었다.
“꼭….”
그대로 이정기를 안으려던 유영아.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녀가 멈칫하며 잠시 뒤로 물러섰다.
“이 아이에게 실례는 아니겠지?”
지금 유영아는 그녀의 육체가 아닌 윤하민의 육체에 깃든 상태.
-괜찮아요.
“어머. 말을 걸 수 있는 거니?”
유영아는 갑작스레 들려온 윤하민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아까 전 느끼시던 감정을 저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때 정신이 들었답니다.
“쑥스럽구나.”
-괜찮아요. 그러니….
윤하민의 벅차면서도 굳건한 목소리가 유영아의 머릿속에 울렸다.
-길드장님을 꼬옥 안아주세요.
그리고.
꽈악!
유영아는 그녀의 말대로 이정기를 거세게 안았다.
“아들…, 아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 말밖에 전할 수 없었다.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아들인가, 얼마나 만지고 싶었던 아들인가.
지옥 같던 전장 속에서 낳아 이건의 손에 맡기고 제대로 안아보지조차 못한 아들이었다.
“정기… 야!”
그 이름을 육성으로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가.
“어머니.”
이정기 또한 먹먹함을 참는 것인지, 감정을 억누르며 유영아를 부르고 있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많이 안고 싶었고. 우리 아들 훌륭히 자라줘서 너무 고마워.”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것들 하셔도 좋아요.
“이 아이가 배려해주고 있단다.”
안았던 이정기를 떼어내 이정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유영아.
눈, 코, 입.
정령으로서 지켜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느낌에.
“흐…, 흐흐흑.”
유영아는 결국 구슬픈 울음을 토해냈다.
꽈악.
이정기가 다시 그녀를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이렇게 다시 봤잖아요.”
이정기가 지금 안고 있는 것은 윤하민이 아니다.
윤하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아아.
이정기에겐 윤하민에게 깃든 본질, 유영아의 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쥬피터 할아버지의 힘을 계승하고 귀찮은 일이 많았지만 좋은 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장담컨대.
‘감사합니다. 쥬피터 할아버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넥타를 통해 상대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기에, 어머니의 형체를 또렷이 볼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할아버지가 주신 진정한 선물이라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해보고 싶은 것들도 많고.”
“다 하시면 돼요. 얼마든지 해도 돼요.”
그러나 유영아는 이정기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란다.”
마음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이 아이가 버틸 수 없어. 나도 아직 익숙하지 않고.”
윤하민에게 부담이 되는 일, 이정기는 더욱 떼쓸 수 없었다.
“앞으로 종종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단다. 이 아이와 함께 널 지켜볼게. 그리고….”
유영아의 눈빛이 일순 변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단다.”
결심한 듯 굳건해진 유영아의 눈빛에 이정기가 순식간에 사방의 소음을 차단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세요.”
어머니가 처음 하는 부탁이다.
이정기는 진심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이루어질 각오가 있었다.
“안나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
“많이 아팠던 아이란다. 후회도 많이 하고 있고. 표현이 서툴러 네게 말을 건네기 힘들어할 거야. 조금만 배려해줄 수 있겠니?”
어머니가 처음 하는 부탁이 주안나에 대한 것이라니.
이정기는 잠시 주안나에 대한 질투심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지만, 유영아의 눈빛에서 그녀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주안나를 걱정하는 것은 사실이나.
‘나를 걱정하시는 거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후회를 할까, 어머니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노력할게요.”
“그런 대답이면 충분하단다.”
장하다는 듯 눈을 반달처럼 휘고 이정기의 머리를 쓰다듬는 유영아.
“메두사는 내가 거둘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죽은 것 아니었나요?”
스윽.
고개를 젓는 유영아.
“오랫동안 봉인 당한 채 정신마저 잃은 아이야. 이미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었단다. 그렇기에 저렇게 폭주했던 것이고.”
이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아들. 그리고….”
스으윽.
그녀가 윤하민의 몸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 정확히 하자면 육체의 지배권을 넘기는 것이 느껴졌다.
작별이 아닌 잠시간의 이별.
천천히 사라지는 유영아의 목소리가 이정기의 머릿속에 울렸다.
-하데스를 찾거라.
하데스?
-그가….
흐릿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다르게 이정기는 온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 이어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네 아버지의 영혼을 가지고 있단다.
마치 망치처럼 이정기의 머리를 후려쳤다.
* * *
“끄….”
정신이 든 주안나.
“끄으으윽!”
그녀가 고통을 참지 못한 채 신음했다.
메두사와의 싸움에서 주안나는 제 능력 밖의 일을 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책임 없는 힘이 없는 만큼, 그 반동은 고스란히 주안나의 몸에 쌓였고.
“컥! 커억!”
