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권 16화
166
꿀렁.
저 멀리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변화.
그 중앙에서 기분 나쁜 음색이 들려왔다.
꿀렁.
듣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치고, 구역질이 나온다.
일렁이고 있는 검은 그림자.
검다고 말하기엔 너무 짙은 그림자가 모든 빛을 빨아먹듯 그 중앙에서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덜덜덜.
떨고 있는 헌터들.
꾸욱.
그 떨림을 잡고자 제 허벅지를 짓누르는 헌터들.
꽈악.
주안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일렁이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결국, 이 순간이 되었다.
시험의 마지막, 블랙 메두사 퀸.
저것만 잡는다면.
‘왕좌는 내 것이야!’
아마조네의 왕좌도, 이성의 왕좌도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꿀렁.
주안나 또한 저 검은 그림자에서 근원적인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신 차려-!”
그녀는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힘에 대한 갈망,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에 대한 갈망.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 기회를 잡았는데 공포에 몸이 굳어 떨고만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화아….
이 공포를 밀어내기 위한 몸부림.
화아아악-!
주안나의 몸에서부터 폭발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화아악!
뿜어져 나온 마력은 주안나는 물론이거니와, 이성의 헌터들을 전부 감쌀 정도로 커다랗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곧이어 헌터들의 떨림이 멎었다.
“마지막이야.”
주안나의 목소리.
“마지막으로 저것만 쓰러트리면….”
주안나의 그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언제나 오만하고 깔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 진중하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온다.”
지금까지 오만했던 그녀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처럼,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함께 한 자들의 노력은 잊지 않겠다. 그 어떤 보상이라도 하겠다. 도망치지 마. 부탁이야.”
주안나는 말을 이었다.
“도와줘.”
말투는 가볍다 하지만, 그 안에 서린 감정은 무겁다.
그리고.
툭.
안인회가 한 발자국 걸어 나와 말했다.
“물론입니다.”
안인회가 꺼내든 검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마력이 주안나의 마력 방벽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저희는….”
입가를 말아 올리는 안인회.
“이성입니다.”
화아아아아-!
이성의 헌터들 전원, 그들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메두사를 쓰러트리며 이 자리까지 온 그들.
백두와 엇비슷하게 공적을 세운 그들이었지만, 지금 그들 전원이 뿜어내고 있는 힘은 아까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강한 메두사를 상대로도 조절해왔던 힘을 지금 전원 개방한 것이었다.
그 모습이 과연 이성이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대단하고 위협적인 것.
꿀렁.
저 멀리서부터 움직이던 검은 그림자.
뚝.
그것이 멈춰 섰다.
“온다.”
수많은 경험을 쌓은 이성이 지금부터 벌어질 일을 예상하지 못한다고 하면 거짓이리라.
“방어 대형! 방어 준비! 전원 배리어 아이템을 활성화시키고 서포트 계열의 헌터들은-!”
쉼 없이 내려지는 명령.
그리고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이행되고 있는 명령.
순식간에 이성 전원은 그 무엇이라도 막을 수 있는 철벽의 방어진을 갖추고 있었다.
“와라! 이 개자식아.”
주안나 또한 자신감을 얻은 채 입가를 말아올리고 말하던 그 순간.
우웅.
찰나에 느껴지는 진동과 함께 주안나의 얼굴이 천천히 뒤틀리고 있었다.
탁, 탁.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
뒤틀린 주안나의 얼굴이 천천히 옆으로,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주안나는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무슨 일이 생긴 지 모르는 것처럼 결연한 얼굴로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는 이성.
그 속에.
“안 돼-!”
검은 미녀가 서 있다는 것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뒤늦게 폭발이 일었다.
* * *
꿈틀.
이정기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지, 지금….”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백두의 헌터들의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
이성과 같이 백두도 지금부터 벌어질 일에 대비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벌어진 상황 자체가 급이 다르다.
“뭐 하는 거야! 새끼들아-!”
언제나 존중과 배려를 마다치 않았던 헌터, 이진석.
“당장 피햇!”
그가 미친 듯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반대 진형에 자리를 잡고 철벽과 같은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던 이성.
그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다.
콰아아아앙!
다시금 이성 쪽에서 일어난 폭발과 함께 검은 빛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 커지고 있었다.
이정기의 눈이 폭발 속을 들여다보았다.
“…….”
자신을 향해 오는 눈동자가 반달처럼 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 그녀의 입은 더욱 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즐겁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정.
‘블랙 메두사 퀸.’
저 검은 드레스를 입은 미녀가 그 괴물이라고, 이정기는 눈치챌 수 있었다.
또한, 동시에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저것이….’
지금껏 보았던 메두사란 것들.
그것들은 전부 복제된 열화품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저것이 진짜다.
저것이.
“메두사.”
진짜 메두사라는 것을.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강맹한 힘, 마력과.
‘넥타.’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히드라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고, 더 데이의 루이기 남매보다도 더 거대한 넥타.
그러면서도 그 성질 자체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끄아아아악!”
이성의 진형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폭발이 걷히고 드러난 광경은 모두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단 두 번의 공격, 그것으로 이성의 전력 절반이 무너져 있었다.
“아… 안… 돼….”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이 산산히 조각나는 모습.
그 어떤 반항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조각가는 그들의 모습은 과거 몬스터를 처음으로 상대해야 했었던 헌터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카아앙!
뒤이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여버린다.”
전장의 중앙에서 울려 퍼진 쇳소리.
“죽여 버린다-!”
주안나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제 창을 끊임없이 검은 미녀를 향해 찔러넣고 있었다.
채채채챙!
그것을 막아서는 메두사는 그저 제 손을 튕기며 받아낼 뿐.
씨익.