주안나는 그 반동에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안나가 아찔해진 정신에 혼절하려던 찰나.
쏴아아.
그녀의 몸에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조금씩 안정되는 호흡.
‘어떻게?’
그 이후 주안나가 든 생각은 의문이었다.
과도한 능력의 사용으로 인한 반동, 포션이나 서포트 계열 헌터들의 힐링 능력으로는 회복 불가능한, 사실상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이겨내지 못하면 죽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회복이었다.
그것도.
싸아아.
마력으로 인한 회복.
“좀….”
주안나의 귓가로 들려온 목소리.
“괜찮으세요?”
뒤이어 자신을 치료한 자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너…!”
윤하민, 주안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으그그극!”
하지만 주안나는 다시금 느껴지는 격통에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괴이한 신음을 냈다는 것에 창피한 건지, 윤하민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창피한 건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제가 치료한 건 영혼이에요.”
윤하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육체는… 쉬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정령의 힘을 깨달은 윤하민은 과도한 힘, 선조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주안나의 영적인 상처를 회복시켰을 뿐이었다.
그 육체에 새겨진 부상은 주안나나 다른 이도 치료할 수 없어 기다리는 상태.
“후우.”
겨우 주안나가 진정하며 숨을 내뱉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숙모님.’
떠오르는 갖가지 기억들.
저도 모르게 다시금 얼굴이 붉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저씨는 어디 간 거야?’
대체 왜 자신이 윤하민과 함께 있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이미 이곳은 메두사의 둥지가 아닌 아마조네에 도착해 있는 듯싶었다.
“내가….”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겨우 입을 연 주안나가 윤하민을 향해 물었다.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거야?”
“일주일 정도에요.”
옆에 있던 수건을 가져온 윤하민.
‘일주일.’
주안나는 다시금 입술을 짓씹었다.
“너는…?”
자신만 무리한 것이 아니다.
윤하민 또한 유영아를 강림시키기 위해 온몸에 부담이 갔을 터였다.
만일.
“삼일이요.”
“으극!”
“지금 얼마나 쓰러져 있는지 가지고 자존심 상하신 거예요?”
윤하민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
“저는 특별한 경우라고 하더라고요.”
윤하민은 그런 주안나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길드장님이 도와주셨어요.”
“이정기… 가?”
“제가 빠르게 성장했던 이유가 길드장님 덕분이잖아요. 길드장님이 저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고요.”
이정기는 그런 것도 가능하다는 건가?
“후우.”
숨을 내쉰 주안나.
털썩.
그녀가 그대로 대자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완패.’
자신의 완패다.
메두사를 쓰러트린 것은 자신과 윤하민이라고 하지만.
‘녀석은 이미 메두사를 쓰러트릴 수 있었어.’
기회를 받았다.
이정기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합격이다.’
왕좌의 시험에만 몰두하고 있던 자신, 그러나 이정기는 오히려 그런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젠… 장.”
한쪽 팔로 제 얼굴을 가린 주안나.
그 틈 사이가 물기로 젖어가는 것을 본 윤하민은 말없이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 * *
가장 오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주안나가 깨어나고 이틀.
주안나는 이제 조금씩 거동하는 데 무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
호출이 있었다.
아마조네 왕국의 커다란 나무 앞 광장.
그곳에 백두와 이성.
“…….”
아마조네의 전사들과 백성들이 한 데 모여 있었다.
주안나는 이 상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치렀던 것.
‘왕좌의 시험.’
아마조네의 차대 여왕을 가르는 시험의 결과를 발표하려 한다는 것을.
“주안나, 윤하민.”
호명 받아 단상 위에 올라가는 둘.
산뜻한 바람과 코를 간질이는 풀내음.
며칠 전까지 메두사의 둥지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과 그 괴로움은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으극.
주안나는 어금니를 깨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생각했던 일, 이 지긋지긋한 운명을 뒤바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일.
굴레를 벗어나, 이성의 이름을 버리고 당당히 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힘.
‘나는….’
하지만 결국 자신은 실패했다.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았지만 주안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아내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억울하고 분통해야 하는 자신이.
“하아!”
후련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모든 것을 쏟아보았던 일.
아버지라는 거대한 벽을 떠올리며 쫓기듯 움직인 것이 아닌, 자신과 비등한 상대와 처음으로 겨루어보았다는 경험.
그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것은 한 가지.
씨익.
바로 유영아를 다시 만났다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 노력한 자신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었다.
수년간 암 덩이처럼 자라있던 감정의 종기가 잘려나간 듯한 가벼움이었다.
“결과에 수긍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주안나.
그런 주안나에게로.
“차대 여왕은 주안나다.”
“……?”
웃고 있는 히폴리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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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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