그 미소를 지우고 있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절망에 가득 찬 채 들려오는 헌터들의 목소리.
저것이야말로 괴물이다.
‘열쇠.’
이정기가 보르예가 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그녀들이 열쇠를 사용한다면 돌이킬 수 없소.’
올림포스가 건재하던 시절을 더욱 지나가 고대에 봉인 당한 괴물 중 괴물, 메두사.
그 존재를 봉인하고 그 힘을 나누기 위한 열쇠가 존재한다고.
그냥 깨어나는 블랙 메두사 퀸도 절망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끼히히히히.
열쇠를 통해 힘을 되찾은 블랙 메두사 퀸은 가히 절망이라는 단어를 쓰기조차 힘들 것이라고.
‘최고 전사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소, 그리고 그것을 사용해 깨울 생각이지.’
최고 전사들이 열쇠를 사용했고.
‘최고 전사들은 블랙 메두사를 상대할 수 있나? 그토록 강력하다면 무슨 각오로 그런 짓을 벌이는 것이지?’
‘그녀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소. 열쇠는 메두사의 힘을 되찾게 도와줄 뿐 아니라….’
보르예.
‘메두사를 조종할 수도 있소.’
그녀는 결코 그런 일이 생겨선 안 된다며 말했다.
‘그러니 그 전에 결정을….’
그리고 지금.
“커억!”
주안나는 검은 미녀의 손에 부여 잡힌 채 탁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당장 메두사가 손에 힘을 조금만 더 준다면 주안나의 목이 비틀어질 상황.
부릅.
그러나 주안나 또한 이대로 당할 생각은 없었다.
파아아아앙!
그녀에게서 뿜어나온 마력이 메두사의 손을 튕겨내고, 주안나를 휘감았다.
휘몰아치는 마력이 마치 갑주처럼 변해 주안나의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 속에서.
파앗!
훨씬 더 빨라지고 강력해진 창끝이 메두사의 머리통을 제대로 조준하여 찔러오고 있었고.
훼에엑!
마침내 그 창끝이 메두사의 머리통에 직격한 순간.
콰아앙!
다시 한 번 폭발이 일었다.
* * *
믿을 수 없는 힘.
괴물.
공포.
절망.
그런 것들이 꾸물거리며 속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망쳐!’
그런 생각.
‘못 이겨!’
이런 생각들이 쉼 없이 머리를 때려댔다.
하지만.
꽈악.
주안나는 입술을 씹으며 창을 움직이고 있었다.
단 두 번의 공격에 절반이 전투 불능에 빠진 상황.
이 상황에 밀어 넣은 것이 자신이었는데, 적이 강하다고 도망칠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않나.
“도망 안 쳐….”
흘러나온 것들을 집어삼키며.
“이길 수 있어.”
주안나가 메두사와 마주한 채 소리쳤다.
“살아남은 이성의 헌터는 들어!”
“흡!”
“전원 뒤로 물러난다.”
“……!”
후퇴?
그런 게 아니었다.
꾸욱.
창을 부여잡은 주안나는 결코 후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포트 계열의 헌터들은 전원 나에게만 서포팅을 집중한다.”
“……!”
“탱커들과 딜러들은 서포트 헌터들을 지키는 데만 집중한다.”
혼자.
“전투는 혼자 한다.”
주안나는 홀로 메두사를 상대할 생각인 것이었다.
주안나의 명령을 들었지만 쉬이 움직이지 않는 이성.
“뭐햇!”
주안나의 고함이 울려 퍼지자 그때야 이성의 헌터들이 부상자를 데리고 조금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터벅.
옆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혼자 싸우게 둘 생각은 없습니다.”
“나도….”
주안나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입가를 말아 올렸다.
“아저씨를 빼놓을 생각은 없었어요.”
안인회.
그가 서늘한 눈으로 메두사를 보며 검을 들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메두사는 그저 아름다운 미소를 흘리며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정기.’
백두가 서 있는 그곳을.
“감히….”
주안나의 창끝으로 믿을 수 없는 기운이 몰아쳤다.
깨어난 넥타, 그로 인해 증폭된 마력.
그 모든 힘이 일점에 집중되고 있었다.
“한눈을 팔아!”
그런 그녀가 마침내 땅을 박차고 메두사에게 쏘아지려던 순간.
“멈추시오. 후계.”
라예르의 목소리가 눈앞에서 들려왔다.
길 안내를 했던 최고전사들.
보르예를 제외한 나머지 최고전사들이.
“비켜.”
마치 메두사를 지키듯 서 있었다.
“정말….”
라예르는 주안나를 보며 황당하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힘을 보고도….”
라예르의 눈이 순간 매섭게 빛났다.
“선택을 할 셈이요?”
주안나를 먼저 찾아가 제안했던 라예르.
그때 들었던 선택을 지금 주안나는 유지하려는 것일까?
이 절망적인 힘을 보고도?
“무엇이 되었건, 기다리시오. 주안나. 그대가 진정 시험을 치르고 싶으면 치르게 해줄 터이니.”
돌아가는 라예르의 시선.
“먼저, 저들부터 지워야겠소.”
백두를 향해 그녀들의 적의가 쏟아지고 있었다.
메두사 또한 더 이상 이성에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리며 제 손을 뻗으려 했는데.
투캉!
강렬한 충격파가 일순 퍼져나갔다.
“정말….”
소리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주안나.
그녀가 뒤돌아선 메두사를 향해 제 창을 집어던진 것이었다.
“꺼져. 내 싸움에 훼방 놓지 말고.”
주안나가 살기를 가득 품은 채 최고전사들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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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 2012년 4월 12일 제399-2016-000057호
발 행 일 | 2020년 12월 22일
ISBN 978-89-6788-793-3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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